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68화
제드는 허둥지둥 도망가는 메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 식사 시간에 메이가 클로빈을 상대하는 사이, 제드는 디아고와 눈빛이 오갔었다.
그들도 클로빈처럼 그녀의 구슬을 훔쳐다 버리는 게 목표였다.
한데 비르타, 갈리, 클로빈이 번번이 실패한 그 상황에서 그녀의 포대에 손을 대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식사 후 메이는 모르게 제드에게 명령했었다.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1시간 동안 메이가 구슬이 아닌 다른 것에 한눈팔게 할라고.
그 1시간 동안 자신이 메이의 구슬을 몽땅 버리고 오겠다며 말이다.
‘메이가 과연 구슬 포대가 아닌 다른 거에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너라면 할 수 있어. 메이가 너를 잘 따르니까. 아까는 내가 아닌 너더러 멋있다고 했었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디아고와 약속했던 9시가 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그대로 메이를 보내 주었다.
구슬 포대가 걱정된다는 핑계를 대니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귀찮기도 했고.’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점점 빠져드는 척하는 거, 여간 귀찮고 소름 돋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메이는 언젠가 자신을 포기할 것이다. 스스로 그가 자기한테 반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물론 메이의 생각이 맞다.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이미 메이의 존재를 알아 버렸고, 그녀보다 더 높은 위치와 명예를 가질 여자는 없다는 걸 알아 버렸기에, 그녀 이외의 사람과 결혼하는 건 별다른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주 운 좋게도 메이가 내게 반했다는데,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남장을 끝내면 자신에게 청혼하게 만들 것이다.
그녀와 결혼하여 더욱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한편, 디아고는 메이의 구슬을 몽땅 버리기 위해 메이가 없는 틈을 타 그녀의 천막에 들어갔다.
천막 안엔 포대 두 개와 여름용 침낭, 간이램프가 전부였다. 간이램프의 누런빛이 천막 안을 은은하게 밝혔다.
‘지금쯤이면 제드랑 같이 있겠지.’
디아고는 여유롭게 포대 하나를 들었다. 두 개 다 한 번에 들긴 무거우니 하나씩 버릴 셈이었다.
디아고는 포대 하나를 들고 천막 밖으로 나가려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메이를 보고 재빨리 유턴했다.
‘뭐지……? 내가 잘못 봤나?’
아직 8시 15분밖에 안 됐는데 쟤가 왜 여기 있어?
‘잘못 봤나?’
디아고는 포대를 내려놓고 천막 입구를 살짝 열어보았다.
제길! 메이가 코앞에 있는 게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이라도 받은 것마냥 어딘가 몹시 부끄러워하며!
“이런……!”
디아고는 들키지 않기 위해 뒤쪽 바닥과 천막 틈을 벌려 그 틈으로 빠져나왔다.
덕분에 천막이 크게 흔들렸지만 메이는 부끄러워하는 중이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젠장…….’
하필 천막 뒤는 벽처럼 깎은 듯한 가파른 산이었는데, 산과 천막 사이가 매우 좁아 몸을 욱여넣기에는 자리가 충분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양옆이 큰 바위로 막혀 있어서 빠져나오려면 다시 천막을 통과해야 했다.
이 와중에 디아고는 좁아서 불편한 것보다 자신의 체면이 무너지는 게 더 짜증이 났다.
‘제국의 황자가 맨땅에 누워 있는 꼴이라니……. 치욕스럽군.’
그는 메이가 천막 밖으로 나가거나 잠이라도 자길 바랐다.
메이의 상태를 살피려 천막을 살짝 들춰 수시로 확인하던 중.
메이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잘 때는 조금 느슨하게 해야지……. 답답해.”
뭘 느슨하게 한다는 건가. 슬쩍 살피니 메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입고 있던 오트밀 색 반소매 셔츠를 벗던 메이는 가슴을 두른 흰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붕대? 웬 붕대지?’
몸에 흉터라도 있나?
저번에 욕실에서 같이 있던 걸 질색하던 이유가 이거였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얜 도대체 언제 자?’
돌멩이가 잔뜩 깔린 땅에 계속 누워 있으려니 아프기까지 했다.
그렇게 천막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기를 몇 번. 드디어 메이는 옷을 다시 입고 침낭에 들어가 잠들었다.
디아고는 메이가 잠든 사이 천막 안으로 들어와, 무사히 밖으로 탈출했다.
“이게 뭔 고생인지…….”
그는 옷을 털면서 걷다가 그 근처에 있던 제드와 마주쳤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천막에 안 계시길래 혹시나 해서 와 봤습니다만…… 들어가서 무얼 하셨습니까?”
제드는 디아고가 메이의 천막에서 나온 걸 똑똑히 봤다. 포대를 훔치려고 들어갔다기에는 훨씬 늦은 시각. 이 늦은 시간에 그가 메이의 천막에서 나왔다는 것에 불쾌감이 들었다.
“너…… 내가 9시까지 시간 벌라고 했잖아.”
