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4)화 (54/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4화

불행하게도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직도 가문의 힘이 발현되지 않았으니 나는 그의 친딸이 아닐 것이고, 그렇기에 페르시스와 약속한 대로 아들로 살아가야 하며, 그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된다.

그의 말이 맞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많죠.”

나를 비웃던 디아고의 입매가 일자에 가까워졌다.

“뭘 할 수 있는데?”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냐는 음성은 내 심기를 건드렸다.

“……우선.”

이것은 아니꼬운 기분에 의한 오기다. 꼭 사과를 받아 내겠다는 오기.

“나인에 가입하겠습니다.”

***

메이가 나인에서 회원들의 술주정을 듣고 있을 시각에, 페르시스는 하인드가 있는 엘람에 있었다.

엘람은 쿠투스 상단 마물 수급과 직결되는 초원. 가끔은 제2수호기사단이 마물 사냥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쿠투스 상단과 계약한 페르시스는 그 초원에서 마물을 사냥 중이었다.

굳이 손을 대지 않고 마물과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육신에서 흘러나온 붉은 마력이 마물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털썩, 털썩, 툭.

마물은 초당 한 마리씩 죽어 나갔다. 1분이면 60마리였고, 1시간이면 3600마리였다.

물론, 마력을 크게 끌어모아 공격하면 수 초 만에도 몇백 마리는 거뜬하게 죽일 수 있으나 그는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페르시스는 잔잔한 짜증에 휩싸여 있었고, 잔잔하게 짜증을 분출했다.

이는 그가 마물을 굳이 한 마리씩 죽이는 이유였다.

그러다 A급 마물, A라이온을 마주하게 되었다.

A라이온은 키가 3m나 되는 사자로, 눈초리에 A 표시가 있는 게 특징이다.

페르시스의 육신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광선처럼 쏟아져 A라이온의 몸을 군데군데 관통시켰다.

심장은 상단에 팔아야 하니 심장만큼은 건드리지 않고.

쿵―!

A라이온은 신음을 낼 겨를도 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페르시스는 A라이온의 사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가까이서 A라이온의 몸을 해부했다.

찌이익― 촤아악―

피가 뿜어져 나와 그의 팔을 흠뻑 적셨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A라이온의 심장을 꺼내는 데에 집중했다.

때마침 그 주변을 지나가던 하인드가 페르시스를 발견했다.

“페르시스!”

제2기사단 소속인 하인드도 마침 이곳에서 사냥 중이었다.

페르시스는 하인드의 부름에도 반응 하나 하지 않았다. 심장만 꺼낼 뿐이었다.

수박보다 큰 심장이 사체 밖으로 나왔다. 바닥에 툭, 내던지니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바로 앞에 던져진 심장을 본 하인드는 놀라서 움찔했다.

“노, 놀랐잖아……!”

그리고 A라이온의 꼴을 보고선 입을 떡 벌렸다.

A라이온의 사체 군데군데가 뚫려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으며, 가슴은 끔찍하게 해부되어 있었다. 페르시스의 팔에선 검붉은 마물의 피가 뚝뚝 흘렀다.

하인드가 페르시스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너……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무리 마물 사냥이라고 해도 이렇게 잔인하게 사냥할 필요는 없잖아.”

“…….”

페르시스는 자신이 기분 나쁜 이유가 무엇인지 찾다가 얼마 전 그의 호위기사, 요한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그는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잠깐 머리를 환기시킬 겸 창밖을 봤다가 연무장에서 단련하는 메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페르시스는 종종 그곳에서 그렇게 메이를 바라봤었다.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면 항상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요한은 그가 일부러 메이에게 정을 주지 않는 것임을 진작에 알아차렸었다.

그래서 요한은 페르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께서 출가하신다면 굉장히 슬플 것 같아요. 주인님도 같은 마음이시죠?’

요한은 일부러 그의 심기를 건드렸었다. 그래야만 그가 깨우칠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지? 출가라니. 저 아이가 갈 곳이 어디 있다고.’

‘성인이 되면 부모의 지붕을 떠나 스스로 갈 곳을 만드는 게 자식이죠. 도련님께선 성인이 되기까지 세 달도 안 남으셨고요.’

‘내가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그런 걱정 할 필요 없다.’

‘계속 이곳에 계셨으면 좋겠지만…… 글쎄요. 저도 학문을 공부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어기고 주인님의 기사가 되었는걸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그러니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메이를 붙잡아라. 처음부터 그 아이가 좋아서 키우기로 한 것이지 않으냐.

요한은 그런 식으로 페르시스에게 얘기했었다.

그러나 이상한 자존심 때문인지 페르시스는 메이에게 제대로 다가가지도, 대화를 걸지도 못했다.

그는 그런 자신에게 짜증이 치밀었지만 맨날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내가 들어 줄 테니까 말을 해. 피 안 묻히고 깔끔히 사냥할 수 있으면서도 이러는 거,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

하인드는 페르시스의 오랜 친우라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페르시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메이. 그 아이랑 어떻게 해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주 웃긴 일이지만 이제 와서 그녀의 진로를 들어 보고 함께 미래를 계획하는 다정한 아빠 노릇이 하고 싶어졌다.

