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60)화 (60/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60화

우리는 포켓볼대로 이동했다. 클로빈이 큐대를 손질하는 사이, 나는 포켓볼 공만 멍하니 바라봤다.

포켓볼은 이전 생에서도 딱 한 번 해 본 게 끝이라 난감했다.

난 규칙도 잘 모르는데…… 클로빈은 나인에서 많이 해 봤을 테니 잘하겠지?

이번엔 내가 지리라 직감했다.

클로빈은 큐대를 손질하며 나를 곁눈질했다. 내 반응을 보고는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는 듯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내게 큐대 하나를 넘겼다. 그리고 한 발짝 앞서 나갔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어…… 그래.”

나는 클로빈이 하는 걸 보면서 자세 잡는 걸 익히고자 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클로빈은 익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탕― 데구르르, 골인. 탕― 데구르르, 골인.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두 번 연속 공을 홀 안에 집어넣었다.

엄청 잘하잖아……?

겨우 한 번 쳐 본 나와 달리 그는 수백 번 쳐 본 것 같은 노련한 솜씨였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뻣뻣하게 자세를 잡았다. 클로빈의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공자님, 처음 해 보시나 봅니다? 킥킥. 오른손잡이면 왼손이 위로 올라와야죠.”

아, 어쩐지. 뭔가 어색하더라. 나는 큐대 손 위치를 바꾸고 다시 몸을 숙였다.

그때였다. 내 뒤에서 귀를 간지럽히는 미성이 들려왔다.

“허리, 좀 더 구부려야 편해.”

다름 아닌 제드의 목소리였다. 내가 클로빈의 플레이를 관람하는 사이 그가 메인룸에 들어왔었나 보다.

나는 그의 지시대로 허리를 바짝 구부렸다.

내 어깨에서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어깨에 힘 풀고.”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어깨가 움찔 떨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손을 댔는데 힘을 풀라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드는 자신의 스킨십으로 인해 더욱 힘이 들어갔다는 걸 아는지 내게서 손을 뗐다.

“힘만 풀면 될 것 같아.”

“응……. 고마워.”

제드가 자리를 비키고 나서야 어깨가 풀렸다. 나는 제드가 교정해 준 자세로 흰 공을 쳤다.

탕, 흰 공이 다른 공과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한 번 더 탕, 또 다른 공과 부딪치니 목표했던 공이 홀로 들어갔다.

“아싸! 들어갔다……!”

제드는 신이 난 나를 뒤로한 채 소파로 향했다.

***

제드가 소파에 앉자 먼저 앉아 있던 디아고가 그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이건 무슨 계획이야?”

“…….”

“잘해 주는 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싶군. 저러다 널 좋아하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

“귀찮은 일 만들지 마. 받아 줄 마음도 없잖아.”

디아고는 자신의 표적이 제드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괴롭히든 간에 제드를 좋아하는 힘으로 악착같이 버텨 낼 것만 같아서였다.

하인이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왔다. 그는 먼저 디아고에게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디아고가 위스키로 목을 축이는 사이, 제드의 입에서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받아 줄 마음은 없어도 재미를 볼 마음은 있습니다.”

제드도 하인이 따라 준 위스키를 음미했다. 하인이 나가고 나서 내려놓은 위스키 잔엔 자신의 뒤로 포켓볼을 하는 메이가 비쳤다.

“좋아하게 만들면, 제가 이긴 게 아니겠습니까.”

설령 자신보다 주목받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자신보다 잘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그것으로 이긴 것이다.

“……이상한 데에서 승리욕을 느끼는군.”

디아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난 딱 질색이야. 너나 남자 갖고 놀아.”

“메이 플로티나는 남자가 아닙니다.”

디아고는 그게 뭔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여자입니다.”

패션 거리에서 스텔라 나제트와 어깨를 부딪친 날. 메이 플로티나의 실물을 처음 봤던 날. 그날도 나인에서 술을 마셔서 취한 상태였었다.

실수로 스텔라 나제트의 어깨를 부딪쳤고, 우연히 그 옆에 있던 메이 플로티나를 보게 되었다.

실제로 만난 메이는 여자에 가까운 외모였다.

술에 취해서 잘못 본 게 아니다. 누가 봐도 여자의 외형이었다. 그저 머리만 짧고 남성복만 입었을 뿐, 확실히 여자였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메이 플로티나의 성별을 의심하지 않고 남성이라 믿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아이리스의 생일 파티에서 알아냈다.

메이와 동행했던 플로티나가의 수호신, 플로아.

그는 마법사 시절부터 정신계 마법을 잘 다루기로 유명했다고 들었다. 다른 이들이 메이 플로티나의 성별에 의문을 품지 않는 건, 플로아의 정신계 마법 때문임이 확실했다.

