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4화
“방금 그 남자가 남주였구나…….”
어째서인지 내 목소리엔 아쉬움이 묻어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텔라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확실히, 스텔라 말마따나 그는 딱 봐도 남주인공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한 번 봐도 잊지 못할 만큼 매력적인 마스크여서 절대로 남주인공이 아닐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일개 조연일 리는 없을 테니까.
“잘생기긴 잘생겼지? 역시 남주인공은 다르더라. 데뷔탕트 때 처음 보고선 놀랐어. 상상한 것보다 더 잘생겨서.”
스텔라는 이번이 제드와 두 번째 만남인가 보다. 여러 가문의 자제들이 모이는 데뷔탕트 때가 첫 만남이고.
“나와 같이 데뷔탕트를 치렀으니 열여덟 살이겠네.”
작중에서 스텔라와 제드는 두 살 차이였으니 스텔라가 열여섯 살인 지금 그는 열여덟 살이 맞을 거다.
“그날 블로체 공자가 귀족 영애들한테 어찌나 주목받던지. 블로체 공자가 오른쪽으로 가면 시선도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고……. 내가 다 부담스러울 정도였어.”
역시, 남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물론 나도 그만큼 주목받았지만.”
스텔라는 자신의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며 훗, 하고 웃어 보였다.
“나중에 그와 연애할 사람은 힘들겠어. 그치?”
“…….”
그녀는 꼭 그 연애 상대가 자신이 아닐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오직 한 가지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남주인공이므로 곧 스텔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 사실만을.
***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심지어는 집에 돌아와서도 내 머릿속은 제드 블로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밤하늘과 같은 푸른빛 까만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짙은 보라색 눈동자는 나를 향하며 그 짧은 사이 나를 홀린다.
아아, 점점 기억이 미화되는 건 기분 탓일까.
머릿속에서 그의 모습을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식사 후 책을 읽고, 씻은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마저도.
마치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불이 꺼진 방에서 홀로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졸려서 반쯤은 감긴 상태였다.
정말 반하기라도 한 걸까.
반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지금까지 그를 몇 번이나 떠올렸는가. 셀 수도 없이 떠올렸다.
떠올리는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두덩이 눈동자를 완전히 덮었을 때쯤 나는 중얼거렸다.
“오늘까지는…….”
오늘까지는 남주인공의 미모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거로 하자. 스텔라가 그랬잖아, 데뷔탕트 날 제드 블로체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다고.
그는 그 정도의 미모를 가진 사람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생각이 났던 거지. 응, 그렇고말고.
속으로 한껏 부정했다.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절대로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란 걸 한껏, 또 한껏.
그러나 내 마음을 언제까지고 부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만일 오늘뿐만이 아니라 내일도 생각난다면. 내일도, 모래도, 앞으로도 쭉 그가 떠오른다면.
그땐 어떡해야 할까.
***
내가 있는 곳은 어딘지 모를 민들레 동산이었다. 하늘엔 몽실몽실한 구름이 떠다니고 내가 앉아 있는 들판엔 희고 노란 민들레들이 바람을 따라 춤을 추었다.
내 옆엔 제드 블로체가 앉아 있었다. 그의 다정한 눈빛은 오직 내게 향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슬그머니 내 손을 감쌌다. 내 손가락 사이로 굵은 손가락이 들어오자 흠칫 놀랐지만 나는 그와 손깍지 끼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원작에서 여주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느지막하게 열렸다.
‘사랑해.’
사랑해, 그 흔하고 진부한 말에 나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뭐야아. 새삼스럽게.’
그는 반복해서 말하며 내게 몸을 점점 가까이 밀착시켰다.
‘사랑해.’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
다음 날 아침, 내 방에서 쿵! 쿵! 딱딱한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냐면, 내가 침대 헤드에 내 이마를 박는 소리다.
쿵!
“미쳤지, 내가 미쳤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이마를 박았다.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제드 블로체랑 연애하는 꿈을 꾸다니……!”
나라는 미친 자가 원작 남주와 손깍지를 낀 채로 키스할 뻔한 꿈을 꿨다. 다행히도 키스 직전에 잠에서 깼지만…….
미래에 친구 남편이 될 사람과 연애하는 꿈을 꾸는 게 말이 돼?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추잡스러운 꿈을 꿀 리 없다.
쿵쿵! 연거푸 이마를 거침없이 박았고, 애꿎은 침대는 내 두개골의 단단함을 경험해야만 했다.
“진짜 미쳤지…….”
이마엔 보는 사람이 다 아플 만큼 붉은 혹이 생겼으나 지금 난 고통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왜 하필 원작 남주야?
왜 하필 걔를 좋아하는 건데?
