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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0)화 (70/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0화

사촌지간이자 친구 사이인 제드와 디아고는 어렸을 때만큼은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의 이름을 불렀었다.

커 가면서 제드는 신분에 맞는 호칭을 쓰게 되었으나 지금은 친구로서 디아고와 말하고 싶었다.

“메이 때문이야?”

“돌았어?”

황당한지 디아고의 짙은 눈썹이 비뚤게 올라갔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보는 네 감정이 그래.”

“네가 1등인 게 나도 모르게 질투가 나나 보지.”

“순위에 연연하지 않잖아.”

“막상 순위 불리니까 너보다 뒤처지는 게 싫었나 보지.”

제드가 그의 어깨에 기댄 메이를 흘끗했다. 메이는 입을 작게 벌린 채 꿈나라를 여행 중이었다.

“메이 때문은 아닌 거지?”

“아니라니까? 남자 안 좋아한다고.”

디아고가 정색하자 제드도 더는 묻지 않았다.

제드는 앞으로 삐져나온 메이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머리칼에 그늘졌던 예쁘장한 이목구비에 햇살이 들어섰다.

“메이는 나를 좋아해. 나도 메이가 날 좋아하는 게 좋고.”

“돌았어?”

“그러니까 네가 나중에 메이를 좋아해도 양보할 생각 없어.”

말이 통하지 않자 디아고는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됐다, 난 간다. 깨우든지, 말든지, 거기서 살든지.”

디아고는 제드와 메이를 두고 떠났다.

***

내가 눈을 떴을 땐 해가 저물어 가는 오후였다.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라? 난 순위를 듣자마자 잠들지 않았나? 누가 날 집으로 데려다준 거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30위 안에 들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기껏 모은 구슬을 몽땅 잃어버렸을 땐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는데.

포기하지 않길 잘했어.

그러다 나는 새벽에 디아고와 나눈 대화를 회상했다.

‘천막에 들어왔던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부정하실 겁니까?’

‘그래, 네 천막에 들어가긴 했었어. 네 포대를 버리려고.’

‘역시……!’

‘그런데 버리진 않았어. 제드한테 물어봐. 제드와 함께 한 계획이어서 끝내 안 가져갔다는 걸 걔도 알 테니까.’

‘제드도…… 제 포대를 버리려고 했다고요……?’

‘아까 8시에 제드가 널 불러냈지?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버리려고 시간 끌게 한 거야.’

원할 때마다 자기 감정을 들려주겠다느니, 내가 여자라서 다행이라느니, 나를 어느 정도 좋아하고 있다는 말까지.

설레게 했던 달콤한 말들은 전부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구슬을 훔치기 위해 시간을 버는 용도였을 뿐.

나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심하다, 메이야.”

그런 줄도 모르고 설렌 내가 너무 한심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젠 제드의 말에 의미를 두지 말아야지.”

뭐라 말하든 그냥 그런가 보다, 해야지.

“어차피 나중엔…….”

신분 차이 때문에 어울리지도 못해.

달칵, 내 방문이 열리고 엘렌과 조안이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안은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아카 대회 1라운드 통과 축하드려요!”

“후, 부세요.”

엘렌의 말에 나는 케이크 촛불을 불어 껐다.

“고마워, 엘렌, 조안. 그런데 누가 날 집으로 데려온 거야? 아카센터에서 잠든 후로 깬 기억이 없는데…….”

“블로체 공자님께서 모시고 오셨어요. 피곤하셨는지 깊게 잠들어 계시더라고요.”

“아…… 제드였구나…….”

제드에게 실망한 지금, 그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꿀꿀한 기분을 떨쳐 내고자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모카케이크네? 웬일이야? 커피 맛 쿠키에서 한 단계 발전했어.”

엘렌과 조안은 커피에 든 카페인이 성장에 방해된다며 내가 열다섯 살이 되어서도 커피를 마시는 걸 금지했다.

종종 커피 맛 쿠키는 먹긴 했으나 그 외의 커피 맛이 나는 건 먹을 수 없었다.

초콜릿은 먹게 하면서 커피는 안 된다니. 이미 초콜릿으로 카페인 대량 섭취했겠다!

“축하의 의미로 드리는 모카케이크예요. 아직 어리셔서 커피 드시면 안 되는데 도련님은 커피 맛을 좋아하시니까 모카케이크를 만들어 봤어요.”

아직 어리다니. 성년까지 두 달도 남지 않은 나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마워. 엘렌이랑 조안도 같이 먹자.”

나는 침대 밖으로 내려갔고, 조안은 내심 먹고 싶었는지 방긋 웃었다.

“좋아요!”