그게 메이의 출가를 막기 위해서라는 걸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아 기분이 더럽기도 했다.

하인드는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워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남장부터 그만두게 해야 하지 않을까.”

네 욕심과 자존심 때문에 5년간 밀어붙였던 아들이란 역할.

“애가 너를 얼마나 원망하겠어. 또래 여자애들처럼 살고 싶을 텐데.”

“…….”

“그만두게 할 때도 됐잖아. 정말로 그 아이를 평생 남자로 살게 해서 가문을 물려줄 것도 아니고, 네 핏줄이 아닌 것 같아서 싫은 것도 아니고. 그랬으면 애초에 입양도 하지 않았겠지.”

페르시스는 그의 말이 전부 맞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벌써 5년이나 지났어. 그까짓 자존심, 버리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생각해. 지금이라도 메이랑 깊은 대화를 나눠 봐. 참, 곧 있으면 네 생일이지 않아? 생일에 메이랑 바람 쐬러 나갔다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남장하는 거, 그만하게 하고.”

하인드는 페르시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힘내. 난 초원 입구 쪽에서 사냥할게. 너무 잔인하게 죽이진 말고.”

하인드는 페르시스에게 조언을 해 주곤 자리를 떠났다.

몇 시간 후, 날이 저물자 다들 슬슬 사냥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페르시스와 하인드가 함께 사냥을 마치고 엘람 초원 입구로 나오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스텔라 나제트. 그녀가 하인드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스텔라는 하인드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나올 때가 됐는데……. 어디 있지…….”

평소엔 스텔라가 제 아버지와 사이가 좋다 해도 사냥터에 데리러 가진 않았다. 언제 사냥이 끝날지 모르기도 하고, 사냥터가 집과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왜 데리러 왔는가.

전날 밤, 스텔라는 우연히 하인드가 우는 모습을 목격했다. 지금은 다 컸을, 어린 아들과 죽은 아내의 사진을 보며 우는 모습.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인드는 스텔라 모르게 제 아내와 아들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던 것이었다.

‘여태껏 내게 티 내지 않은 이유는, 내가 마음의 짐을 짊어지게 될까 봐 그런 거겠지.’

이를 깨달은 스텔라는 하인드를 혼자 둘 수 없었다. 그가 혼자 있을 때마다 죽은 아내와 잃어버린 아들을 생각하며 슬퍼할 거라 생각하니 절대로.

그래서 데리러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그리움에 젖어 남몰래 울지 않도록.

스텔라를 따라온 시녀 앤이 하인드를 가리켰다.

“어, 주인님 저기 계셔요!”

앤이 가리킨 곳을 보니 하인드가 페르시스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스텔라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힘차게 불렀다.

“아빠!”

하인드는 반가운 얼굴로 제 딸을 맞이했다.

“우리 딸!”

하인드도 스텔라에게 달려가 안아 주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왔어. 멀었을 텐데.”

“아빠가 보고 싶어서 왔지.”

스텔라는 하인드에게 미소하다가 페르시스를 보곤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페르시스에겐 뚱한 표정으로 대충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공작 각하.”

페르시스는 그녀에게서 메이부터 찾았다.

“……메이가 아침부터 어딜 가던데. 메이와 만나고 온 건가?”

“아뇨? 메이는 오늘 나인에 갔을걸요?”

“나인?”

스텔라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건가?

“아…… 네. 나인에 초대를 받은 걸로 압니다.”

나인에 초대받았다라. 페르시스는 혼자 중얼거렸다.

“왜 내게 얘기하지 않았지…….”

초대는 언제 받은 것이며, 어찌하여 초대에 응하기로 결심한 것이며, 가기 전에 왜 얘길 안 해 줬을까.

페르시스가 홀로 생각에 빠지든 말든, 스텔라는 하인드의 손을 잡았다.

“소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하인드에게 다시 웃어 보였다.

“아빠, 집에 가자!”

“어? 어…….”

하인드는 스텔라를 따라서 마차에 올랐다.

남겨진 페르시스는 하인드와 스텔라를 보며 침울하고도 착잡해졌다.

자신도 하인드와 그의 딸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힘든 걸까.

……남장부터 관두게 하라 했던가.

하인드는 메이와 가까워지기 위해선 우선 아들 행세를 그만두게 하라 했었다.

‘벌써 5년이나 지났어. 그까짓 자존심, 버리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생각해.’

그의 말이 맞다. 5년 동안 가문을 위해 무감정하게 살겠다는 둥,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둥, 흔들리지 않겠다는 둥 많은 여러 다짐을 해 왔지만, 결국엔 감정이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 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몰래 연무장에 찾아가 보기도 하고, 그 아이와 줄곧 함께하는 시녀 한 명과 하녀 한 명을 불러 그 아이에 관한 걸 묻기도 했다.

자신을 버린 나쁜 비체의 딸이라는 타이틀에 함부로 대했던 것이지 실상은 메이를 많이 좋아했다.

자식으로 평생 곁에 두고 싶을 만큼.

페르시스는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를 인정했다. 그리고, 저들처럼 다정한 부녀 사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생일에 함께 갈 곳을 알아봐야겠군.’

그는 하인드와 스텔라를 부러워하던 시선을 거두고 플로티나 마차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