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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5)화 (35/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5화

나는 밤이 되도록 창밖을 보며 페르시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제 페르시스가 날 재워줬었지?

냉혈한답지 않게 내 방까지 날 안고 들어가더니 나를 침대에 눕히곤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졸렸던 터라 그 상태로 금세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왜 친절하게 굴었을까. 단순히 초콜릿을 선물했기 때문이라기엔 친절이 과했다.

‘설마…….’

페르시스가 다정해질 징조일까? 원작에서 그가 스텔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젯밤 생성된 자그마한 희망은, 기대라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성질로 빠르게 변질됐다.

‘덕분에 잘 잤으니 고맙다고 해야지.’

그것이 내가 외출한 페르시스를 기다리는 이유였다.

“도련님, 주인님께서 오셨어요!”

페르시스는 밤늦게서야 집에 돌아왔다. 밖엔 굵은 비가 물 붓듯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조안에게서 페르시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달받고선 얼른 안뜰로 내려갔다. 계단을 총총총 내려가서 반갑게 그를 맞이했으나.

“다녀오셨-”

휙.

“어……?”

페르시스는 보는 사람이 다 무안할 정도로 나를 가뿐히 무시하고 지나쳤다.

바로 앞에서 인사를 무시당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인사를 못 들었나? 못 들을 위치는 아닌데…….’

하지만 그가 내 인사를 못 들은 게 아니고서야 나를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전날 나를 친히 재워 주기까지 한 사람인데.

역시 못 들은 게 분명하다.

나는 그를 따라 걸으며 다시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마물 사냥 다녀오신 거예요?”

“…….”

침묵. 그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바로 옆에서 큰 목소리로 말했으니 못 들은 건 아닐 터였다.

표정이 어제와는 다르게 차갑다. 밖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지만.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우뚝, 멈춰 선 페르시스가 내뱉은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이 몇 시야. 귀찮게 굴지 말고 들어가.”

그의 대답이 놀라울 만큼 냉랭하고도 쌀쌀맞아서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왜 쌀쌀맞게 구는 거지? 내가 뭘 실수한 걸까……?

페르시스가 다시 복도를 걷고, 나는 그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내려고 애쓸 때였다.

콰광―!

우르릉 쾅쾅!!!

밖에서 저택을 삼켜 버릴 듯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플로티나 저택이 정전되고 말았다.

정전되어 시야가 캄캄했다. 그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앞을 저으며 한 발짝 두 발짝 앞으로 내딛다가 그만 페르시스의 신발을 따라 들어온 빗물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으앗……!”

넘어지기 직전, 크고 힘 있는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사, 살았다…….

누군가 붙잡아 준 덕에 다행히도 넘어지지는 않았다.

때마침 집 안에 불이 돌아왔고,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잡아 준 사람을 확인했다. 혹시 페르시스일까 싶었는데, 역시 그였다. 그럼 역시 그는 내게 화가 나거나 내가 싫어진 게 아닌 걸까?

그가 붙잡은 내 팔을 높이 들어 주고 있는 바람에 나는 그에게 반쯤 매달려 있는 상태여서 그의 얼굴을 보다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에 따뜻함은 없는 눈동자.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얼굴에, 아까의 싸함은 역시 별거 아닌 듯했다.

“잡아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손을…….”

그는 내가 손이라는 단어를 말하기 무섭게 나를 뿌리쳤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한 사람처럼.

“어어?”

그가 갑자기 나를 뿌리치듯 놓아 버린 바람에 결국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얏-!”

찌릿찌릿한 고통과 함께 엉덩이가 아려 왔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난 상태로 그를 쳐다보니 그도 놀란 듯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표정을 굳히곤 내게 등을 돌렸다. 걱정하거나 미안해하는 행동 없이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비에 젖은 신발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뭐야……? 넘어진 걸 보고도 그냥 가는 거야? 누구 때문에 엉덩방아 찧었는데?

손을 잡아서 일으켜 주는 매너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처럼 그는 얼마 안 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어제 나를 직접 방까지 데려다주면서 보였던 잠깐의 다정함과는 전혀 다른 싸늘함이었다. 그게 왠지, 조금 섭섭했다.

“뭐야……. 너무하잖아…….”

***

어제는 날씨가 꿀꿀한 대신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했다면 오늘은 날씨가 좋은 대신 하루를 꿀꿀하게 시작했다.

어젯밤 안뜰에서 벌어졌던 일이 자고 일어나도 잊히지 않았다.

어제는 왜 그랬던 걸까. 지금은 집에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고…….

요 근래 페르시스는 자주 외출해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야. 친절할 땐 언제고…….”

나는 화원에서 홀로 산책하며 조용히 투덜거렸다. 전날 비가 와서 생긴 물웅덩이가 보이자 페르시스를 유인해서 빠트려 볼까 하는 사악한 생각도 했다.

“물웅덩이에 빠져서 발이 젖으면 칠색 팔색 하겠지?”

