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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6)화 (56/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6화

“…….”

메이는 아무런 대답 없이 눈동자만 떨리다가 이내 시선을 떨궜다. 페르시스는 그녀가 기뻐할 줄 알았으나 예상과는 다른 메이의 반응에 입매가 점차 굳어졌다.

메이는 반감부터 들었다.

왜 아들로 사는 걸 그만두라는 거지? 내가 그의 핏줄이 아니라고 단정을 짓고 나를 내쫓으려는 건가?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자신을 내쫓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것 나름대로 메이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아들로 살라고 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해 왔는데, 왜 이제 와서 힘 빠지는 소리를 하는 것인가.

성년이 되면 수호 기사가 되어 보란 듯이 남장을 끝내고 이 집을 나갈 생각이었는데 왜.

허무함은 그녀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아뇨. 계속 아들로 살 겁니다.”

어째서? 설마 거절할 줄은 몰랐던 페르시스는 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가문의 힘이 발현돼서 친자식임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아들로 사는 거, 그게 저를 입양하는 조건이었잖아요. 가문의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는…… 이대로 있을래요.”

“하지만 하인드는…… 분명 네가 날 원망할 거라 충고했어. 그리고 난 네게 더는 원망할 일이 없었으면 하고. 그러니 이젠 아들로 살지 않아도 돼.”

원망하지. 원망한다. 그래서 더욱 쉽사리 딸이 되겠다며 좋아할 수 없는 거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인데도.

메이는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참아 냈다.

“아들 행세에 적응한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딸로 살아가고 싶으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메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

플로아는 메이와 페르시스가 함께 외출했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드디어 화목한 가정이 되나 싶었지만 어쩐지 집에 돌아온 그들의 표정은 마냥 좋지 않았다.

플로아는 먼저 메이의 방에 가,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페르시스 님과 즐거우셨습니까?”

메이는 플로아의 시선을 피했다.

“기차에서 점심 먹고, 선물 드리고, 바깥 구경하다가 돌아왔어요.”

즐거웠냐고 물었는데 다른 대답을 하는 게 이상했다.

“혹시 페르시스 님과 트러블이 있었습니까?”

“아뇨. 트러블이라기보단…… 그냥 좀 허무해서요.”

“허무하다뇨?”

메이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플로아, 옷 갈아입어야 해서 그런데 나가 주시면 안 될까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플로아는 메이의 방에서 나와 페르시스가 있을 서재로 순간이동 했다.

생일 선물로 받은 손수건을 꼭 쥔 채 소파에 앉아 있던 페르시스는 표정이 미묘했다.

플로아가 그에게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오늘 메이 님과 어떠셨습니까?”

“……생일 선물을 주더군.”

플로아가 맞은편 소파에 앉고선 나긋하게 미소했다.

“좋으셨겠습니다.”

“그리고 거절당했어. 아들로 사는 거, 그만두라고 했더니 가문의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는 계속 아들로 살겠다고 하더군. 그게 자기를 입양한 조건이지 않냐며, 아들 행세에 적응한 자기 입장도 생각해 달라며.”

“그래서 표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으셨군요…….”

페르시스는 진심을 털어놓았다.

“가문의 힘과 상관없이 딸로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렇게 강고하게 나오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5년이나 아들 행세를 했으니 시간이 필요한 걸 수도 있겠지요. 지금은 거절했어도 마음 한편엔 원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곧 그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안 남았고, 이대로는 아들로만 살다가 떠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다.”

“떠나지는 않으실 겁니다.”

자신과의 추억도 많으니 적어도 플로티나를 떠나는 일은 없겠지.

플로아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페르시스는 손수건을 애착하듯 꼭 붙잡았다.

***

이틀 후, 나는 클럽 나인의 정식 회원이 되어 나인에 입성하게 되었다.

제드는 디아고에게 명을 받아 내게 나인을 소개해 주기로 했고, 덕분에 난 그와 단둘이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나인을 관리하는 고용인들은 주중에만 출근해. 나인 회원들의 정규 모임은 매주 주말이고, 각자 침실이 있어서 자고 갈 수 있어. 주중에도 마음대로 나인에서 묵고 가도 돼.”

“웅.”

나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쩜 저리 잘생겼을까.

비늘 사건으로 그에게 서운했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얼굴만 봐도 기분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더니. 나한텐 제드인가 보다.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2층 오른편 제일 끝 방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방문을 열었다.

“여기가 네가 사용할 침실.”

내 침실은 문을 열자마자 창문이 보이는 구조였다. 창문엔 체크무늬 상아색 커튼이 달려 있었고, 그 아랜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안쪽엔 싱글 침대와 스탠딩 램프가, 그 반대편엔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침대 옆, 설렁줄을 흔들어. 하인이 올 거야.”

