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0화
“보기엔 이래도 꽤 부끄럼이 많아. 그대를 나인에 초대하는 것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어.”
“…….”
“내 용기를 봐서라도 초대에 응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난 그저 순수하게, 공자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건데.”
순수? 이보다 웃길 수 없었다.
거절하면 나쁜 사람으로 몰겠다는 속내가 보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냥 나쁜 사람 하지, 뭐. 클럽 나인과 엮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끝까지 거절을 밀어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나도 공자와 친해지고 싶어.”
제드 블로체의 등장으로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말이 제드의 입에서 나왔다. 겨우 한 번 마주친 걸로 꿈에서 키스까지 할 뻔한 그 제드 블로체가!
“나인에 와. 플로티나 공자.”
몸이 경직된 게 느껴진다. 긴장돼서 삐거덕, 삐거덕. 어떤 반응을 취해도 이상했다.
“그, 그게…….”
디아고한테는 잘만 했던 거절이 제드한테는 하기 힘들다. 머릿속이 잡생각으로 가득 찬다.
제드 블로체가 내 존재를 알고 있었어? 아니, 그것보다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
왜, 왜지?
떨림은 얼떨떨함 뒤에 찾아왔다.
그가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다니. 나랑 친해지고 싶다니.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그에게 마음을 뺏긴 걸 모두가 알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를 좋아하는 마음과 나인과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별개로 존재했다.
나는 겨우 이성을 다 잡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빈말이 아니야. 친해지고 싶어.”
그러니까 거절하지 마.
“…….”
제드 블로체는 내가 더 거절할 수 없게 쐐기를 박아 버렸다.
그 때문에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그만 승낙해 버렸다.
“……알겠습니다. 초대해 주신다면 참석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와야지, 공자. 내가 섭섭할 뻔했어.”
디아고는 예상했다는 것마냥 일소했다.
“주말에 플로티나가로 마차를 보내도록 하지. 그 마차를 타고 와. 아, 참. 나인엔 호위 기사나 시종을 들일 수 없으니까 혼자 오도록 해.”
호위 기사나 시종을 들일 수 없다는 말이 꼭 나인에서 허튼짓을 하겠다는 말로 들리는 건 기분 탓이길 바랐다.
“그럼, 주말에 보지.”
디아고가 내게 등을 돌리곤 그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제드도 따라서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뭉갰다.
나인에 간다고 하다니……. 미친 게 분명하다. 제드가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제드는 정말로 나와 친해지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친해져도 되나……?
“그래도…… 될까.”
플로아가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답해 주었다.
“갔다 오셔도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주인님께선 바쁘셔서 메이 님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고, 사교계에 일찍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플로아는 나인이 어떤지 모르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그렇군요.”
사실 나는 페르시스는 일절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대신, 스텔라가 신경 쓰였다.
이래도 되는 걸까.
내가 제드에게 마음이 없으면 모를까, 마음이 있는 상태로 나인에 다녀온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스텔라한테 불쾌하게 느껴질까 봐.
그렇지 않아도 난 이미 스텔라의 아빠가 될 사람을 뺏은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남주인공까지…….
나 이제 어떡해야 좋을까.
***
그날 밤, 나제트가. 스텔라는 시녀인 앤에게서 네일을 받고 있었다.
앤은 네일을 해 주며, 아가씨가 심심하지 않도록 스텔라가 받은 수많은 구애 편지를 언급했다.
“아가씨, 오늘도 구애 편지가 왔어요.”
“또? 세상에 귀족이 그렇게 많아?”
“귀족이 많은 게 아니라 아가씨를 연모하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그게 그거지.”
“그런데 아가씨. 매일같이 구애가 끊이지 않은데 마음에 드는 분이 한 명도 없으신가요?”
스텔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없어.”
“오늘 편지를 보낸 펜소 공자님도요?”
“펜소? 펜소 공자도 구애했어?”
“또또 편지 안 읽고 버리신 거죠? 오늘 온 편지는 클로빈 펜소 공자님께서 보내신 거예요.”
스텔라는 더러운 거라도 본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극혐이야.”
“극……혐? 그게 뭐죠?”
앤이 몰라서 물었으나 스텔라는 클로빈이 자신한테 구애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사로잡혀 듣지 못했다.
“펜소가에서 나한테 편지를 왜 보내? 기분 더러워.”
“예……?”
스텔라가 진심으로 기분 나빠하자 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펜소 공자님이 싫으신 건가요?”
“엄청 극혐이야.”
‘극혐……? 싫다는 뜻인가?’
앤은 한 번 더 되묻는 대신 스스로 깨우쳤다.
“어째서요? 성격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고…… 외모도 꽤 출중하신데다 가문에서 조선업을 하고 있어서 돈이 많잖아요.”
아, 물론 나제트가에 비하면 많은 편은 아니지만요.
앤의 말을 들은 스텔라는 조곤조곤 화냈다.
