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7)화 (77/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7화

하인 역할을 하는 분신은 정보 입수 차원에서, 노예 역할을 하는 분신은 다른 노예들 보호 차원에서 생성했단다.

“클라라 펜소가 노예를 폭행하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걸 알기에 다른 노예들을 대신해서 맞아 왔습니다. 아까 본 게, 그 장면입니다.”

“그래서 맞고 있었구나…….”

밀로는 가여운 노예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을 자처한 것이었다. 분신이라서 고통은 못 느끼지만 폭행당하는 기억은 본체에 매순간 고스란히 전달되는데도.

“헤스티아 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까 나를 도둑이 아닌 헤스티아 님이 사주한 사람으로 착각했었잖아.”

“아직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만 헤스티아가 저를 주시할 수도 있어서요.”

밀로가 펜소가에 잠입한 이유는 펜소 백작이 헤스티아와의 약속을 어기고 노예를 바치지 않아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헤스티아를 증오하는 밀로는 백작이 사들인 노예들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백작이 노예를 사들이는 족족 노예들이 몰래 도망갈 수 있게 도운 거였다.

“헤스티아 입장에선 사람을 사주해 잠입까지 시켰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가만히 있을 리 없죠. 또 다른 감시자를 잠입시킬 겁니다.”

밀로가 허리 숙여 사과했다.

“감히 공녀님께 칼을 겨눠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괜찮아.”

나는 밀로를 이해했다. 자객일지도 모를 침입자한테 무기부터 나갈 만하지.

“그건 그렇고, 본체가 글리우곤에 잡혀 있다고 했지?”

“글리우곤이 제가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걸 눈치채곤 본체를 잡아갔습니다. 아마 르라트 산에 있을 거예요.”

“르라트 산이면…….”

제드가 입을 열었다.

“마물 출현 지역이자 글리우곤의 서식지군.”

르라트 산 앞에 르라트 해변이 있다. 그래서 내가 르라트 해변으로 기차 여행 갔을 때 밀로를 만났던 건가. 그럼 그때 만난 밀로는 분신이 아니라 본체였던 걸까?

글리우곤이 밀로를 납치했고, 쭉 함께 있었을 테니까.

잠깐, 그때 밀로는 분명…….

나는 5년 전 밀로와 만났던 일을 회상했다.

그 당시 밀로는 자신이 밀로가 아니라고 부정했었다. 그렇다는 건…….

훨씬 전부터 복수 계획을 세웠다는 거네.

밀로는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 후 복수 계획을 세운 거다. 글리우곤을 죽이고, 헤스티아까지 죽인 후 집에 돌아가는 계획.

나와 만났던 열한 살의 밀로는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밀로가 아닌 척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글리우곤에게 잡혔으니 누군가 돕지 않는 이상 복수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고.

“밀로가 르라트 산에 있다는 거지? 내가 밀로를 구하러 갈게.”

나는 용감하게 밀로를 구하러 갈 생각이었으나 제드가 말렸다.

“무슨 수로. 상대는 S급 마물이야. 그에 반해 넌 아직 마력도 없잖아.”

“우린 이제 정식 수호 기사니까 곧 마력을 받잖아. 마력을 받자마자 바로 구하러 갈 거야. 너도 같이 갈 거지?”

“…….”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듣고 밀로에게 말했다.

“밀로, 내가 곧 마력을 받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마력 받으면 1순위로 너부터 구할게.”

위험해서인지 밀로는 말리려는 듯했지만, 순찰을 돌던 기사들이 이쪽으로 오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어, 누구 온다. 나 가 볼게. 가자, 제드.”

나는 밀로를 두고 제드와 함께 담을 넘었다.

***

이틀 후, 펜소가를 몰락시킬 계획을 세웠던 이들은 나인에 모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온 디아고는 그의 응접실에 홀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답지 않게 왼 다리가 달달 떨면서.

‘내가 미쳤지.’

디아고는 메이에게 위스키를 뿌린 날, 술에서 깬 후 후회했다. 술에 취해 제드에게 미소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조롱하던 아버지의 모습과 어쩐지 겹쳐 보였고, 그에 저도 모르게 그만 못할 짓을 하고 말았다.

메이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저를 왜 그리 싫어하십니까?’

‘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합니까?’

메이를 싫어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그리고 메이가 수모를 겪을 이유도 없다.

단지 조롱거리가 된 자신이 싫었을 뿐. 엄한 메이에게 화풀이했다는 걸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아 환장할 노릇이었다.

100% 자신의 잘못이므로 메이에게 사과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사과하려니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메이 플로티나 따위가 나를 원망하든 말든 알 게 뭐야?’

어차피 걘 남자라 아버지의 반대가 심할 텐데. 심지어 걘 내가 아닌 제드를 좋아하는…….

생각할수록 자신이 사과해야 할 이유가 사라져 갔다.

‘사과? 내가 하나 봐라.’

그는 제드에게 미소하는 메이를 떠올리니 심사가 뒤틀려 유치하게 결론을 내렸다.

