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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2)화 (42/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2화

우아한 드롭트 숄더에, 벨라인 드레스. 가슴께 정중앙에는 손바닥 두 개만 한 리본이 달려 있고 그 위에 무지개를 연상하는 오팔 펜던트를 붙여 포인트를 주었다.

스텔라는 다시 나를 보았다.

“저거 갖고 싶어?”

“…….”

“내가 사 줘?”

원하면 사 줄게. 나, 돈 많아. 스텔라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아니’도 아닌 ‘안 돼’. 내가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스텔라는 알고 있었다.

“네가 남자로 살고 있어서?”

“누가 듣겠다, 쉿.”

내가 눈치를 주고서야 스텔라는 아차차- 하며 입을 합! 다물었다.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들일 때는 아들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지.”

그러기로 페르시스와 약속했으니까.

어쩌면 그 약속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니까.

겨우 드레스 하나 때문에 5년간 쌓아 올린 아들 역할이 무너지면 억울하지 않은가. 언젠간 버릴 역할이라 해도.

드레스는 진짜 메이로 살게 되면 입자.

그땐 내가 버는 내 돈으로 원 없이 사고, 원 없이 입자. 지금은 꾹 참고.

분명 그리 다짐했건만, 스텔라와 함께 숍 밖으로 나온 후에도 좀처럼 그 드레스에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보다 못한 스텔라는 내 옆에서 팔짱을 낀 채 헛숨을 내쉬었다.

“사고 싶으면 사라니까? 각하 때문에 고민하는 거라면 그냥 사. 남자앤데 웬 드레스냐고 질책하면 내 핑계를 대. 친우의 입양 따님이 억지로 사 입혔다고 해.”

스텔라는 원작과 달리 페르시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이니 그에게 밉보이든 말든 상관없었다.

“…….”

내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메이.”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고, 시야엔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남성이 들어왔다.

페르시스 플로티나였다.

그가 다가오자 스텔라는 뚱한 얼굴로 하기 싫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충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고,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버지께선 여긴 어쩐 일로…….”

페르시스는 뒤편에 요한을 두고선 내 앞에 멈춰 섰다.

“상단에 다녀오는 길이다.”

그러고 보니 이 패션거리는 페르시스와 거래하는 쿠투스 상단과 이어져 있었다. 페르시스는 한창 마물을 사냥할 시기였으니, 상단에 들러야 할 일이 종종 있었을 거다.

“넌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지?”

무얼 하고 있었냐고? 나는…….

내 시선이 다시금 드레스로 향하려다가 도중에 멈춰 버렸다. 이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

대답할 수 없다. 그의 아들인 내가 갖고 싶은 드레스를 보고 있었다는 건…… 말 못 하지.

3개월 후면 성인이 되는 녀석이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에 볼품없이 밖에서 드레스 구경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라. 그것도 아들 행세를 하고 있는 녀석이.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스텔라 영애의 쇼핑에 따라왔습니다.”

***

스텔라와의 쇼핑에 그저 따라왔다고 대답하는 메이를, 페르시스가 내려다보았다.

풀이 죽은 목소리. 그건 페르시스가 듣고 싶어 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절대로 메이를 기죽게 만들려고 물어본 게 아니었다. 뭐라도 좋으니 대화를 하고 싶어서, 이 상황에선 이런 멘트가 적합하니까 별 뜻 없이 내뱉은 물음이었다.

“……그래.”

아들이 어째서 기죽었는지 알아보려는 노력이 없으니 그에게서도 별 볼일 없는 호응이 나왔다.

메이는 또래 친구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녁에 집에서 봬요, 아버지.”

“……그래.”

자신의 아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페르시스는 그런 메이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해했다.

좀 더 대화하고 싶었는데.

사고 싶은 옷이 있는지, 먹고 싶은 음식은 있는지에 대해.

그 정도는 대화해도 될 사이라고 생각했고, 대화할 시간도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도.

‘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는 거지?’

어째서 자신과 아들은 꽉 막혀 버린 사이가 되어 버렸을까.

그는 아들의 시선이 오래 닿았던 드레스를 보았다.

“도련님께선 저 드레스가 갖고 싶으셨나 봅니다.”

자신도 안다. 메이를 부르기 전, 그 애가 어딜 응시하고 있었는지 봤으니까.

알면서도 무심한 음성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참아야지.”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아야지. 내 아들이니까. 플로티나의 후계자니까.

“……참아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드레스에 시선을 떼지 못하던 아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저 드레스를 보는 메이의 표정이 어땠더라.

