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9화
“이거 봐. 힘 하나 제대로 못 쓰면서 무슨 수호 기사야. 겨우 피그링 하나 죽인 것 갖고 뿌듯해할 때부터 알아봤어.”
“놓아주세요……!”
숨이 막혀서 그의 팔을 세게 때리니 그제야 그가 손을 놔주었다.
“하아- 하아-”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곤 구겨진 옷을 정리했다.
“너도 네가 나약하다는 걸 알아서 다른 수단으로 수호 기사가 되려던 거잖아. 이를테면, 애교나 아양이라든지. 그런 천박한 걸로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와 친분을 쌓은 거 아닌가?”
“그런 식으로 아이리스 님과 카시우스 님의 마음을 얻고자 한 적 없습니다……!”
“그럼 뭐, 여장이라도 했나? 너, 계집애처럼 생겼잖아.”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다. 나는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설령 제가 그랬다고 해도 애교나 아양을 부린다고 수호 기사로 선출하실 분들이 아닙니다. 황자님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내가 어떻게 알아.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누구를 유달리 예뻐하는 걸 처음 보는데.”
디아고의 말을 듣고 있자 하니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저만 괴롭히시는 겁니까? 자질이 없어서 괴롭힌다기엔 나인 회원들도 그다지 수호 기사로서의 자질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내가 겨우 그딴 거에 질투할까 봐? 안타깝지만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너를 예뻐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그런데 그로 인해 자질 없는 네가 기사단에 들어갈 것 같은 게 문제지.”
이대로는 말싸움이 끝이 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내가 그의 말을 반박하려 할 때였다.
“오빠? 공자님?”
우리가 있는 메인룸에 이사벨라가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꺄항- 여기 계셨군요? 저랑 놀아요!”
이사벨라는 총총 달려와선 내 손을 이끌었다. 이사벨라의 손이 내 손에 닿는 걸 본 디아고는 버럭 화냈다.
“메이 플로티나, 감히 어딜 잡는 거야?!”
내가 잡은 것도 아닌데 나한테 화를 낸다.
기운이 있었다면 왜 내게 화내냐며 따졌을 테지만, 이미 그와 말싸움으로 에너지를 소모했기에 뭐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대신 이사벨라가 디아고를 나무랐다.
“오빠, 왜 우리 공자님께 화를 내? 오빠 나쁜 사람이야?”
“공자가 네 손을 잡았잖아. 화를 내는 지금도 잡고 있고.”
“내가 잡은 거거든? 한 번만 더 버럭버럭 언성 높이면…… 오빠 진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디아고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이사벨, 메이 플로티나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그야 예쁜 사람이니까!”
“예쁜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 당장 무도회만 가도 예쁜 사람 천지야.”
“아, 정정할게. 공자님은 예쁜 남자잖아. 무도회에 가도 예쁜 남자는 없다구.”
디아고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사이, 이사벨라는 잡은 손을 흔들었다.
“소파에 앉아요, 공자님.”
“어? 아, 넵, 황녀님…….”
소파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디아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담소를 나눴다.
“공자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열다섯 살입니다. 이번 가을에 열여섯 살 생일을 앞뒀습니다. 황녀님은요?”
“저는 이번 봄에 열 살이 됐어요! 궁합도 안 본다는 다섯 살 차이네요.”
“그건 네 살 차이겠지.”
이사벨라가 은근슬쩍 그녀와 나를 엮자, 디아고는 매우 못마땅하게 안면을 구기며 소파에 착석했다.
소파는 반원 모양이어서 이사벨라를 가운데 두고 디아고와 나는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오빠, 찬물 끼얹지 마!”
이사벨라는 디아고를 째려보곤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공자님은 좋아하는 게 뭐예요?”
“좋아하는 거요? 저는…….”
좋아하는 거라…….
예전엔 좋아하는 걸 물으면 바로 떠오르곤 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만 누리고 살 수 없어서 좋아하는 걸 잊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기억을 더듬으며 떠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단걸 좋아해요. 그래서 밥보다 디저트를 많이 먹는 날도 있어요.”
“입맛하고는.”
디아고가 또 찬물을 끼얹자 이사벨라는 옆에 있던 쿠션을 그에게 던졌다.
“오빠, 좀!”
디아고는 날아오는 쿠션을 여유롭게 한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또…… 제가 황녀님 나이였을 땐 긴 웨이브 머리를 좋아했어요.”
긴 웨이브 머리를 하려고 밤에 머리를 자주 땋고 잤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긴 웨이브 머리? 여자 취향인가? 아, 그러고 보니 나제트 영애도 긴 웨이브였지.”
디아고는 데뷔탕트 때 스텔라를 봤기에 그녀의 외관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그런 사이 아닙니다.”
“마자! 공자님이 안 좋아한다는데 오빠 왜 그래!”
이사벨라가 자꾸 내 편을 들자 짜증이 났는지 디아고는 쿠션을 문 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쾅―! 얼마나 힘껏 던졌는지 쿠션이 문 부딪치는 소리가 쇠 부딪치는 소리로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사벨라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황녀님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저는 공자님이요!”
어머, 박력 있네.
열 살 여자아이한테 조금 설렐 뻔했다.