“포대가 걱정된다길래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황자님께서 왜 지금 천막에서 나오십니까? 그것도 빈손으로.”
“아, 맞다. 나올 때 포대 가지고 나올걸.”
빨리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에 포대도 잊어버렸다.
“포대도 안 훔칠 거면 천막엔 왜 들어가신 겁니까?”
“훔치려다가 메이가 와서 숨었어. 잠들 때까지 기다린 후 나온 거야. 거기서…….”
디아고는 붕대 얘기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다.”
자신이 다른 사내자식 몸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상하니까.
디아고는 자신의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제가 가져올까요? 자고 있다면 가져가도 모를 텐데요.”
“……됐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들어가기엔 자신이 봐선 안 될 걸 봐 버린 기분이었다.
***
새벽 1시.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천막 안에서 눈을 붙이는 시각. 나는 부스럭부스럭 소리에 잠을 깼다.
무슨 소리지…….
잠이 덜 깨서 눈을 떴다, 감았다를 30초간 반복하고서야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 앉아서도 멍하니 있는 바람에 3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 후에야 천막 안을 둘러본 나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램프 빛에 의지해 한참을 천막 안을 둘러보던 나는 그제야 구슬 포대가 전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천막 입구도 반쯤 열려 있었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곧장 밖으로 튀어나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둑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젠장, 망했어……!”
내가 자는 사이 천막에 들어와 포대를 훔쳐 갈 생각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무도 못 가져가게 포대를 끌어안고 자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하기엔 대회 종료 시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오전 1시면, 종료 시각인 10시까지 9시간.
2라운드에 진출하려면 남들이 24시간 동안 모은 구슬보다 내가 9시간 동안 모은 구슬이 더 많아야 한다.
나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서 검을 가지러 다시 천막 안에 들어갔다.
침낭 옆에 뒀던 검을 잡으려는 그때.
반짝반짝. 땅에 떨어져 있던 금빛 단추가 보였다.
“이건…….”
금빛 단추를 들고선 간이램프 쪽으로 가, 모양을 확인했다.
“이건 디아고의 단추잖아…….”
디아고가 입고 있던 상의 소매에 달려 있던 단추가 확실하다.
나는 단추를 꽉 쥐었다. 주먹엔 분노가 깃들었다.
“디아고가…… 가져갔구나.”
***
그 시각, 클로빈은 구슬 포대 두 개를 힘겹게 옮기고 있었다.
메이의 구슬 포대를 훔친 범인은 클로빈이었다.
‘내가 메이 플로티나보다 순위가 높지 않으면 절대로 나제트 영애의 눈에 띌 수 없어.’
1라운드도, 2라운드도 자신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 이왕이면, 메이 플로티나를 1라운드에서부터 탈락시키는 게 제일 좋다.
클로빈은 급식소 음식물쓰레기통 앞에 당도했다. 주위에 누가 있나 살핀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쓰레기통에 포대에 든 구슬을 전부 쏟아부었다.
포대 하나는 남겨 두었다.
‘이건 내 거인 척해야지.’
클로빈은 하나 남은 포대를 들고선 그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
난 곧장 디아고의 천막으로 갔다. 그리고 천막 옆에 붙어 있는 설렁줄을 거칠게 흔들었다. 타인의 천막에 들어갈 땐 꼭 설렁줄을 흔들어야 했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종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자 디아고는 인상을 쓰며 잠에서 깼다.
“뭐야……?”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들어오라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당돌하게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디아고는 상체를 일으키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얘가 미쳤나?’ 하는 눈빛이었다.
“너 뭐야……? 뭔데 들어와.”
나는 천막 안을 훑어보았다. 디아고 발밑에 있는 구슬 포대 두 개.
포대 하나의 양이 다른 걸 보니 내 것은 아니었다.
나는 화를 억누르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먹 쥐며 말했다.
“어떻게 제 구슬을 전부 버릴 수 있습니까?”
“뭐……? 갑자기 뭔 소리야.”
나는 디아고에게 가까이 다가가 단추를 보여 줬다.
“포대가 전부 사라졌습니다. 제 천막엔 황자님의 단추가 떨어져 있었고요. 이래도 아닌 척하실 겁니까?”
그의 표정을 보니 역시 단추는 그의 단추가 맞았다.
“아…… 이건 그때 떨어졌나.”
나는 땀 뻘뻘 흘리며 모은 구슬이 송두리째 없어졌다는 사실에 울컥해서 디아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내놓으란 말입니다. 내놓으시라고요……!”
“너 미쳤어? 감히 누구 멱살을 잡아. 안 놔?”
옥신각신하다가 그만 내가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내 손을 떼어 내려던 디아고도 중심을 잃고 옆으로 고꾸라졌다.
얼떨결에 디아고가 나를 덮친 것만 같은 자세가 되었다.
그의 눈은 놀라서 커졌고, 나는 나도 모르게 자그마한 눈물을 흘렸다.
“저 정말 열심히 모았단 말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수호 기사가 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