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1화
페르시스는 이번에도 메이와 대화하지 못해 허탈했다. 전엔 안 그랬었는데 우울하기까지 했다.
그저 평범하게 대화하고 싶을 뿐이었다. 바쁜 일정을 쪼개 굳이 자식과 함께 식사한 것이 그런 소탈한 이유였다.
몇 번이나 없는 시간을 쪼개 시간을 만들어 냈지만 오늘도 종국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으니…….
우울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는 것만으로는 갑자기 없던 대화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걸.
그가 대화를 이끌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
식사 후, 나는 나제트가에 찾아갔다. 안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가야지.
마차에서 내린 후 나제트가 안뜰에 들어서니 웬일인지 밖에 나와 있는 하인드와 스텔라가 보였다. 하인드는 외출하려는 듯 보였다.
예상대로 스텔라는 하인드를 배웅하는 중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아빠.”
“그래, 다녀오마.”
하인드가 스텔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어렸을 땐 저 모습이 부러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많이 봐 와서 익숙해지기도 했고, 부러워해 봤자 내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인드는 저택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날 발견하더니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메이, 놀러 왔구나? 재밌게 놀다 가렴.”
“네, 후작님.”
그는 카시우스가 운영하는 제2기사단의 수호 기사다. 페르시스처럼 마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외관은 아직도 20대 후반이었다.
후작님도 한창 마물 사냥으로 바쁘시겠어.
그가 밖으로 나가니 스텔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내 쿠키가 그렇게나 먹고 싶었나 봐?”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사랑스럽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스텔라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나보다 키가 작았다. 내 키가 큰 거지, 스텔라의 키는 평균이었다.
“안 오면 내 목숨이 위협당할 것 같아서.”
스텔라는 팔짱을 끼며 새침한 태도를 보였다.
“당연하지. 내 쿠키를 거부하고도 살아남을 사람은 없어.”
“맛은 기대 안 해. 전에 만들어 줬던 마들렌을 생각하면…….”
내가 떠올려선 안 될 걸 떠올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자 스텔라는 의외로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는 기대해도 돼.”
스텔라는 웬일로 아주 자신 있게 말했다.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스텔라의 방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의자에 앉아 쿠키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기로 했다.
쿠키는 한 입 크기의 체크무늬 쿠키였고, 라탄 피크닉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었다.
“먹어 봐.”
스텔라의 권유에 나는 체크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냄새는 그럴듯한데…… 중요한 건 맛이지. 나는 조심스레 입 안에 쿠키를 넣었다.
오물오물. 쿠키를 조심히 맛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삭바삭, 눅눅하지 않은 식감. 씹을수록 코코아 향이 물씬 나고 적당히 달아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맛있지? 세 달 동안 베이킹을 열심히 배웠거든. 그동안 쿠키를 얼마나 태워 먹었는지 몰라.”
내가 쉴 새 없이 쿠키를 입안으로 집어넣자 스텔라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하도 입에 묻히고 먹길래 한 입 크기로 만들었지.”
“아, 그래서 그런 거야?”
그녀의 말대로 체크무늬 쿠키는 내가 한입에 먹기 딱 좋은 사이즈였다.
“응. 이런 내 배려심이란~”
“많이 컸네, 스텔라. 배려할 줄도 알고.”
“뭐래, 누가 들으면 배려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인 줄 알겠네.”
그렇게 말하고도 자신이 이기적인 면이 있는 건 맞다고 생각했는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돌렸다.
“아, 참. 데뷔탕트 때 있었던 일 들려줄게.”
스텔라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아 연초에 성년이 되었고 최근에 데뷔탕트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그때 재밌는 일이 있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데뷔탕트에서 생긴 일화를 들려주었다.
“나를 째려보다가 실수인 척 내 발을 밟고 가길래 나도 실수인 척 발을 세 번 밟아 줬어. ‘어머, 실수!’라고 하니까 황당해하더라고. 세 번 밟은 게 어떻게 실수냐는 표정으로.”
나는 스텔라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데뷔탕트라.
나한텐 없을 일이다. 일단 내가 사교계에 큰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나는 내 짧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압박붕대를 하고 남성복을 입은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아직 내가 남장 중이라서.
내 가짜 모습이 널리 알려지는 건 싫다. 그렇게 되면 가짜 모습에 더욱 열중해야 하니까.
‘내가 페르시스의 딸로 살아간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친자식이라고 확인받지 못해 열다섯 살이 되어도 아들로 지내고 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가문의 힘을 발현하지 못했다.
플로아가 플로티나 혈육에게 부여하는 가문의 힘. 성인이 되기 전, 불시에 발현된다고 하긴 하지만 이제껏 모두 다섯 살 내외로 발현되었다.
딱 한 명. 나만 제외하고.
이쯤 되면 난 페르시스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거겠지.
