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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5)화 (55/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5화

나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창밖 풍경은 그림자로 뒤덮인 것처럼 캄캄했다.

“잘한 걸까…….”

메이는 손으로 턱을 괴곤 중얼거렸다.

“나인에 가입한 거, 잘한 걸까.”

괜한 오기로 예정에도 없던 나인 회원이 되어 버렸다.

메이가 나인에 가입하겠다고 할 당시 디아고는 퍽 만족스러워했었다. 그 표정에 선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서 나쁜 속내가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오기 때문에 가입을 밀어붙이고 말았다.

“알면서도 호랑이굴에 찾아간 토끼가 된 기분이네.”

뭐, 그래도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이 있으니까.

“이왕 가입한 거, 사과를 받아내자.”

다시는 나를 무시할 수 없게 해 주자!

다짐하는 사이, 메이가 탄 마차는 플로티나가에 도착했다. 외출 후 밤늦게 돌아오는 건 흔치 않았기에 집사의 표정엔 근심이 가득했다.

“늦게 다니시면 주인님께서 걱정하십니다. 밤에 얼마나 흉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요.”

메이는 페르시스가 걱정한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었으나 이 세계에서 밤에 다니는 건 확실히 위험한 일이었다.

“죄송해요. 다음부턴 일찍 다닐게요.”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빠가요?”

페르시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외출한 메이를 기다린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 늦은 시각에 와서 그런가……. 하지만 내가 늦게 다니든 말든 신경 쓸 사람 아니면서.

“네. 따라오시지요.”

메이는 집사를 따라갔다. 페르시스를 볼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는 걸까. 분명 좋은 소리는 아닐 듯했다. 애초에 좋은 소리 하려고 부른 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서재로 가서 만난 그는 화내거나 잔소리를 하진 않았다.

“나인에 초대받아 방문했다고 들었다. 나인에 가입할 생각이니?”

말투도 평소와는 달리 부드러웠다. 그의 말투가 이리도 부드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부드럽다고 해서 엘렌, 조안, 요한만큼이나 부드러운 건 아니지만.

“오늘…… 가입하겠다고 말하고 나왔어요.”

“그랬군.”

그게 끝? 무언가 잔소리라도 하거나 설교 같은 거라도 할 줄 알았으나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이상했다.

페르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디프 부인에게 사흘 뒤에 있을 수업은 쉬겠다고 미리 서신을 보내 놨다.”

“어째서요?”

“그날 너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니 메이는 떨떠름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사흘 뒤면 페르시스의 생일 아닌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가 미워서 그의 생일도 챙겨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생일을 챙겨 줄 수 있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한 번쯤은 그에게 선물을 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그는 내 아빠이고, 나를 죽지 않게 해 주고, 이 호화로운 저택에서 풍족하게 살게끔 해 줬으니까.

이건 그에 대한 보답인 셈이지.

“혹시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그 말에 무표정을 유지하던 페르시스의 눈이 놀라 커졌다. 생일 선물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놀란 것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스는 이내 시선을 떨궜다.

“됐다. 선물 같은 건 주지 않아도 돼.”

스스로도 자식한테서 선물을 받을 입장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걸 바라고 한 말도 아니었고. 메이는 아직 성년도 안 된 나이였으니 그런 걸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페르시스의 그런 바람과는 달리, 메이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다.

‘선물 갖고 싶지만 자기 입으로 갖고 싶다고 말하기엔 품위 없어 보이니 내가 알아서 잘 준비해라, 이건가?’

메이는 무엇이든 간에 선물을 꼭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사흘 후, 페르시스의 생일이 되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보며 외출 준비를 했다.

선물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도 페르시스의 생일을 챙겨 주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5년 동안 이 집에서 살면서 그의 생일을 챙겨 준 적이 없었다. 이렇다 할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했기도 했지만 페르시스의 탓도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변명할 수는 있다. 워낙 내게 얼굴을 비추지 않고 나와 자주 만나 주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페르시스는 나름 매년 내구성 좋은 검이라든지, 튼실한 말이라든지 생일 선물을 줬었는데.

어쩌면 나도 무심하긴 했던 걸지도.

때마침 환복을 도와주며 내 셔츠 옷깃을 바로 세워 주던 엘렌이 손을 뗐다.

“도련님, 다 되었어요.”

“고마워, 엘렌.”

“주인님과 몇 년 만에 외출하시는 거죠? 앞으로도 자주 함께 외출하셨으면 좋겠어요.”

엘렌은 여전히 나와 페르시스가 친해지길 바라는 듯 보였다.

“아빠가 바빠서 아마 자주 외출하진 못할 거야.”

“그래도요. 제 바람이에요.”

