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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64)화 (64/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64화

메이가 문을 닫고 방을 나간 뒤, 제드는 가만히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메이의 온기가 닿았던 손.

온기가 생생하게 느껴져 미간이 구겨졌다.

제드는 온기를 떨치듯 손을 털곤 아까 못다 한 위스키를 즐기러 메인룸에 내려갔다.

메인룸에 들어가니 회원들은 당구를 즐기고 있었고, 디아고는 소파에 홀로 앉아 있었다. 황녀는 자러 간 듯했다.

제드가 소파로 다가가니 디아고가 말을 걸어왔다.

“왜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이 일에 메이 플로티나를 끌어들인 거지? 딱히 메이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밀로는 사람을 시켜서 찾고 있고. 아무리 이 일에 네 의견을 전적으로 밀어주기로 했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군.”

디아고도 소파에 앉았다.

“메이가 협력하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겨우 그런 확실하지도 않는 예측 때문이야?”

“…….”

그 이유보다도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드는 메이의 마음을 갖고 놀 생각이었다.

메이 플로티나는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의 총애를 받으며, 수호 기사로서 자질도 있다.

자신이 그런 뛰어난 아이의 좋아하는 대상이 되면 더욱 완벽한 사람이 될 터.

마음을 제 뜻대로 다룰 수 있으려면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니 일부러 이 일에 그녀가 끼어들게 만든 것이었다.

“설령 메이 플로티나가 내게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그 애를 싫어하는 건 변하지 않아. 수호 기사로서 자질이 없는데 수호 기사가 되려고 하니까.”

제드는 디아고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자신이 메이의 마음을 흔드는 일에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야.

그것은 언제나 주인공이고 싶은, 겨우 남장여자에게 지고 싶지 않은 제드의 비겁한 마음이었다.

***

페르시스는 마물 사냥으로 인해, 밤이 되어서야 플로티나가에 돌아왔다. 온종일 마물 사냥을 했지만 옷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사냥 후 집에 돌아오면 항상 제 자식부터 찾았다.

“메이는.”

평소 같았으면 집사에 입에서 주무십니다, 따위의 대답이 나왔을 텐데.

오늘은 다르다. 집사는 어째서인지 우물쭈물했다.

“그게…….”

페르시스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인에서 가서 아직 안 돌아온 건가.”

그의 말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아들로 키웠으니, 아들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응당 하게 해야 한다는 거,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그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으면 미움을 살까 봐 자신이 직접 허락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내들만 가득한, 심지어는 유흥을 즐기는 2황자가 회장인 곳에 제 자식이 있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집사는 페르시스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아마도…….”

기다릴 수 없어 당장 메이를 데리러 가려고 하자 플로아가 등장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플로아는 순간이동을 할 수 있으니 페르시스가 다녀오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래. 그게 좋겠군.”

그때였다. 밖에서 보초를 서던 기사 한 명이 현관문을 열고 페르시스와 플로아가 있는 안뜰로 들어왔다.

기사가 페르시스 앞에서 부복했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밤 9시. 손님이 찾아오기엔 늦은 시각이었다.

“누구지?”

“펜소 백작 부인입니다.”

페르시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구겨졌다. 그녀가 여길 어디라고 찾아오는가.

“돌려보내.”

페르시스는 펜소 백작 부인의 그림자조차 보기 싫었으나.

“비체 유리에트에 관해 할 얘기가 있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비체의 이름이 나오자 페르시스는 경직되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비체의 고귀한 이름이 나왔다는 것조차도 경멸스러웠지만.

비체,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에 관해 할 얘기가 있다는 걸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페르시스는 펜소 부인을 집 안으로 들이라고 했다.

“……1층 응접실로 안내해.”

응접실 안, 페르시스는 굳은 낯으로 펜소 백작 부인을 맞이했다.

펜소 백작의 아내이자 클로빈의 친모인 엘리사 펜소. 더티 블론드 머리칼과 왼쪽 입꼬리 밑 점이 인상적인 여인.

엘리사가 예를 갖춰 페르시스에게 인사했다.

“플로티나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뵙는군요.”

페르시스의 목소리에서는 숨김없는 적대감이 드러났다.

“여긴 왜 왔지? 엘리사 유리에트.”

엘리사가 가볍게 미소했다.

“어머나, 언제 적 이름을. 이젠 엘리사 펜소라고 불러 주셔야죠.”

엘리사는 비체와 이복 자매였다. 외모도, 성품도 전혀 닮지 않아,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놀랍게도.

“그래, 적어도 내게선 그 이름으로 불리고 싶진 않겠지. 그대가 저지른 만행에 창피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20년 전, 페르시스가 사교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졸졸 쫓아다녔던 여자가 있었다. 그게 바로 엘리사 유리에트, 현재의 엘리사 펜소다.