표정을 떠올린 페르시스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

그 아이는 갖고 싶은 걸 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눈이 부시게 화사하고 소복이 쌓인 눈보다 흰, 아름다운 드레스.

그 드레스에 눈을 떼지 못하던 메이의 표정은, 갖지 못하는 걸 보는 표정이었다.

***

드레스숍 앞에서 페르시스를 만난 후, 나와 스텔라는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걸었다. 스텔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분위기가 삭막해도 너무 삭막해. 하긴, 딸이 아들로 살아가는 집안인데 화목한 게 더 이상한 거겠지.”

“…….”

“어휴, 답답해!”

스텔라는 고구마를 먹다가 체한 것처럼 가슴께를 두드리며 답답해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별 감정이 없어서 이렇다 할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뭐지, 이 느낌?’

어디선가 스산한 느낌이 들어, 나는 길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췄다. 스텔라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며 나를 불렀다.

“메이?”

“…….”

“왜 그래?”

나는 긴장되어 뛰는 가슴을 달래며 조용히 대답했다.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아.”

“응?”

스텔라는 그게 무슨 헛소리야? 라는 듯한 낯을 보였다.

“누가 우릴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뭐?”

내가 진지하게 말하니 스텔라는 혹여 누가 들을까 봐 소곤소곤 얘기했다.

“지, 진짜야? 우릴 감시하고 있다고? 아니, 왜?”

곧 스텔라의 낯빛이 겁에 질려 푸르게 변했다.

“설마…… 납치하려고?”

대한민국과는 달리 치안이 좋지 않기에 이 세계에서 납치 매매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모르지.”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살에 닿는 바람마저도 이상하게 느껴지니 주위가 긴장감으로 물들여졌다.

나는 누군가가 습격할 수도 있으니 사방을 살피며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어디서 우릴 감시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아.”

“어딘데?”

스텔라는 침이 꼴깍 넘어갔다.

“네가 보는 쪽에 있는 것 같아. 찾아봐 봐. 내가 고개를 돌리면 저쪽에서 눈치채고 도망갈 것 같아서.”

스텔라는 내 말대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감시자를 찾아보았다.

“어때? 우릴 감시하는 사람 있어?”

금방 눈이 마주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있어…….”

“어때? 위험한 사람 같아?”

“모퉁이에 숨어 있는데 그늘 때문에 머리색 빼곤 잘 안 보여.”

“머리색?”

“백금발이야.”

……백금발?

순간 스치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5년 전, 기차 출입문 너머 플랫폼에서 발견했던 애꾸눈의 남자.

고작 머리색 하나만 알려 줬을 뿐인데 그 남자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얼굴을 본 건 겨우 수 초였을 뿐인데도, 인상이 강해서인지 열다섯이 된 지금까지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스텔라는 눈을 껌뻑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우리한테 온다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휙 돌려 백금발의 남자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없고, 40대로 보이는 백금발의 여자만 있을 뿐이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우릴 납치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들었다. 예전에 본 애꾸눈의 남자를 떠올린 스스로가 살짝 어이없기도 했다.

‘난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당연히 그 남자가 이곳에 있을 리 없지. 우릴 감시할 리는 더욱 없고.’

그나저나 저 여잔 왜 우릴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여자가 점점 더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지니 여자의 외관이 뚜렷하게 보였고, 나와 스텔라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머리색이…….

나와 스텔라는 같은 백금발임에도 색감 차이가 있다. 내 머리가 백금발의 정석이라면, 스텔라 쪽은 분홍빛이 도는 희귀한 색이었다.

주인공의 매력을 더하는 일종의 버프 중 하나겠지.

아무튼 나와 같은 백금발은 흔해도 스텔라와 같은 백금발은 흔치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스텔라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자의 머리색은 스텔라의 머리색과 똑같았다.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스텔라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리 딸……. 보고 싶었어…….”

여자가 다짜고짜 스텔라를 안으려고 하자, 나는 호위기사가 나서기도 전에 먼저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신데 영애님을 안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내 뒤에 숨겨진 스텔라는 고개를 옆으로 빼꼼 내밀어 여자를 주시하다가 이내 표정을 구기며 앞으로 나왔다.

“당신, 설마…….”

“스텔라, 날 알아보겠니?”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아서 몇 걸음 물러서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낯선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흰 피부에 분홍빛이 도는 백금발, 보라색 눈동자, 상당히 빼어난 이목구비…… 그러다 문득, 뇌리에 스치는 이가 있었다.

설마…….

나와 스텔라의 ‘설마’는 과녁에 적중했다.

“네 어미란다, 딸아.”

맙소사.

머리색으로 예상하긴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황당해서 내 입이 떡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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