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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7)화 (37/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7화

그날 나는 나제트가에 찾아갔다. 스텔라를 만나러 온 건 초콜릿을 만든 후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페르시스가 내게 잘 대해 준 것부터 시작하여 갑자기 태도가 변한 것, 기사 제의를 받은 것, 나를 안 만나 주는 것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친구가 되니 허물없이 내 속마음까지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스텔라는 소파에 앉아서 버터 쿠키를 와작와작 씹으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각하껜 얘기 안 했다고?”

나는 손에 든 쿠키를 먹으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못 한 거지. 내 의사가 반영되어 안 한 게 아니라.”

“이상하네…… 만들어 준 초콜릿도 맛있게 먹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데려다주겠다고 하고, 네가 싫지 않다고도 말하고, 재워 주기까지 했는데…… 넘어진 너를 보고도 일으켜 주지 않고 그냥 갔다라…….”

어떻게 하룻밤 새에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변할 수 있지?

“너, 뭐 잘못했어?”

“아니야. 처음엔 나도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어. 난 그냥 평소대로 지냈거든.”

“흐음…….”

페르시스의 태도가 어떤 연유로 변한 걸까 열심히 추리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치부해 버리는 게 속이 편할 정도였다.

스텔라 역시 답답함을 느꼈는지 추리를 때려치웠다.

“야, 그냥 집무실 문 팍! 열고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돼?”

“어떻게 그러냐…… 예의 없게.”

“예의 없긴 해도 네 얘기를 들으면 적어도 혼내진 않을걸?”

수호 기사가 되는 건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로또 1등 당첨된 것보다도 확률이 적고 더 값진 일이잖아.

“열흘씩이나 안 만나 줬다는 원인 제공을 한 것도 그쪽이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혼낼 거야. 일할 때 방해받는 거 싫어한다고 했거든.”

“혼나더라도 시도는 해 보는 게 어때? 이참에 딸로 살고 싶다고까지 얘기해 봐.”

혹시 알아? 마음이 바뀌어서 아들이 아니라 딸로 살게 해 주겠다고 할지.

“…….”

나는 아직 베어 물지 않은 버터 쿠키를 지그시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스텔라 말대로 이렇게 참고 있는 것보단 무언가 시도라도 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한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미 아들로 살아가기로 약속했는걸. 그게 내가 플로티나로 돌아오는 조건이었고.”

페르시스가 먼저 나서서 딸로 살라고 하면 모를까, 조건에 응했던 내가 먼저 나서는 건 차마 할 수 없다.

내 처지를 아는 스텔라 또한 그게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내가 아빠의 친딸임이 증명되기 전까진 이대로 살아야 할 것 같아.”

그에게 자기 핏줄이 아닌 딸은 필요가 없으니까.

스텔라는 페르시스의 인성에 혀를 찼다.

“그런 사람이 널 자식으로 키우겠다고 한 게 신기할 정도네.”

“그러게. 나도 신기해.”

그날, 사기꾼을 죽이고 다시 플로티나로 데려온 날, 그가 내게 그랬었다.

‘네가 필요해졌어. 내가 널 자식으로 인식하게 됐어.’

당시엔 단순히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다. 길진 않았지만 같이 지냈으니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날 데려왔으면서 방치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이래서야, 갖고 싶었던 물건을 구매한 후 집구석에 내팽개쳐 두는 거랑 같지 않은가.

“네가 아들 역할을 너무 잘해서 그런 건 아냐? 알아서 척척 잘하니까 저절로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거지. 그래서 딱히 아들 행세를 그만두게 할 마음도 없는 거고.”

음. 스텔라의 말도 일리가 있다. 아프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체력 관리도 부쩍 신경 써서 아픈 적도 없었고, 주어진 숙제도 알아서 척척 잘 해냈으니 그로서는 신경 쓸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알아서 척척 잘 해내는 게 부모의 방치를 허락하는 건 아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아빠는 나보다 일이 우선인 거야. 아들 행세를 그만두라 하지 않는 건 자기 자존심 때문일 거고.”

스텔라는 듣기만 해도 고구마를 100개 먹은 듯이 목이 막히는지 우유컵을 급히 잡아 들었다. 우유를 쭉쭉 들이켠 후, 테이블에 탁! 내려놓고 말했다.

“답이 없다. 성인 되면 한몫 챙겨서 기사단으로 가출해 버려. 자식 잃고 후회나 엄청 하라지.”

난 헛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넌 부럽다. 다정한 아빠가 있어서.”

딱히 스텔라와 하인드의 다정한 모습을 본 건 아니지만 안 봐도 뻔하다. 아빠가 하인드인데 지나치도록 다정하겠지.

