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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9)화 (39/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9화

사업 관련 방문했던 백작이 돌아갈 때쯤, 나는 도서실에서 아틸라 유디프 부인에게 수업을 듣는 중이었다.

“제국 내에는 마물이 출현하는 구역이 따로 있습니다. 각 구역마다 마물 사냥을 하기 좋은 시기가 있는데, 보통 여름이죠.”

“아빠가 마물 사냥을 하러 가는 곳이 마물 출현 구역인 거죠?”

“맞아요. 지금이 여름이어서 아마 각하께서도 몹시 바쁘실 겁니다. 마력을 보유한 분들은 직접 마물을 잡아서 상단에 팔아 수익을 내시니까요.”

마물엔 종류가 다양하다. 치료제로 사용하는 마물도 있고 금은보화를 쏟아내는 마물도 있다. 그런 마물 한 마리만 잡아도 상당한 돈이 되니 막강한 마력을 가진 페르시스 같은 인물은 돈을 벌기가 쉬울 터였다.

플로티나가 부유한 이유도 파사베아 때부터 지금까지 마물을 많이 잡아 상단에 많은 양을 공급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이 여름이어서 페르시스가 몹시 바쁠 거라는 말에 집중했다.

내가 너무 애처럼 굴었던 걸까. 바쁜 페르시스와 만나려고 했던 게 그에겐 큰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페르시스가 돈을 벌기에 내가 먹고살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엘렌과 조안도, 요한마저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많은 이들의 밥줄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애처럼 군 건 아닐까, 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래, 사과하자.

페르시스가 말을 심하게 했다고 해도 내가 보채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을 테니까.

수업이 끝나면 너무 성급하게 굴어서 죄송하다고 말해야겠다.

몇 시간 후,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페르시스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에만 꽂혀 있어서 중요한 걸 늦게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까 사과하는 것도 시간 뺏는 거 아닌가?

맞네…… 이것도 방해하는 거잖아.

나는 이미 페르시스의 집무실에 다다른 상태였지만 그를 방해할 순 없으니 나중에 사과하기로 하곤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집무실 안에서 페르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는 쓸모없어.”

뭉개지는 발음 없이, 또박또박,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쓸모없다. 쓸모없다. 쓸모없다.

나를 쓸모없다고 단정 짓는 페르시스의 목소리가.

나는 그 자리에서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충격에 휩싸여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쳤으면 좋았을 것을, 끝내 더욱 잔혹한 말까지 듣고 말았다.

“내가 좀 더 이성적인 사람이었더라면 메이를 고아원에서 데려오지 않았을 거야.”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큰 충격에 정신이 온전치 않아서 이후의 대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 기억이 끊기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황급히 달리고 있었다.

페르시스의 집무실에서 최대한 멀어질 수 있도록. 그 잔인한 음성이 들리지 않도록.

그러다 철푸덕, 복도 한복판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어라, 몸이 고장 나 버렸나.

분명 넘어졌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주저앉은 채로 가만히만 있다.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아프다. 시큰거리고 따끔거리고 스치는 바짓자락에도 괴로운 걸 보니 멍이 드려나 보다.

정말 난 나약하다. 이보다 나약할 수 없다. 내가 조금 더 강했으면 거뜬하게 다시 일어섰을 텐데.

적어도 쓸모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을 텐데.

나는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의 목소리를 읊었다.

“이성적인 사람이었더라면 날 고아원에서 데려오지 않았을 거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날 키우겠다고 데려와 놓곤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뭐가 부족하고, 뭐가 못나서?

“원작 스텔라는 조건 없이 예뻐해 줬었잖아…….”

원작 스텔라한테는 아들로 살라고도 하지 않았잖아. 화를 내지도 않았고, 쓸모를 따지지도 않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줬잖아.

“근데 나는 왜…… 나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길래…….”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지 않는 거야?

***

“메이는 쓸모없어. 내가 좀 더 이성적인 사람이었더라면 메이를 고아원에서 데려오지 않았을 거야.”

페르시스는 제 앞의 소파에 앉은 하인드에게 말했다.

하인드는 심각해졌다. 페르시스는 메이가 들었으면 상처받았을 말을, 자식에게 하기에는 지나친 말들을 개의치 않고 퍼붓고 있었다.

“애한테 쓸모없다니. 부모가 자식한테 어떻게 그리 말할 수 있어.”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쓸모없는 게 맞지.”

“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거야? 사람한테 쓸모를 따지고 있잖아. 그것도 한참 어린 애한테.”

“쓸모를 따져야 손해를 안 보지.”