***

나는 제드와 함께 나인에 도착했다.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디아고의 면상을 보게 되어, 위스키를 뒤집어서 썼던 일이 생각나 화가 들끓었지만 참고자 노력했다.

밀로만 구출해 내면 디아고와 엮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나와 제드는 디아고에게 밀로 분신과 나눴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그러니 밀로를 구하러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한텐 글리우곤과 싸워서 이길 힘이 없잖아.”

“마력을 받은 후에 가야죠.”

“수호신들이 언제 마력을 부여해 줄 줄 알고?”

그건 디아고의 말이 맞았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수호신들이 밝힌 바가 없었다. 하지만 밀로를 구하는 일도 시급했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를 밀로를 생각하면. 하염없이 밀로를 기다리는 하인드를 생각하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똑똑― 하녀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황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문이 열리고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우리는 벌떡 일어섰다.

“아이리스 님, 카시우스 님?”

“어머, 다들 여기에 있었구나?”

나와 제드는 수호신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디아고의 선택을 듣기 위해서 왔단다. 시간이 되었는데도 말이 없어서.”

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디아고에게로 향했다. 디아고는 황가 사람이므로 마음대로 기사단을 골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아직까지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나 보다.

카시우스가 디아고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지 생각해 봤어, 황자?”

“…….”

디아고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 보였으나 그 고민이 무엇인지는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이내 입술이 열렸다.

“……저는 아이리스요.”

그의 선택은 의외였다. 카시우스가 정말이냐는 듯이 되물었다.

“네 형, 디온이 우리 제2기사단인 거 알고 하는 말이지?”

황태자는 제3기사단에서 글리우곤 사건을 겪고 제2기사단으로 이적했다. 그렇기에 수호신들을 비롯, 대부분의 사람들도 디아고가 제2기사단으로 가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꼭 형이랑 같은 기사단에 들어갈 필요는 없죠.”

디아고의 단호한 답변에 카시우스가 아이리스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되면 제1기사단 선출 끝난 건가? 8명 뽑을 생각이라며.”

“아카 대회에서 4명, 그 이후에 개별적으로 3명, 여기서 1명……. 그렇네. 이제 선출 끝이네.”

“아쉽네, 아쉬워. 탐내던 인재들 제1기사단에 다 뺏겼네.”

아쉬워하는 카시우스를 뒤로하고, 나는 아이리스를 만난 김에 마력 부여일이 언제인지 물어보았다.

“저, 아이리스 님, 마력 부여는 언제 진행되나요?”

“왜? 마력을 써야 할 일이라도 있어?”

내가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사이, 제드가 나서서 밀로의 납치 사건에 대한 진실과 현재 상황을 알렸다.

“확실히……. 그런 거라면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마력 부여에 관해 물었는지 알겠구나.”

스타시아 제국을 설립할 당시, 수호신들은 마물들이 멋대로 인간을 해하는 일이 없도록 마물들이 지낼 수 있는 지역을 따로 지정했다. 그곳이 바로 마물 출현 지역.

수호신들은 마물 출현 지역에 마물을 전부 몰아넣었다. 대부분의 마물은 지능이 동물 정도 되어 몰아넣기 쉬웠지만 S급 마물은 아니었다.

S급 마물은 인간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었기에 순응하지 않았다.

“우리는 S급 마물들과 합의를 봤었지. 너희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겠다. 대신, 너희도 순순히 마물 출현 지역에만 머물러라, 하고.”

적어도 마물 출현 지역에선 수호신들은 S급 마물을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자유를 억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유디프 부인과의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이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력 부여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원래는 카시우스까지 수호 기사 선출을 다 끝낸 후에 하려고 했는데, 미리 부여해도 상관없겠지? 아이리스는 찡긋 웃으며 덧붙였다.

아이리스의 은색 기운이 나와 제드, 디아고를 감쌌다.

신비한 기운이 내 몸에 깃들었다. 온몸이 무언가로 가득한 느낌. 그게 바로, 말로만 듣던 마력이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돼서 고민이 해결됐어요.”

“다행이네. 가서 그 애를 구해 오렴. 너희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힘차게 외쳤다.

“네!”

***

“우리라면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수호 기사들을 배치해 뒀으니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었나.”

다음 날. 나와 제드, 디아고가 르라트 산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호 기사들이 곳곳에서 마물 사냥을 하고 있었다. 전부 제1, 2 수호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었다.

수호 기사들을 쳐다보니 그들은 내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 도와줄 것 같아 듬직했다.

하긴, 글리우곤 상대로 우리 셋만 가는 건 위험하긴 하지.

수호 기사들을 르라트 산에 보내 주셔서 다행이었다.

제드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글리우곤은 수배금 걸려 있는 거 알아?”

“수배금?”

“황실에서 수배금을 내걸었어. 황태자 전하 일로 눈에 불을 켜고 글리우곤을 찾고 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잡지 못했지. 그 덕에 수배금이 계속 올라 지금쯤 2억 골드 정도 될 거야.”

“2억 골드라고……?”

“응. 죽이든 살리든 일단 잡기만 하면 2억 골드야.”

2억 골드…….

그 정도면 페르시스에게 날 키워 준 값을 내고도 남을 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