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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5)화 (75/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5화

“아…….”

“반응이 왜 그래? 잘 안 됐어?”

“그게…… 실은-”

나는 그간 있던 일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술에 취한 제드가 내게 어깨를 빌렸던 것, 디아고와 함께 나를 순위권에 들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 끝내 사과한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알려 주었다.

스텔라는 어느새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걘 인성이 왜 그래? 좋아하지도 않는데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해? 사촌인 2황자 때문에?”

“디아고가 황자니까 잘 따르는 것 같아. 디아고의 명을 안 따랐다가 사이 나빠지면 좋을 게 없으니까.”

내 말에 스텔라는 더욱 열불 냈다.

“그렇다고 사람 마음 갖고 장난을 쳐? 네가 자길 좋아한다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런 말로 시간을 끌었다는 거잖아. 네가 2라운드에 못 가게 만들려고.”

내가 너였다면 아무리 많이 좋아했어도 온갖 정이 다 털렸을 거야!

“사실 나도 처음보단 사랑이 식긴 했어. 그래도 여전히 좋지만…….”

스텔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전히 좋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잘생겼잖아. 어쩌면 이 세상에서 제일.”

스텔라는 속이 타는지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탁! 컵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잘 들어, 메이. 내가 너랑 제드를 응원했던 이유는 원작에서 제드가 아주 괜찮은 남자로 나왔기 때문이야. 그런데 제드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 너희 관계 응원 못 해. 이대로는 네가 제드로 인해 마음고생할 게 뻔히 보이거든.”

“그치만 나한테 잘못을 빌고 사과했는걸……?”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넌 모르잖아. 이 세상에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사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다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입만 놀리는 거야. 눈곱만큼도 미안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먼저 사과한 건 맞잖아. 네 말에 해당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기가 잘못해 놓고 사과조차 안 하는 사람도 엄청 많아.”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에 비하면 제드는 양반이지.”

“그거야 뭐……. 그렇긴 하지만…….”

달리 반박할 수 없어서 착잡한 마음으로 레모네이드를 들이켰다.

나는 스텔라의 기분이 망쳐질까 봐 얼른 주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

“뭔데?”

“밀로가 펜소가에 있대.”

“……정말로?”

나는 제드와 디아고에게 들은 밀로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밀로를 찾기로 했어.”

스텔라는 천천히 시선을 떨궜다.

“밀로가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텔라는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아빠가 밀로를 몹시 보고 싶어 해. 아빠가 밀로를 그리워할 때면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로. 그러니 꼭 찾아 줘.”

스텔라는 밀로가 집에 돌아오면 하인드의 사랑을 밀로와 나눠 가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밀로를 더 예뻐하겠지. 잃어버렸던 아들이니 얼마나 잘해 주고 싶겠어.’

어쩌면 평생 하인드에게 밀로가 1순위, 그녀가 2순위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스텔라는 밀로를 꼭 찾길 바랐다.

그만큼 그녀는 하인드가 슬퍼하는 걸 보기 힘들어하는 거였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좋으니 날 불러. 온 힘을 다해 밀로를 찾는 걸 도울게.”

“응. 네가 걱정할 일 없게 할게.”

나와 스텔라는 서로가 걱정하지 않게 미소를 보였다.

***

아카 대회 2라운드에서 팔을 다친 디아고는 귀한 약초를 사용해 닷새 만에 흉터 하나 없이 회복했다.

팔의 붕대를 푼 디아고는 다친 부위를 확인했다.

“좋은 약초를 썼나 보군. 새살 돋은 자국도 없어.”

“황자님껜 당연히 좋은 약초를 써야죠.”

“그렇겠지. 흉터가 크게 남으면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주치의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럼 소,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주치의가 복도로 나간 후, 디아고는 그의 침실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는 낮잠을 자기 위해 창가에 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의 살에 닿는 햇볕이 따스했다.

눈을 감으니 슬슬 잠이 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물 앞에서 주저앉으면 어떡합니까?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메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동시에 그날 있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자신이 다치자마자 메이가 달려와서 해골귀신을 쓰러트린 일. 그리고 옷을 벗으라 한 후 지혈해 준 일.

두근두근. 어째서인지 그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멋대로 뛰었다.

디아고는 미간을 구기며 눈을 떴다.

“갑자기 심장은 왜 뛰는 거야.”

