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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8)화 (48/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8화

한편, 테라스로 나간 아이리스는 키가 30m 가까이 되는 덩치 큰 피그링을 볼 수 있었다.

뽀얀 분홍색 피부에 갈색 점이 커다랗게 있는 피그링. 그 피그링은 목과 네 다리가 보라색 리본으로 묶여 있어서 좀처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피그링의 목 부근을 보니 리본 사이에 편지 하나가 껴 있었다.

아이리스는 은색 기운을 발휘해 편지를 꺼내 와서 읽었다.

[생일 선물. 놀랄 모습을 못 보는 게 아쉽네. 헤스티아가.]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다시 피그링을 보았다.

“확실히, 놀랄 만한 사이즈긴 하네. 보통 피그링은 이렇게 크지 않으니까.”

평균적으로 피그링의 몸집은 일반 돼지의 1.5배 정도다. 커 봤자 사람 키만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 앞에 있는 피그링은 키가 30m에 육박하니 놀랄 만한 사이즈이긴 했다.

“도축하면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나올까. 한 천근? 세 기사단 다 모여서 한 달 동안 매일 고기 파티 해도 남겠는데?”

피그링은 제 앞의 수호신이 얼마나 섬뜩한 말을 하는지도 모른 체 가만히 코만 킁킁거렸다.

아이리스는 피그링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연회장 안을 향해 뒤를 돌았다. 모두들 피그링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혹시 여기에 저 피그링을 쓰러트려 볼 사람 있나? 수호 기사들은 손쉽게 쓰러트릴 테니 제외하고 마력이 없는 자에 한해서.”

테라스 근처에 있던 한 하객이 피그링을 가리키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저 피그링을요……?”

“걱정 마.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바로 구해 줄 테니까. 만일 내 도움 없이 쓰러트린다면 기사 선출을 고려해 볼게.”

몇몇은 입술을 벙긋거리는 게, 도전해 보려고 하는 듯하다가도 막상 쓰러트리려니 피그링이 너무 거대해서 용기가 나지 않는 듯 보였다.

리본으로 다리를 묶어 놔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일단 피그링은 마물이니까.

다들 엄두를 낼 수 없었고, 이는 수호 기사가 꼭 되고자 하는 비르타와 갈리도 마찬가지였다.

“저 거대한 걸 어떻게 죽여…….”

“괜히 나섰다간 못 죽여서 망신만 당할 게 뻔하다.”

다들 주저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손을 번쩍 드는 사람이 있었다.

“저요! 제가 쓰러트릴래요!”

그건 바로 메이였다. 메이는 큰 소리로 말하는 동시에,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좋아, 메이가 해 볼까?”

“네!”

메이가 아이리스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찰나, 플로아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메이 님, 정말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상대는 마물인데?

메이는 당차게 대답했다.

“네. 꼭 쓰러트릴 거예요.”

그 시각, 클로빈은 제드를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제드는 고개를 끄덕이곤 디아고의 곁으로 갔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늦었네. 아이리스에게 선물 줘야지.”

“이미 가문에서 보냈습니다.”

“빠르군.”

디아고는 샴페인 잔을 든 채로 누군가를 주시했다.

“너, 저 애가 누군지 알아?”

디아고가 가리킨 누군가는, 손을 번쩍 들고선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는 소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년이 아니라 소녀였다.

“플로티나 공작가의 후계자일 겁니다.”

“맞아. 플로티나의 후계자. 재밌어 보이지 않나?”

“……무엇이 말입니까.”

“수호신의 호의를 받고 있다는 게.”

갈리는 제드에게 메이가 수호신과 두터운 친분이 있다는 것, 올해 기사단 선출 때 미성년자를 뽑겠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메이가 아직은 미성년자라는 것도.

디아고가 말했다.

“플로티나 공자는 가문의 힘 때문에 굳이 수호 기사가 될 필요가 없는데 말야.”

“……그렇습니까.”

제드는 디아고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게 좋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건, 장난감에 관심을 갖는 것과 같으니까.

물론 제드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 시간 이후로, 플로티나의 후계자가 가문의 힘을 못 쓴다는 소문이 돌 거야.”

클로빈이 비소하며 동의했다.

“플로티나 공작과 전혀 닮지 않으니까 그런 소문이 돌만 하죠.”

메이 플로티나가 페르시스 플로티나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닮지도 않았을뿐더러, 저렇게까지 단장들에게 잘 보이려는 걸 보면 답은 하나지.”

메이 플로티나가 페르시스 플로티나의 친아들이 아니라서 가문의 힘을 못 쓰니 수호 기사가 되려고 한다. 답은 이것뿐.

“아주 재밌어.”

디아고는 플로티나 가문 후계자의 작은 체구를 보고 피식 웃으며 오른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플로아가 어깨를 놓아주자 나는 아이리스가 서 있는 테라스로 걸어갔다. 모두가 내게 집중했지만 떨리지 않았다.

거대 피그링을 쓰러트리는 걸로 나를 어필해서 올해 꼭 수호 기사가 되어야 한다.

“꼬리뼈 위에 둥둥 떠 있는 링이 피그링의 심장이야. 링을 깨부수렴.”

“위험하면 우리가 구해 줄게.”

“네.”

