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5화
애초에 수호 기사 선출은 기준 없이 제국 3대 수호신 마음대로 이뤄진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마음에 들면 선출하고,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선출 기준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물며 정식 수호 기사 한 명 없는 곳에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수호 기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
차라리 기도라도 하면 나았을 법하다. 망나니 2황자가 운영하는 것답게 나인은 클럽 회원들과 허구한 날 술을 마시며 놀고먹는 곳이다.
원작을 봐서 익히 안다.
남주인공인 제드 블로체가 나인 회원이었으니까.
제드 블로체와 2황자는 사촌지간이다. 현 황제의 동생이 공작 작위를 얻고선 황실에서 나와 블로체 가문을 세웠고, 그 가문에서 제드가 태어났다.
그들은 친척이고 나이도 같았기에 어려서부터 만날 일이 많았다. 2황자가 황태자에게서 나인 회장직을 물려받았을 때, 제드는 자연스레 나인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느 회원들과는 달랐다. 클럽에 가입하기는 했으나 질 나쁜 회원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망나니 황자에게 적당히 맞춰 주면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이며 독자들에게 더욱 인기를 샀던 걸로 안다.
‘제드와 2황자는 서로 다른 기사단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멀어지지.’
원작에선 제드도 2황자도 정식 수호 기사가 된다.
제드야 남자주인공이니 그렇다 쳐도 망나니 2황자는 어떻게 수호신의 선택을 받게 됐는지 의문이었는데, 나중에 원작에서 그 이유가 나오긴 한다.
초기의 황실은 수호신들을 경계했었다. 수호신들의 입지가 커지면 황권이 낮아질 테니 말이다.
반면 수호신들은 권력을 쥘 생각으로 제국의 수호신이 되고자 한 게 아니었기에 황실이 경계를 풀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황실과 수호신은 황가 핏줄은 누구든 간에 수호 기사가 될 수 있도록 보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국 3대 수호신은 황실과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황가의 핏줄인 2황자는 무조건 기사단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야.’
그가 아무리 망나니일지라도 황가의 사람이니까.
나인의 폐단의 원인이 이것이기도 하다. 회장 본인은 이미 선출 확정이므로 회원들을 굳이 신경 써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짓을 해도 수호 기사가 되는 건 보장되며, 그로 인해 수호신의 마력을 가지게 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므로 그가 무엇을 하든지 막을 사람이 없다.
나인이 이런 환경이어서, 회장이 회원에게 부당한 요구를 해도 회원은 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갈 구해 오라 하면 구해 와야 하고, 개처럼 짖으라고 하면 짖어야 한다.
거부할 수 없다.
더군다나 회장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의 황자니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회원들과 함께 괴롭힌다는 소문도 있지…….
그러니까 절대로 나인엔 접근하지 말아야지. 수호 기사가 돼도 2황자랑은 절대로 엮이지 말고!
나는 꼭 그리하겠다는 듯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올해 선출하는 게 사실이라면 나도 뽑히는 건가? 성인까지 세 달 정도 남았는데…….
지금은 6월이고, 생일은 9월 10일. 생일 전에 선출한다면 나는 미성년자라서 뽑힐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다음 선출 때까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하…….”
메이는 나이를 왜 이렇게 안 먹니? 이전 생에서는 나이 먹기 싫어도 금세 먹더니만…….
똑똑―
내가 다시 한숨 쉬려는 그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조안이 방문 쪽을 보며 말했다.
“누가 왔나 봐요.”
“누구지? 우리 말곤 올 사람이 없는데…….”
엘렌이 의아해하며 방문을 열었다. 노크한 사람은 집사장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집사장님.”
“주인님께서 도련님을 부르십니다.”
“도련님을요?”
동시에 모두의 시선에 내게 꽂혔다. 나는 집사장에게 다가갔다.
“저를 찾으신다고요?”
식사 시간도 아닌데 굳이 나를?
“네, 도련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따라오시죠.”
“……네.”
나는 의아함을 숨기지 못한 채로 집사장을 따라갔다. 같이 따라오는 엘렌도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나와 페르시스는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며, 본다 한들 복도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게 아닌 이상 식사할 때만 마주했다. 그래서 직접 불렀다는 사실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집사장은 우리를 페르시스의 응접실로 데려갔다. 페르시스는 늘 그렇듯 반듯하면서도 여유로운 자세로 커피를 들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그가 앉은 소파 앞 테이블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가 있었다. 알록달록한 마카롱과 휘낭시에, 머랭쿠키 등등. 그것은 페르시스가 즐겨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나는 소파에 앉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로 가서 섰다. 소파에 앉을 만큼 긴 대화일 것 같진 않아서였다.