진짜로 메이 플로티나를 좋아하기라도 해?

“젠장…….”

이젠 부정하지도 않는다. 부정할수록 자신의 행동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으니까.

디아고는 다시 눈을 감았으나 이번엔 천막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포대를 가져가려다가 얼떨결에 숨어, 그만 메이가 상의를 벗는 모습을 보고 말았던.

다시 떠올린 메이의 뒤태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꽁꽁 두른 붕대 밑으로 가냘픈 허리선이…….

“아이씨!”

또 잠들기에 실패한 디아고의 입에서 욕이 나오려다가 말았다.

“쓸데없는 일 생각하지 말고 잠 좀 자자고.”

스스로 꾸짖은 후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잠들 수 없는 운명인지 시종의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황자님, 폐하께서 함께 식사하고자 하십니다.”

디아고는 눈을 뜨자마자 등에 배고 있던 쿠션을 냅다 문 쪽으로 던졌다.

쾅―! 쿠션을 맞은 문이 큰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문 뒤에 서 있던 시종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엄한 곳에 화풀이였다.

황제의 호출에 식당으로 간 디아고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자는 걸 방해받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는 원체 아버지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디아고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황제는 식탁 상석에 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어서 앉거라.”

디아고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착석했다. 황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슬슬 약혼자를 정해야지, 디아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지라 놀랍지도 않았다.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황제는 버럭 그를 야단쳤다.

“허구한 날 여자나 만나러 다녔으면서 결혼할 생각이 없다니. 그걸 말이라고 해?”

“언제 적 얘기를 하십니까, 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여자라면 아무도 안 만난다는 거 모르십니까?”

“그래, 디아고. 말 나온 김에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꾸나.”

황제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디아고에게 눈길을 줬다. 마치 불결한 것을 보는 것처럼.

“너 설마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

아니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순간 메이가 떠올라서.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황제는 대답 없는 디아고를 향해 혀를 찼다.

“쯧쯧, 남자를 제 침실로 들였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었거늘.”

“아버지……!”

디아고는 식탁을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들을 조롱하면 기분 좋으십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네 문란함 때문에 더럽혀진 황실의 품위를 생각해 보렴. 너야말로 이 무슨 무례한 짓인지 모르겠구나.”

디아고는 화나고 원망스러워서 모든 걸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아버지 앞이니 주먹만 세게 쥐었다.

“결혼은 하더라도 제가 하고 싶을 때 할 겁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조롱한다 한들 제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을 겁니다.”

“쯧, 철딱서니 없는 것. 애비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리고 남자…….”

디아고는 이 순간에도 흰 피부에 백금발을 가진 소년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남자 안 좋아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네가 남색을 즐겨 또 한 번 황실의 품위를 더럽히는 일은 없었으면 하구나.”

디아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방에 돌아온 그는 주체할 수 없이 격노했다.

와당탕―! 책상 위의 물건들을 쓸어버리고, 쨍그랑―! 화분까지 깨부수고서도 그의 화는 식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메이 플로티나가 떠오른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할 뿐이었다.

***

주말이 돌아와 나인에 모이는 날이 되었다.

마차에서 내리니 뒤이어 블로체가 마차가 도착했다. 제드도 지금 도착했나 보다.

마차에서 내린 그는 내게 다정하게 미소하며 다가왔다.

나는 나제트가에서 스텔라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잘 들어, 메이. 제드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 너희 관계 응원 못 해.’

‘그치만 나한테 잘못을 빌고 사과했는걸……?’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넌 모르잖아.’

스텔라의 말이 맞다. 제드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제드를 좋아한다. 그런 일을 겪고도 좋아하니까 한 번쯤은 그를 용서하고 믿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 마음고생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내가 선택한 길인걸.

안일한 생각은 내가 감정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옳고 그름을 알면서도 잘못 판단하게 만들었다.

“들어가자.”

제드가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자 나는 기꺼이 잡았다.

나는 제드와 함께 나인에 들어갔다. 메인룸엔 디아고와 갈리, 비르타가 있었다.

디아고는 손으로 반쯤 떨군 얼굴을 짚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본 듯한 갈리와 비르타는 나를 아니꼽게 쳐다봤다. 그들은 내가 정식 수호 기사가 된 걸 알고 있었기에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수호 기사가 된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나는 그들이 날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제드 바로 옆이었다. 난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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