“응, 고마워.”

“가 볼게.”

기분 탓인지 제드는 내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단순히 기분 탓인지, 내가 느끼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저기, 제드.”

가려던 제드를 불러 세웠다. 그가 나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전에 아이리스 님 파티에서……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랬었지.”

나는 쑥스러워져 시선을 떨군 채 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지금도 같은 마음인 거지?”

“…….”

그의 대답은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대답해 주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괜히 물었나 싶어 후회스러웠다.

“갑자기 엉뚱한 소릴 해서 미안. 대답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디아고 때문에.”

“……어?”

“디아고가 너한테 흥미를 갖길래 나인에 오도록 그를 도왔던 거야. 친해지고 싶다고 하면, 올 것 같았거든.”

“아…….”

그러니까 제드의 말은, 나와 친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거지? 그저 디아고를 도왔을 뿐, 진심이 아니었던 거구나.

하긴, 원작에서도 제드는 선을 지키되, 디아고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와 친해지고 싶은 줄로 착각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가 다시 내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건, 너 아닐까.”

예상치도 못한 돌직구에 놀라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짝사랑 경력이 꽤 있는 편이지만 이런 돌직구는 처음 받아 봤다.

이건 무슨 뜻이지……?

혹시 처음엔 아니었지만 날 보다 보니 친해지고 싶어진 건가? 어쩔 수 없는 짝사랑의 힘으로, 내 사고회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 떠볼 이유가 없지!

나는 내가 먼저 호감을 드러내면 우린 더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많이 티 났어……?”

내 입술이 수줍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리고 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긍정했다.

“네 말이 맞아. 난 너랑 친해지고 싶어.”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 친해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워졌다.

“그래서 네가 먼저 나와 친해지고 싶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뻤어.”

설령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괜찮다. 그 말 덕에 나인에 들어와, 제드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

하지만 제드는 내 진심이 무색해질 만큼 반응이 없었다.

***

메이는 모르겠지만, 제드는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자신의 예상이 완벽히 빗나가서.

돌직구를 던지면, 당황해하며 아니라고 부정할 줄로만 알았다.

메이가 당황해하길 바랐다. 디아고 때문이었다는 진실은, 우리가 친해질 리 없다는 단언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메이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이없게도, 기회를 잡은 것마냥 덧없이 순수하고 무구하게 진심을 전했다.

그 사실이 참으로 언짢았다.

메이는 두 손을 모으곤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친해지자, 제드!”

이 삭막하고 우중충한 나인에서, 따사로운 햇살처럼 웃는 건 그녀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실 또한 제드를 기분 나쁘게 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상황에 걸맞은, 가식적인 대답을 토해 냈다.

“……그래, 메이.”

메이를 그녀의 침실로 보내고, 나인 회원들이 있을 메인룸으로 향하는 길. 메이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메인룸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소파에 나란히 앉은 나인 회원들도 메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나인에 가입하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요.”

“분명 저희에게 복수하려고 가입한 걸 겁니다.”

디아고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비르타와 갈리의 말을 들었다.

“복수하겠다고 나인에 들어오는 것보다 멍청한 선택이 있을까.”

“하지만 황자님. 플로티나 공자의 표정에 각오가 있었습니다요.”

비르타는 근심 어린 낯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러다가 수호 기사가 될 수 없게끔 저희의 앞길을 막는 건 아닌지…….”

비르타 옆에 앉아 있던 갈리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황자님께선 플로티나 공자를 왜 경계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희야 공자 때문에 기사 선출 경쟁률이 높아져서 그렇다 쳐도, 황자님께선 경쟁률이 어떻든 상관없지 않으십니까.”

돌아온 답변은 단순했다.

“수호 기사가 되려고 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갈리와 비르타는 고작 그런 이유로? 라는 눈으로 디아고를 쳐다보다가도 자신들도 별반 다를 거 없다는 걸 깨닫고는 시선을 거뒀다.

클로빈은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며 짜증을 냈다.

“영애한테서 일주일째 답신이 안 와……. 그저께 편지 한 통 더 보냈는데 설마 안 본 건 아니겠지……? 이게 다 망할 플로티나 공자 때문이야.”

클로빈은 수호 기사가 되는 것보다 사랑이 우선이었다.

그는 메이가 수호 기사 선출 경쟁률을 높였다는 사실보다 메이가 스텔라와 사귄다는 착각에서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앞으로 플로티나 공자를 어떻게 할 계획이십니까?”

“오늘 아침에 아카 대회 안내장이 왔어. 메이 플로티나는 분명 대회에 참가하겠지. 거기서 그를 방해할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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