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61화
디아고는 핏대 선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냅킨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가 화를 낼 것 같아 보이자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영식들, 아까 게임을 하면서 어느 정도 친해진 것 같은데, 말 편히 해도 되지? 비르타, 갈리, 클로빈?”
비르타, 갈리, 클로빈은 하나같이 뚱한 표정이었다.
“아, 물론 너희는 나한테 말 편히 하면 안 되고.”
아무리 어리석은 그들이라 할지라도 신분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네…….”
“좋았어.”
영식이라 부르기 불편했는데 잘됐네.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디아고는 입술을 닦은 냅킨을 패대기치며 나를 불렀다.
“메이.”
“황자님께선 원래대로 공자라고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만?”
네가 그 이름 부르면 기분이 더러워지거든요.
“덕분에 밥맛이 떨어졌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선 하인에게 명을 내렸다.
“메인룸으로 술을 가져와. 너희들도 식사 후엔 곧장 메인룸으로 와.”
갈리, 비르타, 클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리 숙여 대답했다.
“넵, 황자님!”
***
메인룸에 먼저 간 디아고는 내게 술을 진탕 먹여 다시는 자신에게 대들 수 없게끔 만들 작정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모두가 메인룸에서 술 파티를 벌이면 욕실이 빌 것이라 생각해 식사 후 곧장 욕실로 향했다.
나인은 공용 욕실이었기에 씻는 도중에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술 마시다가 갑자기 씻으려 하진 않을 테니까.
나는 안심하고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상의를 벗고, 하의를 벗고, 가슴 압박붕대도 풀었다.
압박붕대를 풀 때의 해방감이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욕실엔 욕조가 3개 있었다. 3개 다 목욕탕에 가면 있을 법한 큰 욕조로, 가운데 욕조엔 거품 물이, 양옆의 욕조엔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거품 물 욕조에 몸을 담갔다. 노곤한 게, 오늘 받은 스트레스가 모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둥둥 떠다니는 거품을 가지고 놀며 혼잣말했다.
“천천히 씻어도 되겠지?”
지금은 초저녁이고, 저들은 밤늦게까지 술 파티를 벌일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터벅터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얼른 거품 물속으로 몸을 숨겨 얼굴만 밖으로 나오게 했다.
누가 온 거지? 다들 한창 술을 마시고 있을 텐데?
뜨거운 물로부터 나온 수증기로 인해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건, 그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에 달랑 수건 하나로 중요 부위를 가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수증기가 사라지고 내 시야에 들어온 인물은.
“재미없게 씻으러 갈 줄은 몰랐군, 메이 플로티나.”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디아고였다.
‘미, 미친……!’
다행히도, 흰 거품 때문에 그에게 내 몸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안절부절못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인간이 욕실엔 왜 왔대?
어렵게 내뱉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술…… 마시는 거 아니었어요?”
“누구 때문에 흥이 깨져서.”
그래서 그 누구를 직접 찾아왔다는 듯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디아고가 내가 있는 욕조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나는 놀라서 크게 소리쳤다.
“어딜 들어오시는 거예요!!”
“……?”
마치 변태, 저질, 파렴치한을 보는 것만 같은 시선이 그에게 닿자 그는 눈에 띄게 황당해했다.
“……뭐야?”
시간이 5초 정도 흘러서야 나는 그가 황당해할 만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다. 그에게 나는 남자지. 같이 욕조에 들어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동성.
“아니, 그게 아니라…….”
뭐라 설명할 방도가 없어서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디아고는 내 말을 무시하고 욕조 안으로 발을 디디려고 했다. 식겁한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물을 뿌리고 말았다.
촤악―!
내 재빠른 손짓으로 높이 올라간 거품 물이 정확히 그의 눈에 착지했다.
“읏……!”
디아고는 거품 물이 들어간 눈을 움켜잡으며 뒷걸음질했다. 꽤 괴로워 보였다.
“야, 너……! 읏…….”
그는 내게 화를 내려다가 눈이 따가운지 얼른 냉탕에서 거품 물을 씻어 냈다.
눈에 들어간 거품 물을 완벽히 제거한 그는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너 미쳤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남이랑 같이 안 씻어서요.”
디아고는 황당해했다.
“남이랑 안 씻으면 공용 욕실엔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냈다.
“다들 술 마시느라 안 들어올 줄 알았단 말입니다……!”
술 마시다 말고 갑자기 씻으러 들어올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그는 다시 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어, 어딜 들어오시려고……!”
“착각하지 마. 거긴 안 들어가.”
다행히도 내가 있는 욕조를 지나쳐 온탕에 들어갔다.
“휴…….”
