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2화
“처음 뵙겠습니다, 공자님. 저는 클로빈 펜소라고 합니다.”
악수하니 클로빈이 온 힘을 다해 내 손을 꾹 눌렀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내뺐다.
얘는 왜 적대감을 드러낸대? 내가 손을 털며 클로빈을 이상하게 쳐다볼 때쯤, 제드가 입을 열었다.
“제드 블로체라고 합니다.”
그의 미성이 들려오자 고개가 휙 돌아갔다. 시야에 들어온 제드는 볼이 상기되어 있는 게, 취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패션 거리에서 만났을 때도 취해 있었지? 그때도 나인에서 술을 마신 건가?
술 자주 마시나?
마셔도 될 나이이긴 하다만 세 번의 만남 중에 무려 두 번씩이나 대낮부터 취해 있으니 근심스러웠다.
술은 몸에 해로운데…….
“메이 플로티나라고 합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제드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인사를 마친 우리는 반달 모양 소파에 앉았다. 디아고가 제일 중앙에, 그 양옆에 갈리와 비르타가 앉고, 갈리 옆엔 클로빈이, 비르타 옆엔 제드가 앉았다.
클로빈과 비르타 옆에 한 자리씩 남은 상태에서 나는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다가 사심을 품고 제드 옆에 앉았다.
디아고는 내게 술을 권했다.
“공자도 한잔 해. 켈레샤산 몰트 위스키야.”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미성년자라서요.”
“뭐, 어때. 미성년자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말대로 스타시아 제국에선 미성년자 음주를 제재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대한민국에서 살다 왔기에 내 가치관으로는 미성년자 때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래도 술은 성인이 된 후 마시려고 합니다.”
성인이 되기까지 대략 2개월 남았으니 2개월만 참을 생각이었다.
“보기보다 재미없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위스키를 마시며 취해 갔다.
취한 비르타는 술주정을 부렸다. 얼마나 마신 건지 혀가 꼬이기까지 했다.
“피그링 말임다. 고거 참 잡기 쉽지 않슴까……? 졔가 아이리스 님 생싄 파티에서 나섰다면……! 보란 듯이 그 돼지 새끼의 묶인 네 다리를! 풀러 버렸을 검뉘다…….”
갈리는 졸린 눈으로 실실 비웃었다.
“다리를 풀면 도망간다는 걸 모르는군.”
“아니지, 아니지……. 풀어도 못 도망가지……. 왜냐! 내가 바로 링을 부숴서 콱-! 쓰러트릴 거니까……!”
비르타는 자신의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풉, 도망가는데 어떻게 잡는다는 건가. 멍청하기는.”
“내 날쌘 달리기 실력으로……! 달려가면 된다니까……?”
비르타는 갈리를 상대하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졔가 공자님보다 피그링을 잘 잡슴다. 피그링은 일단 머리를 내리쳐서 기절시켜야 해여……. 그 후에 링을 한 방에 퐉-! 해 버리믄 됨다……!”
비르타가 링을 부수는 시늉을 하자 나는 일소했다.
“베루스 영식, 그렇게 피그링을 잘 잡으면 그때 나서지 그랬어. 그때 나 빼고 아무도 손 안 들지 않았나?”
“그거 졔가 공자님께 기회를 드린 검뉘다.”
“이상하네. 영식이 나한테 기회를 줄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술에 취한 와중에도 내 말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베루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였다.
툭. 내 어깨 위에 누군가의 머리가 떨어졌다. 내 팔뚝에서는 사내의 숨결이 느껴졌다.
“!”
제드 블로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것이었다.
순간 심장을 제외한 모든 곳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왜, 왜, 왜 기대는 거지……? 잠들었나?’
테이블을 보니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위스키병이 다 비어 있었다.
그새 얼마나 마신 거야…….
사심을 품고 그의 옆에 앉긴 했지만 이런 스킨십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불러 깨웠다.
“저…… 블로체 공자?”
그 부름에 제드가 눈을 뜨며 머리를 바로 세웠다.
“아…… 미안하군.”
“그만 마셔야 하지 않을까요? 저번엔 취해서 스텔라 어깨를 치고 가더니만…….”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디아고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스텔라라면 나제트 영애를 말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만…….”
“그대와 나제트 영애가 미래를 기약한 사이라는 말이 돌던데. 맞나?”
“미래요?”
미래를 기약한 사이라는 건 결혼할 사이를 의미했다.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스텔라와 그런 사이냐니. 나는 극구 부인했다.
“절대 그런 사이 아닙니다. 가장 친한 친우입니다.”
우리 둘 다 이성애자라고! 수년을 남자애로 살았다지만 성 정체성은 여전히 여자란 말이야.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으나 동시에 정신계 마법이 잘 먹히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되었다.
탁―!
그때였다. 클로빈 펜소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곧바로 내게 삿대질했다.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영애한테서 답장이 안 오잖아!!”
