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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65)화 (65/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65화

그날 나는 일찍 잘 준비를 마쳤다. 9시 반밖에 되지 않았으니 나름 일찍 자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새벽 3시에도 자고 그랬었는데. 웹소설을 읽다가 밤을 꼴딱 새운 적도 있었지.’

메이로 살게 된 이후엔 체력 관리 잘 하라는 페르시스 명령 때문에 늦어도 11시엔 침대에 누웠다.

오늘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네. 밀로에 대한 사실도 알게 되었고.

금세 피곤해진 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플로티나가 내 방에 있는 푹신한 침대와는 달리 딱딱한 편이었다.

이 침대는 푹신함이 덜하네. 푹신한 게 좋은데.

하지만 평소와 잠자리가 달라졌다고 해서 잠을 못 자진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잠을 못 자도 어쩔 수 없다. 이 모든 건 내 선택이었으니까. 선택엔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여름용 얇은 이불을 덮을 무렵이었다. 침대 옆에 인기척이 들리더니 백발의 사내가 나타났다.

페르시스 대신 플로아가 찾아온 것이다.

그의 등장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귀, 귀신인 줄 알았잖아요, 플로아……. 여긴 왜 왔어요?”

나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고, 플로아는 내가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집에 안 돌아와서 찾아온 거예요?”

“네. 걱정되어 찾아왔습니다만…….”

그는 이불을 반쯤 덮은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구슬픈 눈빛을 보냈다.

“말 한 마디 없이 외박하실 생각이었습니까?”

“나인 회원들은 묵고 갈 수 있다고 해서요.”

플로아는 청승맞은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손은 차가웠다.

“외박…… 안 하시면 안 됩니까?”

“왜요?”

“제가 있는 플로티나에서 주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인 회원이 되었으니 한 번쯤은 외박하고 싶어요.”

그러자 플로아가 물었다.

“드레스 때문입니까?”

드레스? 웬 드레스? 눈만 껌뻑거리다가 그 드레스가 무얼 뜻하는지 알아챘다.

“아…… 드레스요.”

패션 거리에서 본 드레스. 플로아의 귀에도 들어간 건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땐 그냥 예뻐서 본 거였어요. 갖고 싶었던 건 아녜요.”

“페르시스 님께 갖고 싶다고 말하면 사 주실 겁니다. 아들로 사는 것도 그만두라 하셨다면서요.”

“…….”

그냥 처음부터 아들로 살아간다는 선택지 없이 원작 스텔라처럼 사랑받는 입양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괜히 우울해졌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싶어요.”

“메이 님…….”

“그리하게 해 줘요. 아빠가 저를 찾으면 나인에서 외박한다고 알려 주시고요. 부탁할게요.”

플로아는 끝내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

다음 날 아침, 나와 제드, 디아고는 나인에 남고, 나머지는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제드와 디아고와는 펜소가에 관해 앞으로의 일을 잠깐 얘기하려는 것이었다.

“토요일에 아카센터에서 뵙겠습니다, 황자님.”

갈리, 비르타, 클로빈이 떠나고 이사벨라도 황궁으로 돌아갈 차례가 되었다. 이사벨라는 발을 동동 구르며 가지 않으려고 떼썼다.

“공자님과 같이 있을 거야아아아-!! 어제 많이 못 놀았단 말이야.”

“안 돼. 집에 돌아 가.”

“싫어싫어!!”

“이사벨, 너 자꾸 떼쓸 거야?”

이사벨라는 허리께에 손을 얹고선 씩씩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몰래 웃었다.

“오빠 미워. 첫사랑이 생겼는데 어떻게 떼어 놓으려고 할 수 있어!!”

“뭐? 첫사랑?”

소중한 동생에게 첫사랑이 생겼다니. 디아고는 뒷목을 잡았다.

보다 못한 나는 웃음을 지우고 이사벨라에게 다가갔다.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아선 눈높이를 맞췄다.

이런, 반짝이는 눈빛!

아이들 특유의 순진무구하게 반짝거리는 눈빛을 이사벨라가 내게 쐈다. 자칫 그녀의 눈빛에 마음이 홀라당 넘어갈 뻔했지만 간신히 견뎠다.

“오늘은 황자님 말씀 듣고 다음에 또 놀아요.”

“하지만…….”

떨어지기 싫은 마음이 큰지 쉽사리 알겠다고 하지 못했다.

나는 이사벨라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앞으로도 쭉 볼 수 있잖아요.”

이사벨라는 손을 내려다보곤 수줍게 볼을 붉혔다.

“약속.”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어 다음에 또 놀기로 약속했다. 부드럽게 미소를 보이자 이사벨라도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요, 꺄항-”

이사벨라는 활짝 웃으며 나를 확 끌어안았다. 이를 본 디아고가 역정을 냈다.