하인드는 기가 막히다가도 한숨이 나왔다.

“그래, 그럼 네 가치관대로 쓸모를 따져 보자. 너, 그 아이 없이 살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이지?”

“그 아이를 지금 이 순간부터 평생 못 본다고 해도 괜찮냐는 거야.”

“…….”

페르시스는 무언가 대답하려는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잖아. 네 자식인데 어떻게 평생 못 보고 살 수 있겠어. 그래서 너도 메이를 고아원에서 데려온 거잖아.”

“…….”

“그런데도 쓸모가 없어? 그 아이 존재 자체가 네게 쓸모 있는 거 아니야? 그 아이 없이는 못 살잖아.”

“……곁에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아서 데려온 거야. 없이 못 살 정도로 그 아이가 내게 주는 영향이 크지 않아.”

사실이 아니었다. 메이를 고아원에 보낸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메이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런데도 페르시스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겠다고 거짓을 택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메이는 너한테 의미 있는 존재잖아. 메이에게 손을 댔던 사기꾼들도 죽여 버렸다며.”

“…….”

“그러니까 그렇게 무감정하게 말하지 마. 메이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지 네 말을 들었다면 속상해서 울고도 남았을 거야.”

안타깝게도 페르시스는 하인드의 진심 어린 충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메이가 속상해하든 말든, 울든 말든 자신이 신경 쓸 필요 없다.

페르시스는 아버지처럼 미련하게 살기 싫어서, 이미 무감정하게 살기로 결심한 후였으니까.

***

저녁에 페르시스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예정돼 있던 일은 아니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페르시스와 마주쳤는데 요한이 같이 식사하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그와 함께 식당에 오게 되었다.

아, 입맛 없는데.

테이블에 호화로운 음식이 차려져도 맛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와 달리 페르시스는 밥이 잘만 넘어가는지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쥐었고, 나는 멍하니 허공만 봤다.

그러다 그에게 물었다.

“만약에요. 제가 그때 마차에서 싫다고 했으면 안 데려갔을 거예요?”

페르시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들로 살기 싫다고 했으면 저를 안 데려갔을 거냐고 여쭤보는 거예요.”

노예로 팔릴 뻔한 나를 구해 줬던 그날. 나를 키워 주겠다는 조건으로 가문의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는 남자애로 살라고 했던 그날을 언급하는 거였다.

페르시스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랬겠지.”

그 한마디를 들으니 아까 넘어질 때 멍든 자리가 더욱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역시 내 쓸모는 아들 행세를 하는 것, 딱 그뿐이라고 여기는 건가.

하지만 딸은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 쓸모없다기엔, 내가 친딸이 아닐 수도 있어서라기엔…….

원작 스텔라는 예쁘게 키웠잖아. 걔도 여자애고, 친딸도 아닌데.

어쩌면 난 친딸일 수도 있는데.

나는 고통을 꾹 참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이번 질문엔 용기가 필요했다.

“또 만약에요, 제가 지금 아들 행세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면…… 전 어떻게 되나요?”

내 말을 끝으로 식당에 있던 모든 시종들이 내게 주목했다. 그들의 표정엔 걱정스러움이 역력했다.

아들 행세를 하기 싫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페르시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말이니까.

“……나와 한 약속을 어기겠다고?”

“어기겠다는 뜻은 아니고-”

나는 이어서 ‘허락해 주신다면 딸로 살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페르시스가 말을 끊어 버려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약속을 어길 생각이라면 이 집에서 나가.”

순간,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숨이 멎은 듯이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강고하게 나올 거라 상상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생각보다 더 충격이었다.

그에게 정을 붙인 스스로가 미워질 정도로.

더는 이 자리에 있지 못 할 것 같아서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식사를 끝냈다.

“애처럼 굴어서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갈 때까지도 페르시스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홀로 복도를 걸었다. 넓은 복도가 외딴곳처럼 낯설었다.

‘메이는 쓸모없어.’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기사단에 들어가 증명할 거다. 멋진 수호 기사가 되어 보란 듯이 이 집을 나와 홀로 잘 살아갈 거다.

그러니 꼭 기사단에 들어가야만 한다.

요한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식사를 끝낸 메이가 걱정스러웠지만 페르시스는 그렇지 않은지 마저 식사를 이어 갔다.

그는 메이가 자신의 말로 인해 상처받았다는 걸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으려는 듯했다.

자신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고로 잘못한 것도 없다.

메이는 이번 일을 통해 오히려 약속에 대한 책임감을 배운 거다.

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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