페르시스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곤 고개를 틀어 내게 눈길을 줬다. 한창 마물 사냥 중이라 그런가. 그는 피곤해 보였다.
물론 그가 피곤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선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사 줄 테니까.”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사 주겠다고?
……당신이 왜?
순간 반감과 경계심이 들었다. 날 시험하는 게 아닌 이상 그가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페르시스라는 사람은 자기 자식한테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볼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5년간 스텔라를 괜히 부러워했던 게 아니다. 내 아빠라는 사람이 다정함과 거리가 멀어서 그토록 부러워했던 건데.
왜 이제 와서 신경을 써 주는 것처럼 굴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필요한 건 다 있습니다.”
“필요한 걸 물은 게 아니라 갖고 싶은 걸 물은 거다.”
“갖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정말 없어?”
그는 마치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되물었다.
뭐라도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난 딱히 갖고 싶은 게…….
불현듯 어제 스텔라와 쇼핑 중에 봤던 드레스가 떠올랐다.
너무 아름다워서 입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드레스. 나는 그 드레스에 정신이 팔렸었다.
그때 그리고 우연히 페르시스와 마주쳤었지.
아무래도 그가 그 장면을 본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페르시스가 내게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묻는 건…….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라는 경고겠지.
남자애면 남자애답게 살라는 그런 경고.
그의 저의를 깨달은 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없습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것으로도 만족합니다.”
“…….”
내 말을 끝으로 우리가 있는 이 응접실엔 수 초간 침묵이 돌았다. 그 침묵으로 나는 한 번 더 확신했다.
그저 드레스가 예뻐서 쳐다봤던 것뿐인데 그것이 페르시스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나 보다고.
그러나 그 사실이 억울하고 속상하진 않다. 페르시스 말에 상처 받던 예전에 비해 난 성숙해졌으니까. 이미 이 현실에 무뎌졌으니까.
“더 하실 말씀 없다면 가도 될까요?”
페르시스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래. 가 봐.”
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그에게 인사하곤 응접실에서 나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드레스에 정신 팔지 말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해 주지. 왜 갖고 싶은 걸 사 주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지…….
그의 경고를 순간이나마 다정함으로 착각했던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페르시스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한 엘렌은 내게 기회를 놓쳐 아깝다는 식으로 말했다.
“도련님, 뭐라도 갖고 싶다고 하지 그러셨어요. 주인님께서 먼저 갖고 싶은 걸 사 주겠다고 하신 건 처음이잖아요.”
“어떻게 그러겠어. 내가 갖고 싶은 건…….”
나는 뒷말을 삼켰다. 드레스라고는 엘렌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갖고 싶으신 게 뭔데요? 제가 사 올까요?”
“……아냐, 갖고 싶은 거 없어. 없어서 아빠한테도 없다고 한 거야.”
“그래도…….”
“괜찮아.”
엘렌이 더는 아쉬워하지 않도록 미소를 보였다.
나중에 독립하면 내가 사 입으면 되니까.
***
한편, 응접실에 남은 페르시스는 커피가 식어 가도 더는 마시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에 차려진 디저트들이 메이의 입에 들어가지 않아서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어제 메이는 분명 드레스를 보고 있었다. 그 꼬맹이가 무언가를 그렇게 본 건 처음이었다.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서 갖고 싶었던 걸 거다.
그런데도…….
“사 달라고 하지 않았어.”
어째서 사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 꼬맹이도 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드레스임을 눈치챘을 텐데.
“이상하군.”
드레스를 사 달라고 하지 않은 메이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이 이상하다는 말이었다.
메이가 내 친자식이 아니어서 그런가?
다들 아직은 아닌 척하고 있지만, 메이가 페르시스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건 기정사실화됐다. 열다섯이 되도록 가문의 힘이 발현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무언가 어긋난 기분이 드는 걸까. 5년간 이성적으로 살아왔으니 어긋난 게 없어야 맞는데…….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든다. 자신은 정말로 이성적으로 살아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