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8화
우리는 산을 오르며 밀로를 찾아 나섰다. 산에서 야생동물 튀어나오듯이 가끔 마물들이 덤볐지만 마력으로 간단히 무찔렀다.
“깨갱…….”
내 몸에서 나온 은색 기운이 D급 마물 흑토끼를 기절시켰다. 옆에서 지켜보던 제드가 내게 칭찬해 주었다.
“잘했어.”
“겨우 D급 마물 물리친 걸로 칭찬해 주는 거야?”
제드가 내 실력을 낮게 보고 있는 건가 싶어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난 C급 마물을 마력 없이도 물리칠 수 있다고!
이어서 B급 마물, 하트 원숭이가 등장했다.
하트 원숭이가 공격하기도 전에, 나는 은색 기운으로 직육면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쾅! 내려치자 하트 원숭이는 찌부러진 채로 기절했다.
제드가 감탄했다.
“대단하네, 메이.”
나는 우쭐해져서 어깨가 올라갔다.
“마력이 있으면 이 정도는 간단하지.”
이를 지켜본 디아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제 옆으로 다가오는 하트 원숭이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가볍게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 밀었더니.
슈웅― 퉁―
B급 원숭이는 멀리 날아가 두툼한 나무에 부딪혀 기절했다.
“정식 수호 기사씩이나 되어 놓곤 겨우 이 정도에 우쭐해지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디아고는 괜히 내게 시비를 걸었다. 위스키를 부었던 일에 대해 사과도 안 하고 시비를 걸다니. 나를 정말로 싫어하나 보다 싶었다.
“B급 마물은 처음 무찔러 봐서 신이 난 것뿐입니다. 당연히 수호 기사면 이 정도는 해야겠죠.”
나는 차갑게 대꾸하곤 제드에게 물었다.
“산이 넓으니까 이쯤에서 흩어지는 게 좋겠지? 그래야 밀로를 빨리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꼭 따로 다녀야 해?”
제드는 나와 떨어지기 싫은 티를 냈다.
“혼자 다니면 위험할 것 같아. 같이 다니자.”
“위험하면 수호 기사분들이 도와주실 테니까 지금은 따로 찾아보자.”
하지만 날이 어두워져도 밀로를 못 찾을까 봐 걱정이었던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효율을 따진다면 각자 나눠서 탐색하는 게 맞았다.
“나는 이쪽으로 갈게. 너는 저쪽으로 가.”
가운데 길을 가리킨 후, 제드에게 가까운 왼쪽 길을 가리켰다. 오른쪽 길은 자동으로 디아고가 가야 했다.
제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말을 따랐다.
“……알겠어. 글리우곤을 발견하면 호루라기를 불어.”
우리는 따로 다닐 때 서로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있었다.
“응. 너도.”
제드를 보낸 후, 나는 어쩐지 할 말 있는 표정으로 계속 나를 보고 있는 디아고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가운데 길로 향했다.
하지만 세 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그만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얏-!”
디아고는 넘어지는 나를 보고 놀라 흠칫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땅에 부딪친 무릎을 보았다. 살짝 까져 불그스름했다.
멈칫했던 디아고를 돌아보다, 눈이 마주쳤다. 디아고는 눈동자를 잘게 떨더니 고개를 휙 돌리고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넘어질 때 바로 마력을 써서 무릎을 보호했어야 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넘어지는 바람에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돌발 상황에 마력을 사용하는 건 원래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긴 했다.
“앞으로 연습 열심히 해야지.”
나는 흙 묻은 손을 털고 앞으로 나아갔다.
***
1시간 후, 나는 밀로가 아닌 글리우곤을 발견했다. 내 몸의 30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회검색 드래곤.
그 마물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바람이 일어났다.
나는 긴장한 채로 호루라기를 만지작거렸다.
‘발견하면 호루라기를 불라고 했는데…….’
막상 불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거대한 글리우곤의 기에 눌려 버렸다.
혼자서는 위험할 것 같아. 수호 기사분들을 모아야겠어. 나는 그 근처에서 수호 기사를 찾아다녔다.
근처에 있던 수호 기사는 둘이었다. 그 둘에게 상황을 빠르게 전달하고, 셋이서 함께 글리우곤을 상대하기로 했다.
“글리우곤이 저희를 발견하면 일이 골치 아파질 것 같아요. 그러니 한 방에 기절시켜요.”
“좋은 생각입니다. 힘을 모아 글리우곤의 목을 노리면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목표물에 몰래 다가가 마력을 끌어모았다.
“셋 하면 공격하는 거예요. 하나.”
“둘.”
“셋……!”
펑―! 우드득우드득! 콰지직!
온 힘을 다해 글리우곤의 목을 노렸고, 마력에 의해 돌처럼 단단한 목이 부서지다 못해 잘렸다.
“죽인 건가……?”
그러나 두 덩이로 분리된 글리우곤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환영이었던 것처럼. 본체가 아닌, 분신이었던 거다.
“젠장, 함정이었나?”