***

페르시스는 요 며칠 메이와 제대로 얘기를 해 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메이가 아카대회 때문에 바빴던 탓도 있고, 집에 돌아온 메이의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이기도 해서 오래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초조해진 페르시스는 메이의 2라운드 진출을 축하해 준다는 걸 핑계로 그녀를 찾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방에 있던 메이가 문을 열었다. 평소 같았으면 엘렌이 열었겠으나 엘렌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메이는 페르시스를 보자마자 놀라서 눈이 커다래졌다. 그가 직접 찾아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왜…….”

“전에 받은 생일 선물에 대해 보답하려고 왔다.”

페르시스는 메이에게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메이는 떨떠름하게 선물을 받았다.

“5년 된 손수건을 계속 쓴다길래 나도 새 손수건을 준비해 봤다.”

상자를 열어 보니 은색 실크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감사해요.”

좋아서 하는 감사가 아닌, 예의상의 감사인 걸 알아서 페르시스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혹시 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그게 무엇이든 전부 사 줄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갖고 싶은 거 없어요.”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건지 메이는 인사 후 방문을 닫으려고 했다. 페르시스는 메이가 방문을 닫기 전 손잡이를 붙잡았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분명 둘 사이의 문은 열려 있는데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쌓여 있는 것마냥 가까워질 수가 없다.

그 사실에 페르시스는 가슴이 아팠으나 내색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아카대회 1차 통과한 거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메이는 선물을 받아도, 축하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곧 방문이 닫혔고, 페르시스는 미련이 발을 잡아 쉽사리 돌아가지 못했다.

***

아카 대회 2라운드는 1주일 뒤에 치러졌다. 1라운드를 통과 못 한 갈리와 비르타를 제외한 나인 회원들은 대회 전날 나인에서 묵고 다 같이 가기로 했다.

먼저 온 회원들은 메인룸에 있었다. 그중, 이사벨라도 있었다.

이사벨라는 메이를 다시 만날 날을 고대했다. 잘 보이기 위해 한껏 꾸미기까지 했다.

이사벨라가 옆에 앉은 디아고의 팔을 흔들었다.

“오빠, 공자님은 언제 와?”

“나도 몰라.”

“오빠가 회장인데 모르면 어떡해?”

“오늘 중으로 오겠지.”

불만족스러운 답변에 이사벨라는 양 볼을 부풀렸다.

“나빴어.”

하지만 디아고는 제가 아끼는 동생의 말에도 신경 써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디아고는 제드의 말 때문에 1주일간 심란했다.

메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 말.

아침 세안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검무 연습을 할 때도, 잠이 들기 직전에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매순간 계속해서 떠올라 짜증이 돋았다.

‘내가 메이를 좋아한다고?’

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치자.

‘그런데 왜 하필 저 볼품없는 메이 플로티나인데?’

디아고는 때마침 메인룸에 들어선 메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디아고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내가 쟤를 왜 좋아해.’

***

나인 회원들 대부분이 모여 있는 메인룸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나를 째려보는 디아고를 마주했다. 반면, 이사벨라는 나를 보자마자 함빡 웃으며 달려왔다.

“꺄항-! 공자님!”

이사벨라는 달려오다가 그만 발이 꼬이고 말았다.

“황녀님……!”

이사벨라가 넘어지기 전, 재빨리 무릎 꿇고 받아 주었다. 덕분에 이사벨라의 녹안과 비슷한 눈높이가 되었다. 나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괜찮으신가요?”

이사벨라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볼이 발그레했다.

나는 이사벨라를 일으켜 줬다.

“넘어지면 아프잖아요. 다음부턴 뛰지 마세요.”

이사벨라는 나를 보며 눈만 껌뻑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그녀는 내가 막을 틈도 없이 품에 파고들어 껴안았다.

“공자님 좋아! 공자님이랑 결혼할래!”

“!”

충격 선언에 제드와 클로빈은 디아고의 눈치를 봤다. 나 역시도 디아고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감히 이사벨라의 청혼을 받은 사내를 죽이려 들었겠으나.

“…….”

어쩐지 디아고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나를 응시할 뿐.

‘어서 떨어지라는 무언의 협박인가?’

그렇다기엔 살기가 보이지 않았다. 딴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

그러다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 디아고가 버럭 화냈다.

“너희, 안 떨어져?”

이사벨라는 내 품에서 벗어나 디아고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메~롱. 난 공자님이랑 결혼할 거지롱.”

“뭐어?”

디아고는 그게 뭔 헛소리냐는 듯 이맛살을 구겼지만 이사벨라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하필이면, 클로빈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클로빈…….’

잠결에 귓속으로 들어온 제드와 디아고의 대화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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