나는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를 뒤로한 채 테라스 난간에서 뛰어내려 땅에 착지했다. 연회장이 1층이라서 착지는 쉬웠다.

“와…… 진짜 크다…….”

목이 뒤로 꺾여라 한참 올려다보니 피그링의 크기가 체감됐다.

당연한 소리지만, 연회장 안에서 창문 너머로 보는 것보다 바로 앞에서 올려다보는 게 훨씬 더 커 보였다. 자칫 밟히면 즉사할 듯했다.

하지만 피그링은 일반인도 무찌르는 마물이다. 그래서 겁먹진 않았다.

혹여 묶여 있는 리본이 풀려서 피그링이 움직이게 될 수도 있으니, 나는 얼른 쓰러트릴 생각으로 피그링의 뒤쪽으로 달려갔다.

뒤쪽으로 가니 링이 보였다. 링은 훌라후프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다.

이걸 깨부수면 되는 거지?

마물마다 심장의 위치가 다르다. 인간처럼 몸통 윗부분에 있는 마물도 있지만 머리나 팔, 다리 등 흔치 않은 부위에 있는 마물도 있다.

피그링은 엉덩이 위, 꼬리뼈 부근에 달린 링이 심장이다.

간단하네.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어서 링을 향해 겨눴다. 그간 플로아에게서 검술 훈련을 받아온 덕에 자세는 잘 잡혔다.

어느새 하객 모두가 나의 피그링 사냥을 관람하게 되었다.

그중 비르타가 재수 없다는 듯이 조잘댔다.

“폼 잡는 것 봐,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쓰네, 애를 써.”

“저렇게 폼 잡고 못 깨트리면 우습겠군.”

갈리는 내가 망신당하길 바란다는 듯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누가 봐도 찌질한 모습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양손으로 꽉 잡은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팅, 쩌적―

그러자 링이 반쯤 갈라짐과 동시에 숨어 있던 보라색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어……?”

펑―!

일순간에 폭발이 일어나고 말았다.

링에서, 그러니까 바로 내 앞에서.

“아가!!!”

“메이!!!”

“메이 님!!!”

예상치도 못한 폭발에 모두가 경악했다. 폭발이 일어난 자리에선 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 때문에 모든 게 가려져 앞이 캄캄했다.

“괜찮으십니까……!”

플로아가 순간이동 하여 내게 왔다. 아이리스,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아가, 괜찮아? 어쩌면 좋아…….”

“말 좀 해 봐, 메이……!”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커다래진 눈과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다행히도 나는 폭발과 동시에 땅에 납작 엎드렸던 터라 다치지는 않았다.

연기가 가셨다. 내가 다치지 않았던 걸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플로아는 나를 꽉 끌어안기까지 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다행이야, 아가.”

아이리스는 다행스러워하다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헤스티아……. 놀랄 모습을 못 봐서 아쉽다는 게 이거였어?”

[생일선물. 놀랄 모습을 못 보는 게 아쉽네. 헤스티아가.]

헤스티아가 서프라이즈로 링에 폭발 마법을 걸어 놨을 걸 예상 못 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라도 한 듯 목소리는 거칠었다.

그녀는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메이, 미안해. 내가 먼저 이상이 있나 확인해야 했는데……. 헤스티아가 이런 위험한 일을 벌일 줄은 몰랐어.”

“괜찮아요. 보다시피 다친 곳도 없는걸요?”

“그래도 미안해…….”

내가 플로아의 품에서 빠져나오니 이번엔 아이리스가 나를 안아 줬다. 그녀의 품은 따스했다.

카시우스는 공중 부양을 해 다른 곳에도 폭발 마법이 걸려 있는지 확인했다. 피그링을 꼼꼼히 살폈지만 더는 마법이 걸린 곳이 없었다.

그는 땅에 내려와선 돌멩이를 주웠다.

“마법은 여기뿐인가.”

카시우스가 돌멩이를 링에 던지니 대략 5초 후, 전보다는 작게 폭발이 일어났다.

“깜짝아……!”

펑, 터지는 소리에 놀란 아이리스가 나를 놓고선 카시우스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는 ‘위험하게 저걸 왜 또 폭발시켜? 메이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라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미안, 폭발이 일회성인지 확인하려고 했지.”

그리고 그의 말대로 폭발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링에 충격을 가할 때마다 폭발이 일어났다.

어라……?

나는 여기서 무언가 알아차렸다.

방금…… 폭발이 조금 늦게 일어나지 않았나? 내가 링에 충격을 가했을 땐 폭발이 바로 일어났었는데…….

카시우스는 링에 또 돌멩이를 던졌다. 이번 폭발은 7초 후에야 일어났다.

카시우스는 귀찮게 됐다는 식으로 말했다.

“폭발이 계속 일어나네. 이래서야 일반인이 피그링을 쓰러트리는 건 무리겠는데?”

하지만 나는 검을 들고 주저 없이 링에 뛰어들었다.

‘다음 폭발까지 텀이 있는 거야!’

그 텀을 이용해서 링을 깨부수면 폭발에 피해를 입지 않고도 피그링을 쓰러트릴 수 있어!

“지금 뭐 하시는……!”

“아가!!!”

“메이, 위험해!!!”

이를 본 플로아, 아이리스, 카시우스는 크게 놀라서 나를 붙잡으려 들었으나 소용없었다.

내가 이미 링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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