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8화
“내가 바쁘다는 걸 요한에게 들었을 테지.”
나는 죄인이 된 것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업무 중에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는 것도 요한이 알려 줬을 테고.”
“……맞아요.”
“그런데도 방해하는 저의가 뭐지? 겨우 수호 기사 제의를 받은 게 내가 가문을 운영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나?”
“…….”
“메이 플로티나, 내게 가산을 관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가 자산 관리에 열심인 이유는 하나다. 가문의 명맥을 이어 가기 위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가문에 쓸모가 없다며 딸을 버렸던 사람이지 않은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나중에 해. 그게 뭐든 간에 내 일을 방해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정말 이상한 것은.
그에게 온정을 바라는 내 마음이겠지.
***
그날 밤, 나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달빛이 만들어 낸 지루한 천장 그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아무리 개차반일지라도 내 아빠이므로 내게 아빠로서 최소한의 대우를 해 주길 바랐다.
고아원에 가기 전에는 이런 마음이 들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을 의지만 확고하게 있어서, 그가 날 자식으로 대우해 줬으면 하는 마음 보단, 어떻게든 플로티나에서 살게만 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그가 내 아빠가 되겠다고 한 이후로 나는 한없이 어린아이, 어린 자식이 되어 버렸다.
페르시스가 좋은 것도 아닌데 스텔라처럼, 여느 딸들처럼 같이 외출하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그가 바쁜 걸 알면서도 투정을 부렸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시간을 내어 주면 안 되겠냐고.
그리고 돌아온 건…….
‘메이 플로티나, 내게 가산을 관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나중에 해. 그게 뭐든 간에 내 일을 방해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자식 마음에 멍이 드는 줄도 모르고.
잠이 오지 않는다. 바라보는 천장이 누군가의 표정처럼 진절머리가 날 만큼 변함이 없다.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감았다.
‘아빠! 같이 쿠키 먹어요!’
‘그래. 네가 좋아하는 커피맛 쿠키를 가져오마.’
‘아빠! 저녁은 외식할까요?’
‘먹고 싶은 게 있니? 네가 원한다면 어디든 데리고 가겠다.’
‘아빠!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자도 되죠?’
‘물론이지. 오늘은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 줄게.’
내가 있는 곳이 꿈속임을 자각하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금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저 다정한 인간이 페르시스일 리 없기 때문에.
‘아빠, 내일은 같이 쇼핑하는 게 어때요? 갖고 싶은 드레스가 있어요.’
‘우리 따님 뜻대로.’
지독하리만큼 따뜻하고 평화로워서,
지독하리만큼 비참한 꿈임을.
***
다음 날 아침. 페르시스는 그의 집무실에서 상단주인 쿠투스 백작과 상단 마물 수급 관련 계약을 진행했다.
여름날의 한창 무더울 시각, 계약을 성사시킨 쿠투스 백작이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페인트 구역은 헤스티아 님이 단장인 제3기사단이 주로 사냥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굳이 같은 곳에서 사냥해 좋을 게 없죠.”
쿠투스 백작은 고른 치열을 보이며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잿빛 수염이 입매를 따라 함께 올라갔다.
“그렇다고 엘람이 마음에 들어서 계약한 건 아니야. 페인트 쪽은 백작 말대로 사냥꾼들이 많으니 다른 곳을 택한 거지.”
“그래도 헤스티아 님과 엮여서 좋을 건 없잖습니까?”
쿠투스 백작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를 잘 모르는 이가 봤으면 자칫 얄미울 수도 있겠으나 그는 페르시스가 계약에 응해 줄 정도로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괜히 페인트 구역에서 사냥을 하다가 3기사단과 동선이 맞물려 기사를 다치게 했다가는…….”
백작은 자기가 말해 놓곤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골치 아파지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각하께선 강하셔서 공격을 잘못 맞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 경우를 또 상상했는지, 곧 백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기사가 죽기라도 한다면…… 헤스티아 님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헤스티아 님은 제3기사단 기사들을 아들이라 부를 정도로 아끼시니…….”
“…….”
페르시스가 헤스티아와 그녀의 기사단에 관해 별 관심이 없어 보이자 백작은 얼른 주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안색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작년 이맘때쯤에 찾아왔을 때보다 훨씬 낯빛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페르시스는 작년에 비해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악몽을 꾸지 않아서인가.’