“야!!!”

이사벨라까지 집으로 돌려보낸 후. 나와 제드, 디아고는 2층 응접실에서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고민 없이 아주 빠르게 세워졌다.

“일단 이번 주는 밀로를 찾는 것보단 아카 대회에 집중하도록 하지. 대회가 당장 며칠 후니까.”

“좋습니다. 대회가 끝난 후에 본격적으로 밀로를 찾고, 펜소가를 몰락시키도록 하죠.”

“그래.”

디아고와 제드의 말을 듣던 내가 물었다.

“그런데 펜소가는 어떻게 몰락시킬 겁니까?”

“탈세 혐의를 밝혀서 전 재산을 몰수할 거야. 지금까지 모은 탈세 내역, 증거들만 해도 무기징역 감이거든.”

부자인 이유가 탈세였던 건가.

“최근엔 마약 밀반입한 정보도 입수했어.”

게다가 마약까지…….

“펜소가를 몰락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군요.”

“다만 걸리는 건 밀로야. 밀로가 펜소가에 있는 상태에서 몰락시킬 순 없어.”

나제트가는 황실의 은인이고, 밀로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혹여 밀로가 펜소가의 재력을 이용해 무언갈 할 수도 있으니…….”

“그러니까 밀로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몰라서 지금은 펜소가를 몰락시킬 수 없다는 거죠?”

“그렇지.”

“그럼 밀로를 빨리 찾아내는 게 관건이겠네요.”

“일단은 대회 끝난 후 다시 계획을 세우자고.”

똑똑― 디아고의 말을 끝으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님, 플로티나 공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플로티나 공작이 왔다고?”

디아고는 갑자기 그가 여길 왜 오냐는 투로 되물었다.

하인 대신 내가 답변했다.

“절 데리러 온 걸 거예요.”

아빠가 날 데리러 올 수도 있다는 건 어제 플로아를 만난 이후로 예상해서 놀라진 않았다.

우리는 응접실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안뜰로 내려가니 페르시스가 보였다.

멋대로 외박해서 화가 났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다행히도 그는 화나 있지 않았다.

뭐, 원체 표정이 크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페르시스가 디아고에게 인사를 건넸다.

“스타시아에 축복이 있기를.”

“오랜만에 뵙는군요, 공작.”

제드도 페르시스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각하를 뵙습니다.”

페르시스의 시선은 곧장 나를 향했다.

“데리러 왔다. 집에 가자, 메이.”

나는 디아고와 제드를 흘끗 쳐다봤다. 그들은 딱히 아무 말 없었지만, 계획은 다 세웠으니 집에 가도 될 것 같았다.

“……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인을 나왔다.

***

“남장을 그만할 생각은 여전히 없을까, 메이?”

마차에 오르자마자 물은 말에, 메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페르시스의 얼굴은 가까이서 보니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다크서클이 짙고, 푸석푸석했다. 그러나 메이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아직 며칠 안 됐는걸요.”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해서 네 의사를 묻는 거다.”

엘리사 유리에트 덕분에 깨우쳤다. 비체로 인해 분노한다면 분노의 방향은 그녀의 아이가 아닌, 비체 본인에게 향해야 한다는 것을.

비체의 딸이라는 이유로, 비체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멀리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잘못된 이에게 제 분노와 슬픔을 토해 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그 짧고 간단한 사과는 메이의 마음을 뒤흔들기는 충분했으나 어차피 자신의 뜻대로 살 날도 머지않았다.

아카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수호 기사단에 들어가고, 수호 기사단에 들어간 후 열심히 돈을 모아 페르시스에게 갚을.

약속했지 않은가. 자신이 이 집을 나가게 되면 키워 준 값의 두 배로 갚겠다고.

메이는 여전히 그리할 계획이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다 지난 일인 걸요.”

말을 더 섞으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메이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수호 기사가 되어 이 집을 떠나 보란 듯이 잘 살고자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겨우 그의 말 한마디에 목표가 무너지면 안 되니 말이다.

페르시스는 메이와 더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신과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 듯 보여 말을 걸지 못했다.

마차는 그렇게 조용히 플로티나에 도착했다. 메이가 마차에서 내릴 수 있게 도와주면서, 페르시스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오늘 저녁에 같이 외식하지 않겠니? 네 입맛에 맞을 것 같은 곳을 알아봐 뒀어.”

그러나 메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요. 곧 대회가 있어서 대회 준비를 해야 해서요.”

“……그렇구나.”

힘이 빠지는 기분. 동시에 씁쓸함이 밀려와 페르시스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메이는 고개 숙여 인사하곤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페르시스는 그런 메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야에서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씁쓸하고 허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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