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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0)화 (40/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40화

메이가 있는 플로티나에서 두 번째의 봄을 맞이할 때까지만 해도 페르시스는 그의 각오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그는 언제나처럼 무표정을 유지했고, 그의 이익을 위해 살았으며, 자식과는 정말 중요한 용건 외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익숙해진 걸까. 페르시스는 메이가 열세 살이 되는 봄부터였다. 메이와의 관계가 공란처럼 느껴지면서, 허전함에 소통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한동안 이익을 위해서만 살았기에 플로티나가의 재산은 배로 불었고, 넘치도록 가진 게 많아 이제 물질적인 무언가는 더 필요 없어서인지 그가 가지지 못한 ‘자식과의 소통’을 바라게 되었다.

메이를 멀리하자 할 땐 언제고 우습게도 그는 자식과 같이 식사하며 소통하려고 했다.

물론 그가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대부분 평소처럼 대화 없이 식사가 끝나게 되었다. 이에 허탈해진 그는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변해 버린 자신을 탓하려 했다.

하지만 메이가 열다섯 살이 되는 봄부터 그는 다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메이와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단순히 그가 가지지 못한 ‘자식과의 소통’을 얻고 싶어진 게 아니라, 진심으로 메이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저 아이가 언제 저렇게 컸지.’

이제는 자신의 허리는 훌쩍 넘어서는 아이는 천진난만한 예전의 모습은 조금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컸을까.’

그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시간 동안 혼자서 커 버린 듯해, 그게 내심 아쉽고 알고 싶었다.

가끔 플로티나에 놀러 와서 딸 자랑을 하는 하인드를 만날 때면 페르시스는 부럽고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하인드는 딸 스텔라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서. 그런데 자신과 메이는 그러지 않은 것 같아서.

이제 와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더 늦기 전에 메이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

수호 기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는 동안 플로티나에 몇 번의 계절이 찾아왔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열다섯이 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플로티나의 연무장에서 가문의 수호신을 상대로 검술 대련을 했다.

탁, 탁!

내 목검과 플로아의 목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다. 내가 그의 빈틈을 노려 옆구리를 찌르니 그는 재빨리 내 검을 막았다.

탁!

검술 스승답게 그는 실력이 훌륭했지만 나의 검술 실력 또한 지난 5년간 사람이 달라졌나 싶을 정도로 성장했다.

내가 바로 그의 목을 노리니 플로아는 내 검을 받아 내다가도 살짝 휘청였다. 그가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느셨군요. 작년까지만 해도 검을 놓치기 일쑤였는데, 이젠 스승인 저보다 실력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수호 기사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 살 때부터 오늘날까지 검술 연습을 꾸준히 해 왔으니 실력이 크게 성장하는 게 당연했다.

플로아는 미소를 보이며 검을 없앴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빼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짧은 머리카락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내 나이도 벌써 열다섯 살. 성인이라 봐도 무관할 정도로 키가 많이 컸고, 꾸준한 훈련과 체력관리로 건강하게 자랐다.

이젠 제법 사람 구실하는 소녀, 아니 소년이 되었다.

나와 달리 플로아는 5년 전과 똑같았다. 수호신이기에 늙지 않기 때문이다.

“수고하셨습니다.”

플로아가 느긋한 미소를 보이자 나 또한 의미 없이 그에게 미소를 보였다.

“플로아도요.”

요즘은 플로아와 대련을 하면 무승부로 끝난다. 내 실력이 그와 비등해서 그런 거면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그가 봐줘서 무승부로 끝나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열심히 단련해 언젠가는 꼭 그를 이기리라 다짐하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하얀 손수건으로 땀방울을 닦으며 내 침실에 당도하니 엘렌이 나를 맞이했다.

“도련님, 오늘 훈련은 어떠셨나요?”

“재밌었어.”

엘렌도 5년 전과 비교하면 그대로였다. 외관은 5년의 세월로 인해 조금 변했을지 몰라도 내 눈엔 똑같다. 청초한 외모부터 따뜻한 성격까지 전부 다.

그녀의 입에서 반갑지 않은 말이 나왔다.

“주인님께서 오늘 점심 식사는 도련님과 동석하겠다고 하셨어요.”

“……또?”

“네.”

5년 전 내가 쓸모없다는 페르시스의 말을 엿들은 날 이후로, 나와 그 사이엔 서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생겼다.

5년간 남처럼 지냈기에 굳이 서로 만나려 하지 않았으며 어쩌다 대화를 해도 필요한 말만 골라 했었다.

간혹 페르시스가 내게 시답잖은 말을 건네는 둥 필요 이상의 행동을 보였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런데 요 근래의 그는 이상하다. 마물 사냥철이라 한창 바쁠 때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나랑 식사를 하려고 한다.