큰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애……?”
영애라니, 누구? 설마 스텔라?
“나제트 영애를 어떻게 꼬신 거야……!”
“아니,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그러면, 영애를 갖고 노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우리는 그냥 친구 사이-”
“키도 작고, 남자다운 매력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꼬셨냔 말입니다!!”
“…….”
어휴, 말이 안 통하네. 나는 클로빈과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비르타가 일어나서 클로빈을 진정시켰다.
“진정하세요. 분명 가문을 내세우며 꼬신 걸 겁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클로빈을 더욱 흥분시켰다.
“너, 죽고 싶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감히 나제트 영애를 속물로 만들어?!”
“아니, 그게 아니라-”
“당장 취소해. 나제트 영애는 그런 분이 아니셔!!”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무례한 사람들의 술주정이나 듣고 있네.
제드는 또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차차, 술을 그만 마시게 해야 했는데!
그를 깨우기 위해서 몸을 흔들려는 찰나, 그의 입술이 열렸다.
“기대게 해 줘.”
“……?”
“몸 가누기가 힘들어.”
아니,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막 기대? 얘는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나?
“그래도 좀…….”
“부탁이야.”
“……알겠어.”
그가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나. 어깨를 내어 주기로 했다.
다른 사람한텐 안 이랬으면 좋겠네.
그저 나라서 어깨를 부탁한 거라고 해 준다면 기쁠 것만 같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해졌다.
갈리와 비르타는 서로 자기 집안이 더 좋다며 티격태격하지, 클로빈은 나를 노려보지, 디아고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지, 그나마 가장 대화하고 싶었던 제드는 졸고 있지…….
아, 집 가고 싶다.
나는 내 어깨에 기대 잠든 제드를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끔 옮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왜, 더 있다 가지.”
그렇게 말하는 디아고의 머리를 콩!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다.
다른 이들 술주정이나 받아 주는 것 외에는 하는 게 없는데 뭘 더 있다 가냐.
“나중에 뵙겠습니다.”
내가 메인룸에서 나오니 어느새 스르륵 일어났는지, 제드도 나를 따라서 복도로 나왔다.
“가는 거야?”
제드 목소리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곤 뒤돌아봤다.
“네, 공자님.”
잠들어 있던 거 아니었나? 언제 깬 거지?
“말 편히 해. 제드라고 불러.”
“그럴게요, 아니, 그래.”
이름을 허락해 줄 줄 몰랐던 나는 조금 떨떠름했다.
제드는 내가 편한가? 그렇다기엔 우린 인사만 나눈 사이였다.
아니면 아무한테나 편하게 대하는 것일까. 이상하다. 원작 제드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원작에서 제드는 절대로 아무하고 스킨십 하지 않으며 오직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제드라고 불러 줘.”
“제드. 낮술 자주 해? 저번에도 취해 있었잖아.”
“자주 하진 않아. 피할 수 없을 때만.”
“안 마시겠다고 해도 되지 않아? 제드 정도면 황자님께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잖아.”
“할 수 있지. 그런데 오늘은 내가 술을 원했어.”
“아…… 그래?”
그의 몸이 내게 점점 가까워진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와 가까워지니 손끝이 저렸다. 긴장한 탓이었다.
제드는 내 코앞에 도달했다. 그의 손이 점차 올라가더니 내 목에서 멈췄다. 차가운 손가락이 내 목, 가장 민감한 부분에 닿았다.
“앗-”
“머리카락.”
능청스럽게 내 목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떼어 내 주었다.
“아……. 고마워.”
“나인에 들어올 생각 없어? 가입하면 자주 볼 수 있을 텐데.”
그 말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제드는 왜 나와 자주 보고 싶어 하는 걸까. 내가 마음에 들었나?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건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생긴 건 아닐 터였다. 제드는 내가 남자인 줄 알고 있을 테니까.
어찌 되었든, 제드를 좋아하는 나로선 내게 호감을 드러내는 태도가 싫을 리 없었다.
“가입…….”
가입하면 그의 말마따나 제드를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스텔라가 잘해 보라고 한 이상 잘해 보고 싶다.
하지만 문제는 디아고다. 지금이야 손님이니 술을 강요하진 않는다고 해도, 가입한 후엔 강요할지도 모른다.
나인 회원이라는 이유로 내게 귀찮은 일들이 많이 생길지도 모른다.
“가입은 좀 더 생각해 볼게.”
“……그래.”
제드는 어딘가 아쉬운 표정을 하더니, 나를 배웅하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일이 터진 건 정확히 4시간 뒤였다. 해가 기운 오후 5시. 나인에서 집에 돌아와, 저녁 먹기 전 잠깐 소설책을 읽을 시각에 집사가 나를 찾아왔다.
“2황자 전하께서 도련님을 뵙고자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