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8화
열심히 해 보자는 파이팅이려나? 나는 회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은 볼일은 끝이라는 듯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귀가하겠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대회장에서 뵙겠습니다.”
“아카센터에서 뵙겠습니다.”
아…… 이제 해산하는 거야?
다들 나갈 채비를 했지만 나는 딱히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페르시스와 마주치면 허무함이 밀려올 테니까.
정식 회원이니까 마음대로 자고 가도 된다고 했지?
“저는 나인에서 묵고 가겠습니다.”
오늘 수업도 없고, 내가 나인에 들어간 건 페르시스뿐 아니라 엘렌, 조안, 플로아도 아니까 외박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내 말에, 메인룸을 나가려던 회원들이 내게 집중했다.
디아고는 아니꼬운 어조로 물었다.
“……어째서?”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대신 이사벨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나도 여기서 자고 갈래!”
디아고는 칼같이 불허했다.
“넌 안 돼.”
“안 되는 게 어딨어? 전에도 자고 갔잖아!”
“메이 플로티나가 있을 땐 안 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디아고를 찌릿 째려보았다.
이사벨라는 몸을 흔들며 떼썼다.
“아아아앙- 자고 갈 거야! 공자님이랑 같이 있고 싶단 말야아아아- 오빠도 자고 가아아아-”
이를 지켜보던 클로빈은 이때다 싶었는지 아니꼬운 말투로 일러바쳤다.
“황녀님, 플로티나 공자님은 교제하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제트 후작가의 영애님이죠.”
“……정말로요?”
이사벨라가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나는 클로빈을 한 번 노려보고는 이사벨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저흰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이에 클로빈이 버럭 화를 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영애님과 교제하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는데 왜 자꾸 맞다고 우기는 거지?”
그러나 그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영애님 같은 분과 교제하면 교제한다고 당당하게 밝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다른 여자를 건드려 보려고 교제 사실을 숨긴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펜소 영식…….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황당해서 헛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다.
클로빈은 내게 분노하며 주먹을 쥐었다.
“끝까지 부정하다니……. 저런 쓰레기 같은……!”
그는 홧김에 외치고는 선언했다.
“저도 오늘 나인에서 묵고 가겠습니다.”
오늘, 누가 더 나제트 영애 곁에 있을 만한지 겨뤄 보자. 클로빈의 결심이 눈에 뻔히 보여 나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스텔라를 데려와서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해명할 수도 없고…….
이사벨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앙탈을 부리는 중이었다.
“자고 갈래- 자고 갈래애애애-”
디아고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감싸곤 스윽 내렸다. 그리고 몹시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결정을 내렸다.
“오늘은 회원 전부 나인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걸로 하지.”
“꺄하항-”
이사벨라는 좋아서 몸을 팡팡 흔들었고, 졸지에 갈리와 비르타, 제드는 예정에도 없던 외박을 하게 되었다.
***
나인은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었다. 배고프면 셰프가 맛있는 음식을 해 주고, 욕실도 항상 깨끗하며, 개인 공간까지 제공한다. 옷이 필요하면 시종을 시켜서 사 오게끔 할 수 있다.
제일 좋은 건, 이 모든 비용을 회장인 디아고가 부담한다는 것.
그렇다고 회원들이 사치를 부리진 않는다. 디아고가 무서워서였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집에서 못 부린 사치, 이곳에서 부렸다.
“오늘 입을 잠옷과 내일 입고 갈 외출복을 사 와 줘. 최고급 원단을 쓴 가장 비싼 옷으로. 혹시 모르니까 5벌씩 사 와.”
이 정도면 사치를 부리는 것치고는 검소한 편이겠지.
“넵, 공자님.”
시종에게 옷 주문을 마친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여기, 가출하기 딱 좋은 것 같지?
왜 그 수많은 귀족 자제들이 나인에 들어오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인만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자유로운 곳이 없으니까!
소속감도 생기고 말이다.
그냥 오늘부터 가출해 버릴까, 하는 충동이 생겼다.
그러나 그 생각은 메인룸에 들어가 디아고를 보자마자 싹 사라졌다.
‘저 인간이랑 어떻게 같이 지내…….’
디아고는 메인룸에서 홀로 당구를 치고 있었다.
큐대를 잡고 있던 그는 몸을 낮추곤 시선을 공에 고정했다. 가볍게 흰 공을 치니 계산된 궤적을 그리며 다른 공들을 맞혔다.
탁, 탁, 데굴―
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물론 당구를 모르는 나로선 그가 잘 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디아고는 당구대 옆, 미니 테이블에 놓인 리큐어 잔을 들었다. 그리고 데킬라 베이스의 칵테일을 마셨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내가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긴 왜 들어온 거지? 네 방에만 있으라 했을 텐데?”