엘리사는 페르시스에게 끈질기도록 사랑을 구걸했고, 그를 연모하던 영애들을 괴롭혔었다. 페르시스와 대화를 나누는 여자는 사람을 써서 납치, 감금, 협박하기도 했다.

그뿐이랴. 엘리사의 악독함을 알고 있던 페르시스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그녀는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방화를 저지르기도 했었다.

이러한 사이코 짓은 유리에트 가문이 몰락하고 가족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 여자가 비체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며 찾아왔다니.

“오늘만큼은 제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면 하군요. 각하를 도와 드리러 온 거니까요. 어쩌면, 제가 각하의 은인이 될지도 모르고요.”

“필요 없어. 비체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는 거, 그것만 하고 나가.”

페르시스와 엘리사는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눴다.

“죽은 제 동생, 비체 유리에트……. 그 앨 아직도 사랑하시나요?”

“…….”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떠나서 증오한다는 그 쉬운 말이 어째서인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엘리사가 다시 물었다.

“비체를 사랑해서…… 그녀가 낳은 아이를 키우시는 건가요?”

“……내 자식이 비체의 아이인 건 어떻게 알았지?”

“어머나?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한때 각하께서 사랑하셨던 여자와 판박이인데.”

이목구비가 빼닮았으니 다들 메이가 비체의 자식일 거라 확신했다.

“그녀가 낳은 아이라서 키우는 게 아니야. 그저 내가 원했을 뿐이다.”

“각하의 핏줄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은 아니고요?”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엘리사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기대감 때문이라면 안타깝게 되었네요.”

그녀는 갖고 왔던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밀어서 페르시스 앞에 전달했다.

“꺼내 보세요.”

페르시스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엘리사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서류를 열어 보니 사진 두 장이 들어 있었다. 꺼내서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사진은 어떤 남자의 사진이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제3수호기사단 소속 마테로진 키셀 남작이에요.”

“마테로진 키셀…….”

들어 본 적은 있다. 마물을 잡아 돈을 버니 수호기사단과 활동 범위가 겹칠 때가 종종 있었고, 애꾸눈인 사람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진도 보세요.”

페르시스는 마테로진의 단독 사진을 내려놓고 다른 사진을 보았다.

“!”

페르시스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비체와 마테로진. 누가 봐도 연인 사이인 것처럼 다정해 보였다.

첫 번째 사진과는 달리 두 번째 사진에서의 마테로진은 애꾸눈이 아니었다.

“충격 받으셨나요? 이상하네요. 비체에게 남자가 많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지 않았나요?”

그 애가 홀리고 다니긴 했죠.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지 않을 남자 없다는 거 알면서도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게 굴고…….

“어쩌면 남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상황을 즐겼던 걸지도 모르죠.”

페르시스는 엘리사의 말을 무시했다.

“……이 사진을 내게 보여 주는 저의가 뭐지?”

“첫 번째 사진을 다시 보세요.”

페르시스는 비체와 마테로진이 찍힌 두 번째 사진을 찢어 버리곤 첫 번째 사진을 다시 들었다. 마테로진 키셀은 헤스티아가 이끄는 기사단 소속답게 한쪽 눈을 가렸음에도 미남이었다.

사진을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이 남자를 보고 내가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군.”

“자세히 보세요. 누구랑 외형이 비슷하지 않나요?”

페르시스는 엘리사를 괜히 상대했나 싶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곤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깨달을 수 있었다.

백금발. 생머리. 벽안.

마테로진의 특징이 곧 자신의 딸, 메이의 특징이란 것을.

페르시스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는 걸 본 엘리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보통 다섯 살 내외로 발현한다는 가문의 힘이 아직도 발현되지 않았다면서요. 이에 대한 답이 그 사진에 있네요.”

당신의 핏줄이 아닌, 마테로진 키셀의 핏줄이라서.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눠 낳은 아이를 키우고 싶으신가요? 후계자가 필요해서 거둬들였다곤 해도 굳이 그 아이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자신의 친자식이 아닐 거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했다. 친자식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친아빠의 존재를 알게 되니, 또한 그자는 자신과는 다르게 비체의 사랑을 받고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엘리사가 쐐기를 박았다.

“파양하세요. 그 아이를 계속 플로티나 공자로 키우는 거, 그보다 미련한 짓이 없으니까요.”

미련.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단어.

그 단어를 듣자마자 스트레스성 두통이 와 눈을 질끈 감고선 이마를 부여잡았다.

엘리사는 볼일이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하께선 제 첫사랑이니 충고해 드린 겁니다. 꼭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를.”

엘리사가 인사하고 떠난 후에도 페르시스의 두통은 여전했다.

“비체, 넌 도대체 왜…….”

메이를 내 아이라 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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