응원이라도 해 주듯 마지막으로 내 옷매무시를 확인하는 엘렌의 뒤로, 밖에 있던 조안이 문을 두드린 후 들어왔다.

“도련님, 이제 마차로 가시면 될 것 같아요.”

“응.”

까먹지 않도록 엘렌이 내 손에 선물을 쥐여 주었다.

“잘 다녀오세요. 선물 꼭 주시고요.”

“응. 다녀올게, 엘렌, 조안.”

나는 손수 포장한 선물을 갖고 방 밖으로 나갔다.

안뜰엔 외출 준비를 마친 페르시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 주로 입는 무채색의 옷들과 달리 오늘은 인디핑크색 베스트를 입었다. 생일이어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다.”

“생신 축하드려요.”

페르시스는 옅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고맙다.”

그의 미소를 살면서 처음 보다시피 한 나는 놀라서 수 초간 멈춰 있었다. 미소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던가? 실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페르시스가 아니라 페르시스로 변장한 다른 이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가면서 물었다.

“오늘, 어디 갈 거예요?”

“가 보면 알 거다.”

“……?”

목적지가 어딘지 궁금했지만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 더는 묻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

메이와 페르시스가 타고 간 마차는 기차역에 당도했다. 메이는 마차에서 내리곤 페르시스에게 물었다.

“여긴 기차역이잖아요. 저희, 기차 타요?”

“5년 전이었나. 네가 기차 여행을 가고 싶다고 졸랐었지. 왜 가고 싶어 했는지 알아보고자 왔다.”

알아보고자……? 메이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이제 와서 5년이나 된 일에 관심을 갖는 거지?’

그래도 기차를 타는 건 좋으니 군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페르시스는 비싼 일등칸 전체를 빌려 자신과 메이,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이등칸만 타 봤던 메이는 일등칸에 들어가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일등칸은 이렇게 꾸며져 있구나?”

중앙에 길게 깔린 레드카펫을 밟으며 일등칸을 구경했다. 고급진 소파와 테이블, 그 위에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다. 내부가 레드 앤 화이트로 꾸며져 있어서 깔끔하면서도 세련되어 보였다.

일등칸도 이등칸과 마찬가지로 창이 널찍하게 뚫려 있어서 바깥을 구경하기 좋았다.

‘그때 플로아가 일등석에 타자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네. 뭐, 이등석도 좋았지만.’

메이는 좌석 안쪽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소파가 엄청 푹신해서 장시간 타도 허리랑 엉덩이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페르시스는 메이의 앞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기차가 출발할 무렵, 승무원들이 트레이에 각종 음식을 담아와 테이블 위에 차렸다.

평민이라면 꿈도 꿔 보지 못할 값비싼 음식들이 메이의 눈앞에 나열되었다. 5년 전, 사기꾼이 그녀를 노예경매장으로 데려간 그날, 페르시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평생 못 먹었을 음식들이.

메이는 그렇게 생각하니 서글퍼졌으나 내색하지 않고 페르시스를 따라서 식사했다.

그러다 갖고 온 선물이 생각나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빠, 드릴 게 있어요.”

식사하던 페르시스가 메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가 외출하자고 했던 날 밤, 메이는 무얼 선물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손수건을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바로 엘렌과 함께 손수건을 구입해 직접 손수건이 든 상자를 포장지로 감싸고, 리본을 묶어 포장하기도 했었다.

메이가 선물을 건네자 페르시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포장을 풀어 상자를 열어 보니 베이지색 체크무늬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아들이 되기로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빠가 땀 닦으라고 손수건을 줬었어요. 땀 닦고 다시 돌려 드렸더니만 아빠가 바로 유디프 경한테 버리라고 명한 거 알아요? 그래서 버릴 바엔 제가 갖겠다고 했었어요. 지금도 그 손수건, 갖고 있고요.”

메이는 바지 주머니에서 그때 받은 손수건을 꺼내 보여 주었다.

“제가 아빠 거 하나 가져갔으니까 손수건을 골랐어요. 물론 아빠는 손수건을 자주 버리시겠지만…… 이건 선물이니까 웬만하면 버리지 마세요.”

이번에도 땀 닦고 바로 버리면 아빠는 사람 성의 무시하는 나쁜 사람이에요.

페르시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꼭 간직하마.”

메이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네. 하긴 친구가 하인드밖에 없으니까……. 가까운 사람한테 받는 선물이 소중할 만도…….’

그리 생각하니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뿐. 그를 위해 그녀가 앞으로 무언갈 할 생각은 없었다.

페르시스는 하염없이 메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인드가 해 준 충고를 곱씹고는 입을 열었다.

“메이.”

그 부름에 메이가 입안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곤 그와 눈을 마주했다.

페르시스는 어렵게 결심한 말을 내뱉었다.

“이제 아들로 사는 거, 그만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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