이전 생에서도 짝사랑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설렜던 것,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떠오른 것, 연애하는 꿈을 꾼 것…….
이건 틀림없이 좋아하는 거다.
그리고 난, 한 번 좋아하면 쉽게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젠장……. 왜 하필 제드 블로체인 거야…….”
그 많고 많은 남자들 중에 왜 하필!
왜 하필 스텔라와 사랑에 빠질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걸까.
“스텔라…….”
그녀는 원작 주인공으로, 나만 아니었어도 그녀가 바랐던 것처럼 원작 내용 그대로 살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현 생활에 200% 만족한다는 거 나도 안다. 하지만 내 존재만으로 그녀에게 위협이 가해졌고, 내가 그녀의 아빠가 될 사람을 뺏어 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젠 원작 남주까지…….
이래선 안 된다. 이건 정말 아니다.
쿵쿵! 정신 차리자는 의미로 이마를 계속 박을 때쯤 엘렌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엘렌은 열심히 이마를 박아 대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식겁했다.
“세, 세상에, 도련님……!”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뜬 엘렌이 내게 달려와선 이마를 붙잡곤 나를 끌어안았다.
“도련님, 이마 다치셔요……!”
“다쳐도 돼. 다쳐도 싸.”
“다쳐도 싸다니요……! 도련님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데요.”
“…….”
귀한 존재라니. 엘렌은 나조차도 귀하게 대해 주지 않는 나를 귀하게 여겨 준다.
“엘렌…….”
그녀가 나더러 귀한 존재라는데 어찌 함부로 다를 수 있을까. 나는 엘렌이 원하는 대로 침대 헤드에서 머리를 치워, 더는 이마를 상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녀를 꼭 끌어안을 무렵, 침실 방문은 한 번 더 열렸다가 닫혔다. 방 안으로 들어온 조안이 엘렌에게 안겨 있는 나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우리 도련님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엘렌은 나를 안은 채로 조안에게 지시했다.
“조안, 구급상자 좀 가져와.”
“구급상자는 왜요? 설마, 도련님이 어디 아프신 거예요?”
엘렌 품에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조안에게 얼굴을 비쳤다. 예상대로 조안은 혹 난 이마를 보고선 깜짝 놀랐다.
“도, 도련님, 이마에 혹이……!”
“하하…….”
엘렌은 조안이 서둘러 가져온 구급상자에서 약을 꺼내 내 이마를 치료해 주었다.
조안이 내게 어찌 이마를 상하게 했냐며 다음부턴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당부해 준 덕에 잠시간은 제드 블로체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 됐어요.”
엘렌의 말에 거울을 보니 혹 위에 엑스자로 떨어지지 않게 붙인 하얀 거즈가 보였다.
“연고만 발라도 괜찮지 않아? 이마에 무언가 붙어 있으니 신경 쓰여.”
“신경 쓰이라고 붙여 둔 거예요. 다음부턴 절대로 그러지 마시라고요.”
뜻이 담긴 거즈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조안이 화제를 바꿨다.
“참, 오늘 아이리스 님 생신이지 않아요? 생신 때마다 도련님을 찾아오셨으니까 이번에도 오시겠죠?”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는 열 살 때 기차에서 인연이 생긴 이후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그들이 워낙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1년에 두 번 이상은 꼭 플로티나에 찾아와 줬고, 그중에는 매년 아이리스의 생일이 포함되었다.
“2주 전에 오셔서 오늘은 안 오실 것 같아. 슬슬 기사단 영입할 때가 돼서 바빠질 거라고 하셨거든.”
사교계에 진출하지 않은 내게 정보가 있는 건 아틸라 부인 덕이었다.
아틸라 부인에게 들은 바로는 요즘 사교계의 관심사는 기사단이라고 한다. 모두가 되고 싶어 하는 수호 기사를 수년에 한 번꼴로 선출하니 세간이 주목하는 게 당연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조안도 알고 있었다.
“아, 저도 다른 하녀들한테 주워들어서 알아요. ‘나인’에서 올해 수호 기사 선출이 이뤄질 거라고 했다죠?”
“응, 맞아.”
나인은 2황자가 운영하는 클럽으로, 기사단에 들어가는 걸 목표로 하는 귀족 자제들의 사교 모임이다.
정식 수호 기사가 아닌, 지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일 뿐인데도 황가 사람이 운영하는 만큼 영향력이 컸다.
제국 3대 수호신과 가끔 소통도 해서 수호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10, 20대 귀족 대부분이 가입하고 싶어 하는 클럽이다.
하지만 원작을 읽은 나는 안다.
사교 모임은 사교 모임일 뿐,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