나를 중심으로 네 방면에 글리우곤이 생겨났다.
“이런……!”
네 마리의 거대한 글리우곤은 커다란 발을 들어 올려 우리를 밟고자 했다.
쿵-!! 쿵, 쿵-!!!
나와 수호 기사들은 글리우곤에게 밟히지 않게 몸을 내던져 피했다. 글리우곤이 땅을 내려칠 때마다 지진 난 듯 흔들리며 땅이 움푹 꺼지기도 했다.
“저희 셋으론 힘들 겁니다……! 수호 기사를 더 모아야 해요!”
그 말에 나는 글리우곤이 앞발을 휘두르는 걸 피하곤 황급히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이이익!!
그러자 다소 멀리에 있다가 소리를 들은 수호 기사들이 하나둘씩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력을 끌어모아 글리우곤 4마리의 공격을 막아내며 공격했다. 글리우곤 두 마리가 한 번에 공격하면 겨우 막아내곤 피했다. 그러다 수호 기사 한 명이 내게 소리쳤다.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고 공자님은 글리우곤 본체를 찾으십시오! 본체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나는 본체를 찾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산길을 달리며 생각했다.
‘이래서 S급이었어.’
글리우곤은 무한대로 분신을 생성할 수 있다. 분신도, 본체도 상대해야 하는 우리에게 매우 불리하다.
본체를 찾지 못하면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분신에게 마력을 더 낭비하기 전에 본체를 찾아야 한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달렸다. 곧 내 시야에 동굴이 들어왔다. 그늘져서 멀리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는 동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동굴이어서 들어가 보니 밀로가 족쇄를 찬 채로 쓰러져 있었다.
“밀로……!”
나는 화들짝 놀래며 그에게 달려갔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밀로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펜소가에서 본 분신보다 멍과 상처가 더 심했다.
“글리우곤이 이렇게 만든 거야……?”
도대체 글리우곤은 애한테 어떤 짓을 했길래 이 지경이 되었는가.
“아무 죄 없는 밀로를…….”
그때 내 뒤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인간 따위가 나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
그 목소리에 몸을 돌리니 거대한 몸집의, 그리고 지금까지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두운 기운을 내뿜는 글리우곤이 보였다.
글리우곤의 분신이 아닌 본체였다.
나는 표정을 굳히곤 동굴에서 나왔다. 혹여 미로카곤이 동굴로 들어가 밀로를 다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동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번엔 글리우곤을 보고 기죽지 않았다. 분신과 싸워 봐서 그를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복수한답시고 후작님의 아들을 납치해 저렇게 만들어 놓다니. 너처럼 비겁한 마물도 없을 거야.”
글리우곤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인간이군. 마물한테 비겁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너, 꼭 내 손으로 죽일 거야.”
밀로도 구하고, 수배금도 받을 거야.
“내게 도전장을 내밀겠다면 기꺼이 응해 주지.”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나는 이 신경전에서 져 줄 생각이 없었다.
“잘못 알고 있는데, 도전은 너 같은 거에 쓰는 말이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은 도전이 아니라 참교육이지.”
“어리석군. 황태자가 나로 인해 팔을 잃은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황태자는 당시 제3기사단에서 강하기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상대도 혼자서는 날 죽이지 못했지. 그런데 너같이 왜소한 애가 날 죽이겠다고? 그것도 여자애가.”
나는 한껏 비웃어 주었다.
“그 말 진심이야? 이제 보니까 무시는 네가 하고 있네. 그런데 어쩌지? 내가 가진 마력이 네가 무시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까 전, 글리우곤의 분신과 싸우면서 깨달았다. 현재 내가 가진 마력은 상당하다.
다들 지쳐 가는 가운데 나만 멀쩡했으니까.
원체 마력이 많은지 마력을 많이 써도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히 체력 소모가 적었다.
내 몸에서 은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못 믿겠으면 직접 겪어 보든가.”
내 말을 끝으로 손에서 파동이 흘러나와 글리우곤을 빠르게 공격했다.
파동이 닿은 자리엔 길고 가느다란 상처가 생겨 피가 흘렀다.
“어리석은 인간이군.”
글리우곤은 분신을 만들어 내 주위를 둥글게 감싸 포위했다. 하필이면 분신을 만들 때 이동하여 어떤 게 분신이고 본체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잘 가라, 인간.”
글리우곤 본체와 분신들이 하나같이 입에 마력을 모았다. 회검색 볼이 만들어지자마자 내게 던졌으나 나는 간단하게 공중을 날아 피했다.
펑, 펑― 펑펑, 펑―
회검색 볼들은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내가 공중 부양하니 글리우곤은 위쪽을 노려 공격했다. 나는 그것도 간단하게 피해 버렸다.
“스피드가 이것밖에 안 돼? 너무 느리네. 그러니까 후작님께 공격 한 번으로 급소를 맞지.”
나는 글리우곤을 일부러 도발했다. 본체를 찾기 위해서.
‘먼저 반응하는 게 본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