그는 내가 이사벨라와 만나는 것을 경계하여 내게 방에만 있으라 명령했었다. 나는 가뿐히도 명령을 어겼다.
“방에만 있기엔 심심하잖아요. 아직 대낮이고, 저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갈 텐데.”
“공자는 참 당돌해. 뭘 믿고 당돌하게 구는지 모르겠어.”
“저를 믿죠.”
디아고는 큐대를 내려놓았다. 리큐어 잔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내가 너를 왜 궁지로 몰았는지 알아?”
“이유가 중요하진 않죠. 괴롭히는 이유는 누가 뭐래도 듣기 불쾌한 변명일 뿐이니까요.”
“아, 내가 가해자다?”
그는 살풋 조소를 흘렸다가 내 말이 재밌다는 듯이 경청했다.
“그럼 피해자인 줄 아셨습니까?”
“엄연히 따지면 피해자지.”
“피해자의 뜻을 모르시나요? 피해자는 말 그대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가 메이 플로티나라도 되는지, 그의 구두코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무엇을 피해 입었다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한 사람과 괜히 말을 섞었나, 후회도 되었다.
“무슨 피해를 어떻게 입으셨습니까? 저처럼 존재하지도 않은 도둑으로 몰리기라도 하셨습니까?”
“너같이 수호 기사로서 자질이 없는 것들 때문에 우리 형이 오른팔을 잃었지.”
디아고는 내게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뒷걸음질하여 그와 떨어지고자 했다.
“형은 제3기사단 내에서 강하기로 손꼽히는 사람이었어.”
헤스티아가 단장으로 이끄는 3기사단은 A급 이상의 마물을 발견할 때면 항상 황태자에게 처리를 맡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물 사냥을 하던 3기사단 기사들이 글리우곤을 발견한 거야.”
그 기사들은 늘 그랬듯이 황태자에게 처리를 맡겼고, 황태자는 홀로 글리우곤과 맞서게 되었다.
“처음엔 우리 형도 혼자서는 버거울 것 같아서 같이 쓰러트리자고 했었대. S급 마물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거든.”
기사들은 알겠다고 하였으나, 어느샌가 황태자는 홀로 글리우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망할 것들이 무서워서 멀찍이 숨어서 지켜보기만 했다고 하더라고. 수호신을 따라서 제국을 수호하는 수호 기사씩이나 된 주제에 마물 앞에서 쫀 거지. 상대는 S급 마물이고, 분신 능력이 있어서 죽이기 어렵다는 걸 본인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거든.”
내 뒷걸음질은 등이 벽에 닿고서야 멈췄다. 더는 물러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형 정도라면 글리우곤을 쓰러트릴 수 있다고 부추기며, 도울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 입만 놀릴 뿐.”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손으로 벽을 쳤다. 탕, 벽과 손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내 귓속 고막을 크게 울렸다.
하마터면 내 귀가 그의 큰 손에 짓눌릴 뻔했다.
그는 내 옆에 놓인 자신의 오른팔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다들 형의 오른팔이 잘려 나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어. 고작 마물 한 마리가 무서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
죽기 직전에서야 우연히 그 근방을 지나가던 제2기사단 소속, 나제트 후작이 황태자를 구했다.
같은 기사단 동료가 다치는 걸 보면서도 끝까지 나서지 않았다니. 당사자의 동생으로선 격노할 일이었다.
디아고는 그의 그림자 속에 완전히 삼켜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후로 수호 기사를 혐오해. 정확히는, 수호 기사로서 자질도 없으면서 수호 기사가 된 것들. 혹은 되려고 하는 것들.”
그의 미간이 와작 구겨졌다.
“그런 것들을 보면 전부 죽여 버리고 싶어.”
그의 분노가 짙은 녹색 눈동자에 일렁였다. 정말로 살의가 느껴졌다.
“그러니까…… 제가 수호 기사로서 자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수호 기사가 되고자 해서 괴롭혔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제게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황자님께선 모르시지 않습니까.”
“네가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나는 절대로 동료가 다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동료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뿐인가?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수호 기사가 되기 위해서 지식도 쌓고 체력도 길러 왔다. 검술은 기본으로 익혔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듯이 디아고는 내 숨을 조여 왔다.
“윽……!”
그가 내 멱살을 잡아든 것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붕 떴다. 키가 큰 디아고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무, 무슨 짓입니까……! 이거 놓으세요!”
나는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애썼으나 내 옷자락을 쥔 손은 끄떡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