“다정하지. 원작 스텔라가 왜 숙부가 아닌 플로티나 공작을 택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나는 몸을 소파에 온전히 맡긴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누구나 꿈꾸는 다정한 아빠와 딸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언제 어디서든 딸을 보호해 주는 듬직한 아빠.

같이 하하호호 떠들며 오랜 친구 같은 아빠.

아무리 바쁘더라도 언제나 딸이 우선인 아빠.

페르시스가 하인드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다정하고 딸을 예뻐하는 사람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

내가 헛된 꿈을 꾸는 사이, 스텔라는 탁상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너 이제 가야 하지 않아?”

그 말에 나는 꿈에서 나와 눈을 뜨곤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너랑 있으니까 시간 빨리 간다, 히히.”

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스텔라는 기분이 좋은지 피식 웃다가도 그런 자신에게 자존심이 상하는지 바로 웃음을 지우곤 못 들은 척했다.

“그래서, 다음엔 언제 올 건데?”

“음…… 내일?”

“내일? 내일은 못 놀아.”

“왜?”

“아빠랑 데이트 약속이 있거든.”

“아…….”

아빠랑 데이트라니.

순간 속상한 감정이 일렁인 건 왜일까. 어쩌면 속상한 게 아니라 부러운 걸지도 모른다.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다음 주에 올게.”

“그래.”

그러나 다음 주가 되어 나제트가에 찾아갔을 땐 스텔라를 만날 수 없었다.

“공자님, 지금 아가씨께선 후작님과 외출 중이라 안 계십니다. 아마도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돌아오실 듯한데…… 다음에 다시 찾아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그녀에게 정확히 며칠에 올 건지 전하지 않은 탓에 일정이 엇갈리고 만 것이다.

나제트가 집사의 말을 들은 나는 왔던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요.”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터덜터덜. 다시 마차로 향하는 길이 즐겁지 않았다.

스텔라는 후작님과 외출을 자주 하는구나.

어쩌면 자주 하는 게 아니라 보통의 아빠와 딸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놀러 다니는 걸지도 모른다.

보통의 아빠와 딸 사이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게 평범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전 생을 살았을 때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내가 막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엄마와 단둘이 살았던 나는 성인이 된 후 엄마의 장례식장을 치를 때마저도 아빠를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메이의 몸에 빙의되었고, 생겼다는 아빠가 페르시스.

그러니 경험해 봤을 리가 없지.

내 처지를 한탄하며 마차에 올라타니 마차 바퀴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는 바깥은 덧없이 화창했다. 외출하기 좋은 날씨였다.

‘나도 아빠한테 같이 외출하자고 해 볼까…….’

기사 제의를 받았다는 걸 알려 주면 분명 맛있는 걸 사 줄지도 모른다. 맛있는 거 먹으면서 오해도 푸는 거지!

예를 들면 넘어진 날 그냥 두고 간 건 화장실이 급해서였다든가?

대화를 하다 보면 우리도 점점 평범한 부녀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외출하자고 해 보자!

아무리 바빠도 반나절, 아니, 식사만이라도 하러 나갈 순 있겠지.

그리 결심한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페르시스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의 집무실 앞에선 요한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저번과 같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오늘도 주인님을 만나 뵙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3분이면 돼요. 3분 정도는 내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수호 기사 얘기를 먼저 꺼내면 3분이 뭐야. 같이 외출도 해 줄 것이다!

“제발요. 물어보기라도 해 주세요.”

내가 반짝반짝한 눈빛을 보내니 요한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나 보다. 주저하던 그가 방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도련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돌려보내.”

문 너머로 단칼에 거절하는 음성이 들려오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잠깐 대화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자식이 대화하자는 데도 거절하는 것인가.

하지만 오늘은 나도 절대로 물러날 의향이 없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방문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외쳤다.

“잠깐이면 돼요. 잠깐만 시간을 내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의 답은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듣긴 들은 건지, 혹시 내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은 건지 의문이 들 때쯤 방문이 열렸다. 페르시스가 문을 연 것이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니 싸늘한 낯이 시야에 들어왔다.

“……들어와.”

늘 그랬듯 무표정이지만, 오한이 들 정도로 무서운 낯의 페르시스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죽일 것만 같자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발은 얼어붙어서 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내가 괜한 오기를 부렸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왜 안 들어오지? 여기서 말하려고? 할 얘기가 있을 거 아니야.”

음절 하나하나가 내 귓가를 무섭게 때린다. 일을 방해해서 화가 난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 시선을 떨군 채로 입을 열었다.

“그게…… 제가 수호 기사…….”

“수호 기사 제의를 받았다고?”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어투에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가 올라갔다.

“그, 그걸 어떻게…….”

“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정신계 마법을 걸어놓은 게 아닌 이상.”

그에게 정신계 마법을 건 게 내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내게 상처를 입혔다. 별것도 아닌 거에 상처를 받는 것 같아 스스로가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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