내가 안도하는 사이, 디아고는 욕조에 앉아서 따뜻한 물을 만끽했다. 두 팔은 욕조 턱에 걸친 채로. 그러다 머리칼이 앞으로 흘러나오면 젖은 손으로 쓸어 넘겼다.
나는 여전히 거품 물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있었다.
“……빨리 씻고 가 주시면 안 됩니까?”
내쫓고 싶지만 그는 나인의 주인, 나는 일개 회원. 그는 황자, 나는 공자. 그럴 수 없는 입장이니 그가 후다닥 씻고 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야 했다.
“누가 들으면 여기 주인인 줄 알겠어? 돈 한 푼도 안 낸 게.”
“나중에 드릴 테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목소리의 옅은 떨림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이 느껴졌는지, 그는 내 쪽으로 몸을 틀곤 두 팔에 턱을 댔다. 흥미롭다는 그의 시선이 내게 곧장 닿았다.
“이상하군, 공자. 왜 떨고 있지?”
나는 입술 바로 밑까지 잠기게끔 몸을 더욱 굽혔다.
“제, 제가 언제 떨었다고 그러십니까.”
“지금도.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군.”
나는 아닌 척 시선을 회피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나를 응시했다.
“설마…….”
혹여 내가 여자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이야?”
뜻 모를 물음에 눈을 천천히 떴다.
“……뭐가요?”
“이런 완벽한 몸 보는 거.”
“……예?”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오자 나는 눈만 껌뻑거렸다.
“완벽한…… 뭐요?”
“완벽한 내 몸.”
디아고는 그의 몸에 상당히 자신 있어 보였다. 매일 술을 퍼마셔도 지방이라곤 보이지 않는 몸. 조금만 운동해도 근육이 잘 만들어지는 체질인 듯했으며, 대체로 뭐든 큼지막하긴 했다.
그가 앞으로 내려온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자화자찬했다.
“내 몸을 보고 놀랄 만하지. 네 몸과 비교될까 봐 부끄러워서 물속에 숨는 것도 이해해.”
씨익 올라간 입꼬리를 보아하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내가 여자라는 걸 알아차리는 것보단 나으니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았다.
“저는 원래 혼자 씻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빨리 나가 주세요.”
그러나 망할 디아고는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디아고는 말을 하다 말고 무언가를 떠올리듯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인상을 쓰며 주먹으로 욕조 물을 내리쳤다.
첨벙―!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튀긴 물이 내 얼굴을 흠뻑 적셨다.
나는 그런 그가 미친놈인가 싶었다. 갑자기 왜 혼자서 짜증낸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디아고는 짜증이 치미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에이씨……. 걔는 이상한 얘길 해서.”
나는 디아고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며 물었다.
“……뭐가요?”
“징그러운 말을 하더군.”
“……?”
“공자가 여자라는 말.”
“……네?”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눈은 흰자위가 전부 보일 만큼 커져서는 깜빡거리지도 않았다.
“누가요……?”
“제드.”
혼란스러웠다. 제드가 왜 그런 말을 했지……? 내가 여자라는 걸 알고 있던 거야……?
“제드한테 가서 말해. 멀쩡하게 남자로 태어난 사람 여자 취급하지 말라고. 듣는 내가 징글징글하니까.”
디아고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에겐 정신계 마법이 잘 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드는 왜?
플로아보다 마력이 강하면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처럼 정신계 마법이 안 통하지만 제드는 아직 수호 기사가 되기 전이라 마력이 없을 터.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울 그때. 제드가 욕실로 달려왔다.
“제드……?”
제드는 여길 왜……?
다행히 그는 씻으려는 게 아닌지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다소 다급하게 들어오던 제드는 나와 디아고를 번갈아 보더니 안도하며 속도를 줄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디아고에게 다가갔다.
“황자님, 나중에 씻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상치도 못한 권유에 디아고는 황당했다.
“이미 욕조에 들어온 마당에 나가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드는 디아고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태연하게 연기했다.
“황녀님께서 울고 계십니다.”
“이사벨이? 왜?”
“갈리랑 비르타가 술에 취해 싸우다가 그만 황녀님의 소중한 장난감을 부러트렸습니다.”
“뭐?!”
디아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의 몸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것들이, 감히 내 동생을 울려?”
“그러니 당장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지.”
디아고는 살기를 내뿜으며 욕실에서 나갔다.
디아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는 다시 고개를 원위치했다.
갔나……? 슬쩍 입구 쪽을 쳐다보다가 제드와 눈이 마주쳤다. 얜 왜 안 나가지? 그 이유를 마저 생각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씻고 내 방으로 와. 할 얘기가 있어.”
할 얘기?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진지한 걸까. 나는 일단 알겠다고 했다.
“응…….”
제드는 욕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