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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2)화 (72/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2화

밤이 올 때까지 쉬지 않고 각종 보드게임을 한 나인 회원들은 취침 시간이 되어 각자 침실로 들어갔다.

나는 옷을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혼잣말했다.

“황녀님이 게임을 잘하시네.”

아까 살벌한 분위기가 흘렀음에도 우리는 끝까지 다 함께 보드게임을 했다.

나는 평소대로 실력을 뽐냈다. 제드와 디아고는 자꾸만 나를 보며 정신을 파는 둥 게임에 집중을 못 했고, 클로빈은 그냥 게임을 못한다.

‘황녀님이 거의 다 1등 하셨지.’

잠옷 단추까지 완벽히 채운 내가 침대에 누울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이사벨라가 서 있었다. 아직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은 이사벨라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잘 자요, 공자님. 꿈속에서 만나요!”

꿈속에서 만나자니. 귀여워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래요, 황녀님.”

“꿈속에서 만나서 결혼은 어디서 할지 정해요!”

나는 어색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라는 오늘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청혼했다. 청혼을 넘어서 결혼은 언제 할지, 어디서 할지, 무슨 드레스를 입을지, 결혼반지는 무엇으로 할지…….

요즘 광산에서 핑크 다이아몬드가 나오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청혼에 진심이 느껴져서 혹시나 나중에 내가 여자란 걸 알게 된 후 크게 실망하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차라리 지금 밝히는 게 낫겠지?’

정신계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내 진짜 성별을 밝히려면 방법은 두 가지다.

내가 직접 여자라고 알려 주거나 여자일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보여 주면 된다.

나는 몸을 낮추었다.

“잠깐 귀 좀 대 보시겠습니까?”

이사벨라가 내게 귀를 가져다 대자 그녀가 귀여워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은요, 저는…….”

이사벨라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귀여워서 심장이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그런 이사벨라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 주려니 떨렸지만 그래도 진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그러자 이사벨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에에? 정말요?”

“네.”

여자라는 걸 알고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진짜 나니까. 괜한 기대감과 보답해 주지 못할 설렘만 안겨 주는 건 못할 짓이니까.

하지만 걱정과 달리 이사벨라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내게 손짓했다.

“공자님도 귀 대 보세요.”

“……?”

이사벨라가 내게 귓속말했다.

“결혼 못 하는 건 아쉽지만 전 공자님이 여자여도 좋아요.”

쪽―! 그 말을 끝으로 이사벨라는 내게 볼 뽀뽀를 했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자 나도 따라 웃었다.

“고마워요.”

“잘 자요, 공자님!”

“황녀님도요.”

이사벨라는 뽀뽀한 게 부끄러웠는지 무서운 속도로 복도를 냅다 달렸다. 이사벨라가 작은 보폭으로 달려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져 내가 방문을 닫을 때였다.

방에서 나온 제드가 나를 불렀다.

“메이.”

눈이 마주쳤지만 딱히 제드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무시하고 방문을 닫았다.

침대로 향할 때쯤 문밖에서 다시 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나는 제드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나인에서 맞는 밤바람은 시원하기보단 서늘했다.

우리는 마당에 있는 목제 벤치에 앉았다. 우리 둘 사이엔 사람 한 명 더 앉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할 얘기가 뭐야?”

내가 물으니 제드는 시선을 떨구며 입술을 뗐다.

“……미안해.”

“뭐가?”

“네 마음을 상하게 했던 거, 전부 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제드가 무슨 말을 하든 그러려니 하기로 다짐했으니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은 디아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도 다른 회원들처럼 네가 그다지 달갑지 않기도 했어.”

역시나. 제드도 마찬가지였구나.

수호 기사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수호신의 총애를 받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로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은 아닌지 서운했다.

“이에 대해 사과할게. 미안해, 메이.”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걸 보니 정말로 미안해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도 내 존재가 달갑지 않아?”

제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너와 만나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좋아.”

분명 제드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설레는 건 왜일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걸 보니 또 지독한 짝사랑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이젠 안 그럴 거지? 디아고가 나를 괴롭히라고 명령하더라도.”

“당연하지.”

그제야 제드가 나와 눈을 맞췄다. 근처 가로등 조명에 비친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홀릴 듯 눈부셨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까.

원작을 모르고 빙의했어도 제드가 남주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 같다. 완성형 외모를 가진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까.

내가 잠깐 그의 미모에 넋을 놓으니 제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다행이다.”

“뭐가?”

“네가 날 아직도 좋아해서.”