성인이 되기까지 세 달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힘이 발현되지 않았으니 페르시스의 친딸이 아니란 게 기정사실화된 거나 마찬가지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성인이 되기 직전에 극적으로 가문의 힘이 발현되는 게 아니고서야.
스텔라는 내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걸 느꼈는지 화제를 바꿨다.
“아 참, 나 쇼핑할 건데 같이 갈래?”
“쇼핑?”
“엉, 요즘 옷을 안 사서 입을 게 없어. 너도 이참에 쇼핑해.”
“쇼핑…….”
선뜻 하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던 건, 쇼핑에 사용되는 돈이 결국 페르시스의 자산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돈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렇다 해서 구두쇠 같은 성격은 아니고, 오히려 버는 만큼 잘 쓰는 스타일.
하나, 그가 돈을 중요시한다는 걸 아는 이상 그에게 과소비하는 모습을 보이긴 싫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물품들은 전부 시녀인 엘렌이 미리 마련해 놓는다.
그러니 내가 쇼핑을 하게 된다면 그건 필요한 물품 외의 것을 구매하는 사치이니 과소비가 되는 거겠지.
“나는…….”
쇼핑하러 가지 않겠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스텔라는 나와 쇼핑이 하고 싶은지 자신의 의사를 밀어붙였다.
“살 거 없어도 같이 가자. 둘러보다가 예쁜 거 있으면 사 줄게.”
예쁜 걸 사 주면 무엇 하나. 어차피 나는 남장 중이라 입고 다니지 못할…….
“지금 가자!”
“어?”
스텔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곧바로 내 손을 잡아 끌어당겨 일으켜 세웠다. 힘이 센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가자!”
“자, 잠깐만……!”
아니, 내 의사는 중요치 않은 거니?
묻기도 전에 스텔라는 험악한 인상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얼굴을 험악하게 쓰기로는 세계 1위를 차지할 것 같았다.
“안 가겠다고 하면-”
스텔라가 손으로 자신의 목을 주욱 그었다.
“가만두지 않아.”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쳐다보는 바람에 절로 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알겠으니까 눈 크게 뜨지 마…….”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지니 무서워…….
“그렇게 나와야지.”
스텔라는 만족스러운지 싱긋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
나와 스텔라는 나제트가 근처 번화가에 발을 디뎠다. ‘패션거리’라고 불릴 정도로 의복 가게가 많은 곳이었다.
스텔라는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드레스숍 하나를 가리켰다.
“어디부터 들를까? 저기부터 갈까?”
그러고는 곧장 그곳으로 나를 끌고 가는 게, 자기 멋대로 결정할 거면서 왜 묻나 싶었다. 그래도 난 순순히 따라가 주었다.
그녀가 가리킨 드레스숍 쇼윈도 너머 전시되어 있는 흰색 드레스가 예뻤기 때문이었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점원들이 친절하게 맞이했다. 스텔라는 점원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선 바로 드레스 탐색에 나섰다.
드레스를 고르는 스텔라의 눈동자는 여섯 살 아이가 까까를 보는 것만큼 초롱초롱했다.
드레스를 둘러보던 스텔라는 연보라색 머메이드라인 드레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스텔라는 이것 좀 보라는 듯이 내 팔을 흔들었다.
“어머, 어머, 이거 너무 예쁘다!”
색감이 부드럽고 곡선 라인이 아름다워서 감탄이 나올 만한 드레스였다.
“이거 색감 미쳤-”
스텔라는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미쳤다는 말을 툭 내뱉을 뻔했으나 이내 자신이 귀족 영애란 걸 자각하고는 헛기침하며 표현을 고쳤다.
“큼큼, 드레스 색감이 내 심장을 울리네, 호호.”
나는 그런 스텔라의 모습이 웃겨서 킥킥거렸다.
“웃지 말고 네가 보기엔 어떤지 좀 말해 봐.”
스텔라가 내 허리를 콕콕 찌르자 나는 웃음을 멈추곤 드레스를 살폈다.
“어깨에 달린 리본이 흔하지 않은 디자인이라 희소성 있네.”
“그치, 안 사면 후회하겠지? 무조건 사야겠지?”
“너, 내가 뭐라 말하든 살 거잖아.”
“응, 당연하지.”
어차피 살 거면 왜 물어보는 거야?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스텔라는 점원을 부르더니 나름 우아하게 손짓하며 드레스를 구매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줘.”
“네, 고객님.”
점원들이 분주하게 드레스 포장을 시작하는 사이, 스텔라는 몸을 살랑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역시 널 데려오길 잘했어. 쇼핑은 같이해야 좋다니까?”
“…….”
“메이?”
“…….”
스텔라는 반응이 없는 내게 초점을 맞추다가 내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곳엔 흰색 드레스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까 쇼윈도로 봤던 그 드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