“뭐……?”

디아고는 포켓볼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회원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갈리 막심도 합세하여 비르타와 함께 클로빈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이사벨라와 꼭 붙어서 클로빈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는 소년, 메이 플로티나.

메이를 유심히 보던 디아고는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네가 술에 약한 건 알았지만 설마 한 모금 마시고 취할 줄은 몰랐군. 메이 플로티나가 어떻게 여자야.”

디아고는 제드가 술주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 맞습니다.”

“돌았어?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

그의 정색에는 혐오가 묻어났다.

“외관만 봐도 여자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선이 유달리 곱고, 예쁘잖습니까.”

“예쁘게 생기긴 했…….”

디아고는 자신의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말로 내뱉고는 급히 화를 냈다.

“에이씨.”

그는 옆에 있던 쿠션을 메이에게 힘껏 던졌다. 쿠션이 날아오자 메이는 화들짝 놀래며 받았다.

“까, 깜짝아…….”

미친 건가? 갑자기 쿠션을 왜 던져?

“왜 던지십니까?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야지.”

그러나 디아고는 메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야, 진짜…….”

“공자님 차례입니다.”

메이는 디아고를 째려보며 쿠션을 내려놓곤 다시 포켓볼에 집중했다.

디아고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탁 내려치며 일어나 제드의 진보라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이를 악물곤 다른 회원들에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런 거 제일 싫어해. 알지? 하도 유혹하길래 자 볼까 했던 여자가 벗겨 보니 남자였던 거. 그 뒤로 여자 안 만나잖아.”

한때 디아고는 여색을 즐기며 문란한 생활을 했었다. 이를 한심하게 여기던 황제는 그의 문란한 생활을 고치기 위해 여장에 적합한 남자를 고용했다.

그 남자에게 디아고를 유혹하라 명했고, 여자인 줄 알고 유혹에 넘어간 그는 나신을 보고 나서야 남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그때 아버지께 얼마나 조롱당한 줄 알아? 한동안 사람 성별도 못 구분하는 등신 취급당했었어.”

이 사건으로 인해 디아고한테는 성별 파악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알고 있습니다.”

“알면 입 닥쳐. 알고 보니 성별이 다른 거, 제일 혐오스러워하니까.”

“…….”

“메이가 남자라면 남자인 거야.”

디아고는 그렇게 단언하고 나서야 화가 좀 풀리는지 고고하게 위스키 잔을 들었다.

제드는 디아고의 말은 잘 듣는 사람이었기에 더는 메이가 여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디아고가 메이에게 흥미를 가진 것도 그녀가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예쁘장했기 때문이며, 어쩌면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그 사건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것까지.

사촌지간으로 디아고의 곁에 오래 있었기에 그의 심리를 잘 알았다.

“……만일 메이가 여자라면 평생 술을 끊지.”

그리 선언하는 디아고는, 메이가 절대로 여자일 수 없다는 생각보단 절대로 여자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더 큰 듯했다.

***

포켓볼은 당연하게도 클로빈의 승리로 끝났다. 그는 사랑의 라이벌을 이겼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어깨는 산을 가져와 얹은 듯 매우 높고 뾰족하게 올라가 있었다.

“나제트 영애가 아까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내게 반했을 거다!”

“암요, 그럼요, 당연하죠!”

“펜소 공자님이 멋지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비르타와 갈리는 옆에서 비위 맞춰 주기 바빴다.

이사벨라는 내 손을 잡으며 괜찮다고 해 주었다.

“져도 괜찮아요. 공자님이 펜소 영식보다 훨씬 더 멋지니까요.”

“감사합니다, 황녀님.”

저녁 시간이 되어 우리는 식당에서 다 함께 식사했다.

다들 식사에 임할 때, 딱 한 명. 이사벨라만 딴짓을 했다.

‘내 얼굴 뚫어져라 보기’였다.

보다 못한 디아고가 한마디 했다.

“이사벨, 어서 식사해.”

그는 나와 이사벨라가 딱 붙어 있는 것을 몹시 거슬려했지만 억지로 떼어 내려고 하진 않았다.

동생 바보인 그에게 ‘억지로’ 혹은 ‘강제로’ 무언갈 하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나 보다.

이사벨라의 입술이 열렸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님은 여자로 태어나셨다면 엄청 엄청 미인이셨을 것 같아요.”

“푸흡-”

방심하다가 투수가 던진 공에 맞은 사람처럼 먹고 있던 양송이수프를 뿜었다.

그 수프는 고스란히 디아고의 얼굴에 묻었다.

“어머……!”

나는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디아고의 얼굴이 더러워져서 내심 통쾌하긴 했다.

“저런, 죄송해라.”

죄송함이 먼지만큼도 보이지 않는 사과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