“앤…… 너는 내 얼굴을 보고도 클로빈 펜소의 외모가 출중하다는 소리가 나와? 나에 비하면 오징어 아니야?”
“아니, 뭐…… 당연히 아가씨에 비하면 외모가 출중한 편은 아니긴 한데요……. 아가씨 정도의 외모를 가진 사람이 어디 흔한가요. 흔하지 않으니까 펜소 공자님 정도면 출중하다 하는 거죠.”
“있잖아, 앤. 나는-!”
원작에 의하면 자신은 클로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멋진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걸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면 골치 아파지는 걸 알아서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오, 답답해.”
“왜요?”
스텔라는 어리숙한 앤을 째려봤다.
“……듬직한 남자가 취향이라고. 그러니까 내 앞에서 펜소가의 펜 자도 꺼내지 마.”
“알겠어요……. 화내지 마세요.”
“화낸 거 아냐.”
화낸 건 아니라고 했지만 화가 나긴 했다. 그리고 스텔라가 화가 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펜소 백작에겐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다.
첫째인 아들이 클로빈 펜소. 스텔라에게 구애 편지를 보낸 당사자다. 그는 나인 회원으로, 나인 회원 중에서도 가장 질이 안 좋기로 유명했다.
‘소문이 안 좋은 데에는 대부분 이유가 있지.’
그리고 딸은…….
‘원작에서 메이를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때려죽인 미친년이고.’
“펜소가에서 편지가 오면 나한테 전달하지 말고 바로 불태워 버려.”
“예……? 불태우기까지 해요?”
“응. 꼭 불태워 버려.”
앤은 스텔라가 왜 그러나 싶었지만 명령이니 묻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가씨, 네일 다 됐어요.”
“어머, 예쁘다.”
스텔라는 예쁘게 손질된 자신의 붉은 손톱을 보며 흐뭇해했다.
“완전히 마르려면 더 있어야 하니까 조심하세요.”
“응, 알겠어.”
앤이 밖으로 나가자 스텔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대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는 손톱을 후후 말리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예쁜 척을 했다.
“나 원 참. 날 때부터 사랑스럽다는 설정이라지만 너무 예쁜 거 아닌가?”
흠흠- 스텔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혼잣말을 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녀가 “역시 나지?”라고 말할 때쯤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플로티나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메이가 왔다고?”
메이가 이 시간에?
밤 9시에 다다른 시각. 아무리 친구라고 하더라도 방문하기엔 늦은 시각이었다.
“뭔 일 생겼나?”
스텔라는 서둘러 메이를 만날 준비를 했다
***
가만히 앉아서 스텔라를 기다리고 있으니 응접실 문이 열리고 스텔라가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이야? 밤에 온 적은 없었잖아.”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할 얘기?”
“오늘…… 아이리스 님의 생신 파티에 갔다가 2황자를 만났어.”
“2황자? 그 망나니?”
“응. 나한테 주말에 나인에 오라고 하더라고.”
“뭐? 그 미친 자가?”
스텔라 또한 원작을 읽어서 2황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황자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듯했다.
나는 내 감정을 숨기며 차분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그…… 나인에 제드 블로체도 온다는데, 내가 다리 놔줄까?”
“다리? 갑자기?”
“둘이 만날 자리를 만들어 볼게.”
“네가 왜?”
스텔라는 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며 물었으나, 나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답했다.
“그야, 너랑 제드 블로체는 원작 여주, 남주니까.”
그 목소리에는 어떤 고저도 없었다. 마치 연극에서 내가 맡은 역할의 대사를 읊는 것처럼. 사적인 감정은 담겨 있지 않다는 듯이.
“어차피 나중에 서로 사랑하게 될 사이잖아. 늦게 만나서 뭐 해. 빨리 만날 수 있으면 빨리 만나는 게 낫지.”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내가 전개를 바꾼 탓에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
스텔라는 내 말에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남의 사랑을 왜 이렇게까지 챙겨 주냐는 듯이.
“…….”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너 설마…….”
“……?”
“너 혹시 제드 블로체 좋아해?”
“어……?”
나는 몹시 당황하여 눈동자를 떨었다.
내 계획은, 스텔라와 제드가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며 깔끔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접는 거였다.
이전 생에서도 나는 짝사랑을 수차례 경험해 봤었다. 그 결과 깨달은 건, 마음을 접는 데엔 상대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는 게 제일 효과적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이왕 나인에 가는 거, 제드와 스텔라가 만날 수 있게끔 자리를 주선하려 했던 건데…….
얘는 어떻게 눈치챈 거지?
제드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다리를 놔주겠다고 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는 걸 조금도 티 내지 않았는데 스텔라는 어떻게 눈치챈 걸까.
“……아니야.”
“정말로 아니야?”
내 눈을 주시하는 그녀는 이미 내 마음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정말로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막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