벌써 여섯 번째다. 용건이 없으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한다.

마치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씻고 식당으로 가시면 시간이 알맞을 것 같아요. 욕조에 물 받아 놨으니 목욕하러 가시죠, 도련님.”

내가 땀에 흠뻑 젖은 훈련복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할 무렵, 조안이 똑똑 노크를 하더니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나제트 영애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내가 성장함에 따라 조안도 조금씩 성숙해졌다. 예전엔 어떤 행동을 하든 발랄하게 했다면 이젠 엘렌처럼 차분하게 행동한다. 그렇다 해도 엘렌만큼은 아닌, 여전히 명랑한 소녀지만.

조안은 내게 편지를 전해 주었다. 연보라색 편지를 펼쳐 보니 스텔라의 시원시원한 필체가 나타났다.

[손수 쿠키를 만들었으니 얼른 우리 집으로 올 것. 내 친히 이 쿠키를 맛볼 영광을 줄게.]

스텔라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하나뿐인 친구다. 같은 빙의자라 그런지 스텔라와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ps. 빨리 안 오면 가만두지 않음.]

추신 내용을 본 나는 실소를 흘렸다.

정말이지, 여전하다니까.

5년이나 스텔라를 알고 지냈기에 그녀의 요리 실력이 대충 어떤지 안다.

180도에 구워야 할 것을 성격이 급해서 300도에 구웠다가 태워 먹은 적도, 너무 딱딱해서 이가 부러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만들었다는 쿠키가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지, 뭐. 준다고 하니까.

편지를 다 읽은 나는 테이블에 올려 둔 후, 엘렌을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

“엘렌, 오늘은 목욕시중 안 들어도 돼. 혼자 씻고 싶어.”

“정말요?”

욕실에 도착한 엘렌이 괜찮겠냐는 듯이 묻자, 나는 그녀의 등을 떠밀며 욕실 밖으로 내보냈다.

“응. 혼자 씻고 싶은 기분이야.”

“그럼, 거품 잘 씻어내셔야 해요? 저번에 잘 안 헹궈서 귀 뒤에 거품이 남아 있었잖아요.”

엘렌의 당부가 내 입술을 삐죽 튀어나오게 만들었지만.

“칫,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2년도 더 지났다구. 이제 나 열다섯이야. 세 달 뒤면 성인!”

걱정하지 말라는 듯 퍽 듬직한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엘렌은 여전히 나를 아이 보듯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천천히 씻고 나오셔요.”

“웅웅.”

엘렌이 욕실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욕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욕조에 가득 채워져 있는 따뜻한 물로 인해 수증기가 내 눈앞에 가득 머물렀다.

입고 있는 흰색 반소매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셔츠를 벗으니 가슴을 온전히 덮어 두른 붕대가 드러났다.

“적응한 것 같아도 여전히 불편하단 말이지…….”

가슴 압박붕대였다. 성장기를 거치며 가슴이 커지니 압박붕대를 둘러야 했다. 플로아가 내게 성별을 알아차릴 수 없게 하는 마법을 걸어 놨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남장 중이니 말이다.

가슴 압박붕대를 풀자 호흡기의 기능이 급작스럽게 좋아지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잘 쉬어졌다.

“아, 편해…….”

이전 생에서는 브래지어도 불편해했었는데, 더 불편한 가슴 압박붕대를 하고 있는 꼴이라니.

조금만 참자.

나는 오로지 ‘인내’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새기며 욕조 물에 몸을 담갔다.

씻고 난 후 식당으로 내려갔다. 페르시스와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페르시스 또한 여전했다. 외관은 마력 덕분에 거의 변함이 없었다. 마력을 보유하면 노화가 늦어지는 탓에, 현재 30대 중반인 그는 외관은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페르시스 뒤에 서 있던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늘 그랬듯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요한은 여전히 내게 상냥했다.

어쩌면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변한 건, 성장기를 거친 나뿐일지도.

나와 페르시스는 아무런 대화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테이블 위에만 시선을 두었다.

“…….”

요 근래 페르시스가 식사 중에 내게 눈길을 주는 빈도가 늘어났다. 정확한 이유는 나로선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너무 대화가 없어서 쳐다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대화가 없어서 쳐다보는 거라기엔 우린 원래 대화가 없었으니까.

오늘도 단 한 마디도 오가지 않은 상태로 식사를 마쳤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

페르시스는 내게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지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평소와 같은 대답을 했다.

“……그래.”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들곤 자리를 벗어났다. 뒤통수가 따가운 걸 보니 그가 내 뒷모습을 응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답답하게 구는 걸까. 할 말 있으면 하지. 말을 가려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그렇게 생각하곤, 나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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