“뭐, 뭐래?”

나는 당황하여 뒤로 몸을 물렸다. 얘는 뭔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한담?

“진실을 보는 눈.”

“…….”

그놈의 진실의 보는 눈은 사용하지 못하게 막을 순 없나. 이러다 내 생각까지 읽힐 것 같았다.

“너랑 거리를 두려는 감정은 안 보이디?”

내가 짓궂게 말하니 제드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떨어지지 말자. 내가 곁에서 잘해 줄게.”

몸이 너무 가까워서인지 심박수가 제멋대로 빨라졌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한동안은 못 떨어져. 같이 밀로를 찾아야 하잖아.”

밀로. 원작에서 하인드는 완결되고 나서도 제 아들을 찾지 못했다. 원작을 읽는 내내 그것도 내심 걸렸었는데.

‘현실에선 부자 상봉하게 해 주자.’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만 자러 가자. 내일 2라운드가 있잖아.”

제드는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지 안도하며 따라서 일어났다.

“응.”

***

다음 날, 나인 회원들은 아침 일찍부터 마차에 올랐다. 대회 2라운드를 치르기 위한 목적지는 아카 센터였다.

디아고와 제드, 메이는 다 같이 한 마차에 탔다. 메이 옆에는 제드, 앞에는 디아고가 앉았다.

마차가 달리던 중, 디아고는 크게 하품했다.

“하아암-”

다른 회원들과 달리 디아고는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이를 본 제드가 물었다.

“어제 못 주무셨습니까.”

“어…….”

디아고는 밤새 잠도 안 자고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기 바빴다.

‘내가 사내새끼를 좋아할 리 없어.’

동이 트고 날이 밝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디아고는 원론적으로 분석했다.

‘애초에 남자한테는 몸이 반응을 안 한다고.’

그런 내가 메이 플로티나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돼?

디아고가 인상을 쓰며 메이를 쏘아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풀리며 움찔 놀랐다.

‘깜짝이야…….’

갑자기 쳐다봐서 놀랐네.

디아고는 혼자 놀란 게 머쓱해져선 얼른 턱을 괴며 바깥을 감상했다.

메이는 디아고가 뭘 하든, 어떤 표정을 짓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도 조만간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제드만이 끝까지 디아고를 주시했다.

아카 센터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린 후, 제드는 메이를 먼저 보냈다. 둘만 남았을 때, 그는 디아고에게 말을 걸었다.

“안 좋아한다며.”

“안 좋아해.”

제드 눈엔 뻔히 보이는 것을, 디아고는 아직도 부정 중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메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양보할 생각은 없어.”

디아고는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듯이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듣다 보니 웃긴 내용이었다.

“네가 양보고 뭐고 할 자격이 있나?”

너도 나와 같은 도둑 용의자잖아.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친구라지만 신분에 맞는 대우를 해 줬으면 좋겠군.”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을 텐데, 갑작스럽게 신분을 걸고넘어지는 디아고였다. 제드는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딱히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신분에 맞게 디아고를 존대했다.

“……어제 메이에게 전부 사과했습니다.”

“뭘?”

“저 또한 처음부터 메이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를 괴롭히는 것에 제 의지로 동참했다는 걸요. 그랬더니 용서하더라고요.”

심지어는 아직도 저를 좋아해 줍니다.

“…….”

자신에겐 쌀쌀맞게 굴면서 제드에겐 쉽게 용서해 준 거로도 모자라 계속 좋아해 준다니.

짜증이 올라왔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내 알 바인가?”

말과 달리 디아고는 짜증이 묻은 걸음걸이로 아카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

아카 대회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되자 사회자가 중앙 기둥 탑에 등장했다. 그가 룰을 설명했다.

“제4회 아카대회 2라운드는 C급 마물 해골귀신의 구슬을 먼저 가져온 순서대로 3위까지 선발합니다.”

1라운드와 동일하게 게이트 너머 마물 출현 지역에서 해골귀신을 무찔러 구슬을 가져오면 된다.

“제한 시간은 1시간. 그 전에 3위까지 나온다면 바로 2라운드 종료합니다.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해 제한 시간 내에 3위까지 나오지 않더라도 1시간이 지나면 종료하겠습니다.”

간혹 일반인도 무찌를 수 있는 D급 마물과 달리 C급 마물은 일반인이라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도 쓰러트리기 어렵다.

주위를 둘러보니 참가자들 대부분이 긴장한 눈치였다. 한 단계 차이지만 D와 C의 차이가 크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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