메이를 플로티나로 다시 데려온 후로부턴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더는 비체가 자신을 배신하고 버리는 꿈을 꾸지 않게 된 것이다.
꿈 한 번 꾸지 않고 질 좋은 숙면을 취하니 안색이 안 좋을래야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악몽을 안 꾸게 됐는지는 모르겠군. 매일같이 따라오던 지독한 악몽이었는데.’
그 아이의 긍정적인 기운을 받기라도 한 건지…….
탁탁! 쿠투스 백작은 정리한 서류를 카멜색 사첼백 안으로 고이 넣었다.
“참, 플로티나에 후계자가 생겼다는 소문에 사교계가 떠들썩합니다. 각하께 열 살이 된 아드님이 존재한다는 소문이요.”
페르시스의 미간이 못마땅하다는 듯 좁혀졌다.
“그 소문을 누가 퍼트렸지?”
“흐음, 글쎄요……. 플로티나를 예의주시하는 가문이 한 짓이 아닐까요? 플로티나를 상대로 헛소문을 퍼트렸을 리는 없고…… 정보꾼을 붙여서 정보를 밀수했나 봅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정보꾼을 붙이는 일이야, 파다하죠.
백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페르시스는 남들이 메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게 불쾌했다.
“그럼 이번엔 백작이 소문을 퍼트려.”
“어떤 소문을 말입니까?”
“감히 내 아들 얘기를 꺼냈다간 목이 날아간다는 소문.”
이를 들은 백작은 순간 몸이 얼었으나 애써 웃으며 넘어갔다.
“하하…… 그,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르시스는 정말로 사람의 목을 날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보라. 지금도 눈빛이 당장 누구 하나 목을 날릴 것 같지 않은가. 애써 미소를 짓긴 했지만, 백작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음 수급 때 다시 뵙도록 하죠.”
“그러지.”
소파에서 몸을 냅다 일으킨 쿠투스 백작은 페르시스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응접실에서 나갔다.
페르시스가 앉은 소파 뒤편에 서 있던 그의 호위기사 요한은, 쿠투스 백작이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페르시스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을 그렇게나 아끼시면서 어제는 왜 화를 내신 건가요?”
페르시스는 아무 말 없이 창밖에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요한이 언급한 대상을 떠올려 냈다.
메이 플로티나.
그 꼬맹이는 최근 자신을 귀찮게 했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문 좀 열어 주시면 안 될까요?’
‘분명 들으면 놀라실 거예요! 엄청난 소식을 갖고 왔어요!’
‘바쁜 거 알지만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
‘오늘도…… 바쁘신 거예요?’
답지 않게 애처럼 굴었다.
왜 그랬을까.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그 나이였을 땐 아버지를 귀찮게 한 적 없으니까.
아버지에게 떼를 쓴 적도, 투정을 부린 적도, 아버지를 귀찮게 한 적도 없어 메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정 없이 자라 왔던 페르시스와 달리, 요한은 메이가 왜 그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도련님은…… 칭찬과 축하를 받고 싶으셨던 걸 거예요. 주인님께 칭찬과 축하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더욱요.”
요한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제 페르시스가 메이에게 했던 말, 행동, 표정을 제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련님께 잘했다고, 축하한다고 해 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나 페르시스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직은 정식 수호 기사가 아니야. 칭찬과 축하 같은 건 정식으로 수호 기사가 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
요한은 제 주인에게 이리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면 사과는 하실 건가요?’
가산을 관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한 말.
그것은 몇 번을 돌이켜 생각해 봐도 페르시스의 잘못이었다. 그 날카로운 말이 작은 소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었겠는가.
안타깝게도 요한은 페르시스에게 직접 물을 수가 없었다. 제 주인에게 사과하라 마라 할 위치가 아니었기에.
대신, 가여운 소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용기를 내 다시 권유했다.
“오늘 저녁은 도련님과 같이 식사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계약을 마쳤으니 내일부턴 마물 사냥을 시작하느라 바빠지실 거고, 이따 점심엔 나제트 후작님이 방문할 예정이니 시간이 나는 건 오늘 저녁뿐이시잖아요.”
먼저 같이 식사하자고 하시면 도련님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
요한은 대답 없는 주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다. 표정이 없는 게, 이번에도 자신의 이익을 따지는 듯했다.
겨우 자신의 자식과 식사하는 일일 뿐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