흐흐흐. 상상해 보니 사악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페르시스를 두고 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플로아가 내 앞에 뿅! 하고 나타났다.

“메이 님.”

“까, 깜짝아!”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놀란 나는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놀라셨습니까?”

“당연하죠! 갑자기 눈앞에 뿅 나타났는데…….”

“메이 님을 만나러 온 손님이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되물었다.

“손님이요……?”

어떤 손님이 왔다는 걸까. 딱히 날 보러 올 사람은 없으니…… 스텔라려나?

플로아를 따라서 가제보로 향하니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그 두 얼굴을 본 순간, 꿀꿀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벅찬 기분만 가득하였다.

얼마 전 기차에서 보았던, 그리고 친절히 샌드위치도 양보해 주었던 수호신,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였다.

가제보에 앉아 있던 아이리스도 날 발견했는지 반갑게 불렀다.

“아가!”

“아이리스 님, 카시우스 님!”

나는 곧장 그녀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아이리스는 나를 안아 들어서 그녀의 무릎에 앉혔다.

내게 환한 미소를 보이는 그녀는 여신이 따로 없었다.

“아가,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어요! 아이리스 님은요?”

“난 바빴어. 기사단을 이끌고 마물 사냥했거든. 그러다 시간이 났는데 네가 생각나서 찾아왔어.”

“잘 오셨어요!”

내가 아이리스만 바라보자 옆에 있던 카시우스가 내 손등을 콕콕 건드렸다.

“나도 왔어. 나도 봐 줘, 메이.”

“카시우스 님도 환영해요!”

내가 카시우스와 마주 보며 생글거리는 사이, 플로아도 가제보에 착석했다.

“메이 님을 안는 것은 올해까지야. 내년부터는 안지 마.”

플로아의 말에 아이리스는 반발했다.

“네가 결정할 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아가가 안기고 싶다 하면 안는 거지, 그치?”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하지만 플로아는 여전히 단호했다.

“메이 님은 플로티나의 후계자야. 아무리 너라도 서로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어.”

그 말엔 반박할 곳이 없어서 나와 아이리스는 수긍했다.

하긴, 나중엔 아닐지 몰라도 일단은 난 후계자로 길러지고 있으니까…….

그때, 카시우스가 표정을 구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건…… 메이를 죽을 때까지 남자로 살게 하겠다는 거야?”

카시우스도 아이리스도 내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신계 마법은 발휘자보다 마력이 적은 자에게만 통하므로 플로아보다 마력이 많은 카시우스와 아이리스는 정신계 마법이 통하지 않아 내 성별을 알 수밖에 없었다.

카시우스의 물음에 가제보에 머물던 공기가 무거워졌다. 이렇게 분위기가 어두워질 만한 얘기는 아닌데.

나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그들에게 내가 메이로 살며 겪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내가 페르시스 몰래 키워졌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내가 그의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고아원으로 내쫓으려 하자 아들로 살겠다고 한 것, 고아원에 갔다가 다시 플로티나에 돌아온 것까지.

이를 듣는 카시우스와 아이리스는 가주라지만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냐며 분노하더니 앞으로 남자로서 계속 살아가야 할 내가 걱정된다며 근심했다.

“괜찮아요. 어쩌면 아빠가 마음이 바뀌어서 저를 딸로 키울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아이리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눈빛을 보니 나를 대견스럽게 보는 듯했다.

하긴. 나라도 웬 열 살짜리 아이가 살아가기 위해 남자로서의 삶을 택했다고 한다면, 그 황당한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말한다고 한다면 조금 대견스러워할 것 같았다.

아이리스는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내 양 팔뚝을 붙잡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가, 성인이 되면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지 않을래?”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기사단이요……?”

“응. 내가 운영하는 제1기사단에 들어와, 아가.”

세상에.

나는 놀라서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수호 기사 선출은 몇 년에 한 번, 매우 적은 인원에게만 이루어진다. 로또 1등 당첨보다도 어려운 게 수호 기사가 되는 건데, 그걸 내게 제안하고 있는 거다. 심지어는 기사 선출 시기도 아닌 때에 이렇게 어린 나이인 나한테!

미성년이 기사단 가입 제의를 받은 것은 지금까지 전례가 없다. 나는 너무 놀라기도 하고 믿기지도 않아서, 커다랗게 뜬 눈을 서너 번 멍하니 깜빡이곤 다시 물어보았다.

“정말요……?”

정말로 제가 수호 기사가 되어도 돼요?

아이리스의 눈매가 생긋 호선을 그렸다.

“수호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해야 할 상황이 와도 아가한테는 절대로 하지 않고.”

“우와아!”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함빡 웃으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막연히 수호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있었다. 그러나 수호 기사는 내가 노력한다고 하여 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초등학생일 적, 나중에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만큼 현실성 없는 꿈이었다.

그런데 내가 수호 기사 제의를 받다니. 내가 기사가 될 수 있다니! 그것도 천사 언니 기사단의 기사가!

페르시스도 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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