“공자님은 어떤 사람 좋아하세요?”
“음…… 글쎄요. 제게 다정하고, 계산적이지 않고, 황자님처럼 버럭 화를 내지만 않으면 대부분 좋지 않을까요?”
디아고는 내 대답에 대놓고 비웃었다.
“공자, 그거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안타깝지만 그런다고 내 태도가 바뀌진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바뀌실 건데요? 어떻게 해야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실 건데요?”
“난 사과하지 않아. 사과, 반성 같은 건 급이 낮은 것들이나 하는 거지.”
어떻게 같은 인간이 저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인성이었다.
“뭐,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달라질 수도 있겠네. 나한테서 사과를 듣고 싶다면 여자로 다시 태어나서 나를 꼬셔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 공자.”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방법이군요.”
나는 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응시했다.
“나한테서 사과를 듣고 싶은 거잖아. 그래서 나인에 들어온 게 아닌가? 그렇게 해서라도 사과를 받는다면 쓸데가 있는 거지.”
“아뇨, 없어요. 아주 조금도 없어요.”
디아고와 이성으로 엮이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했다.
“정색하기는. 내게서 사과를 바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려 준 것뿐이야.”
“…….”
그의 오만한 표정과 태도, 언어까지. 내 오기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으나 지쳐서 더는 대꾸할 힘이 없었다.
기가 빨린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나는 머릿속에 다짐을 새겨 넣었다.
디아고한테서 제대로 사과만 받아 내면 더는 그와 엮이지 않겠다고. 말도 섞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회원들이 하나둘씩 메인룸에 입장했다. 비르타, 갈리, 클로빈. 제드를 제외하고 모두 다 메인룸에 모였다.
클로빈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승부를 걸었다.
“저와 다트 게임 하시죠.”
다트 게임?
그 소리에 먼저 반응한 건 황녀였다.
“공자님, 다트 게임 잘하세요?”
옆에 있던 이사벨라가 묻자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 조금요.”
다트는 빙의하기 전에 해 보곤 빙의 후엔 하지 못했다. 안 한 지 오래됐지만, 그 당시에는 나름 잘 던졌었으니 지금도 아마 기본은 할 것이다.
나는 다트 기계로 향하는 클로빈을 뒤따랐다. 이사벨라도 총총 따라왔다.
클로빈은 벽걸이형 다트 기계 앞에서 멋있는 척 온갖 폼을 잡았다.
“제가 이 게임에서 이긴다면 다시는 영애님을 갖고 놀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죠.”
갖고 놀아……? 내가 스텔라를? 폼 잡고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펜소 영식……. 혹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거야? 내가 아니라는데 왜 자꾸 이래.”
“나제트 영애님과 공자님이 줄곧 함께였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사교계에 퍼져 있던 소문입니다.”
“도대체 누가 소문을 퍼트린 거야…….”
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제트 영애님이 공자님을 좋아한다는 건 부정하실 수 없을 겁니다. 수많은 영식들이 영애님께 구애 편지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명도 답신을 못 받았으니까요. 그에 반해 공자님과는 잘 지내시니 좋아하는 게 분명합니다.”
나름 그럴듯하게 추리했으나 진실을 아는 나한테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말이었다.
나랑만 잘 지내는 게, 어떻게 사귀는 거냐?
“우린 친구 사이라고.”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습니까?”
남녀 사이가 아니니까 그렇지!
소리치고 싶었지만 한 자락 남은 인내심으로 겨우 참아 냈다.
“몰라. 네 마음대로 생각해.”
백날 아니라고 해도 안 믿을 것 같으니까 포기한다, 내가.
클로빈은 내 반응을 자기 멋대로 해석했다.
“역시 갖고 노시는 거였군요……. 어떻게 영애님께 그러실 수 있습니까?”
나는 클로빈의 말을 무시하곤 다트 기계 옆 선반에 놓인 다트 핀을 전부 가져왔다. 그리고 가져온 다트 핀의 반을 클로빈에게 넘겼다.
“스텔라 얘긴 그만하고 게임이나 해.”
10분 후. 클로빈은 죽상을 지었다.
“내가 졌다니……. 영애님을 걸고 게임에 임했는데 내가 졌다니…….”
차례를 오가며 각각 10번 던져서 가장 큰 점수를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룰을 정했었다.
“어떻게 일곱 번이나 불을 맞출 수가 있는 거지……?”
나는 다트판 정 가운데(bull)를 일곱 번이나 맞췄고, 클로빈은 한 번밖에 못 맞춰서 꽤나 큰 점수 차이로 내가 이겼다.
게임을 지켜본 이사벨라가 신나서 콩콩 뛰었다.
“꺄항- 공자님 멋져요!!”
클로빈은 자존심이 상해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랑의 라이벌한테 질 순 없어! 꼭 이겨야 해!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클로빈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음 승부로 좋을 게임을 찾다가 포켓볼대를 발견했다.
그는 비장하게 내게 다가왔다.
“다음 승부는 포켓볼입니다.”
“다트만 하는 거 아니었어?”
클로빈은 내 말을 무시했다.
“이번엔 정말로 안 봐 드립니다.”
음…… 아까도 봐줬다기에는 진지하게 임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