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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4)화 (34/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4화

페르시스가 초콜릿만 먹자 그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어 줘서 좋긴 한데…… 언제까지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설마 다 먹을 때까지??

먹는 속도가 느려서 다 먹으려면 밤을 꼴딱 새워야 할 판이었다.

“하암-”

내 입에서 하품이 나오고 나서야 페르시스가 드디어 내게 관심을 가졌다.

“졸릴 시간인가.”

나는 어서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이 눈을 비비며 졸린 티를 팍팍 냈다.

“졸려서 그런데 자러 가도 될까요?”

“그래. 키 크려면 자야지.”

나이스! 나는 소파에서 나와 페르시스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방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페르시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다주지.”

“……? 데려다주신다고요?”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냐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래. 데려다줄게.”

나는 그니까 왜요? 라고 물으려다가 초콜릿을 줘서 고맙다는 표현인 것 같아서 그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고마울 만하지. 수제 초콜릿인걸? 게다가 입맛에도 맞아 보였고.

“좋아요, 데려다주세요!”

페르시스는 열려 있던 초콜릿 상자를 덮고선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문 쪽이 아닌 내 쪽으로 다가오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이쪽으로 와? 혹시 손잡으려고?

손을 잡는 게 우리 둘 사이에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색하거나 피할 정도까지는 또 아니어서, 나는 그런가 보다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 앞으로 다가온 그는 내 손을 무심하게 지나쳐 내 옆구리로 향했다.

페르시스가 두 손으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뭐지? 안고 데려다주는 건가? 선물 준 게 그렇게 감동이었어?

안을 줄 몰랐던 내가 얼떨떨한 반응을 보인 반면, 페르시스는 태연했다.

“가자.”

그에게 안긴 채로 나온 복도는 밤이라 그런지 조용하고 깜깜했다. 사람이라곤 우리 둘밖에 없었다. 혼자였으면 조금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페르시스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 개차반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를 감싼 그의 따뜻한 온기에 더더욱, 심히 이상해진다.

……내가 페르시스를 잘못 평가했던 걸까?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어쩌면 그는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그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

지금 이 순간, 이 끝없는 어둠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처럼.

터벅터벅.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의 리듬이 내 심장 소리의 리듬과 같아질 때.

나는 페르시스가 내가 평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혔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발소리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이젠 제가 좋은 거죠?”

***

밤공기가 더욱 차가워지는 새벽. 페르시스는 메이의 침실에 있었다.

1시간 전에 그가 메이를 침대에 눕혀 재운 후 아직까지도 돌아가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뽀얀 이마가 드러나게끔 메이의 앞머리를 넘길 무렵. 플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콜릿을 받으셨나 봅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플로아는 페르시스가 기분이 좋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다 보고 있었나.”

“보고 있었죠.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길래 무엇 때문인가 했더니만 메이 님께 선물을 못 받으셔서 그랬던 거지 않습니까.”

플로아는 자신이 받은 선물을 페르시스에게 보여 주었다.

페르시스는 자랑이 하고 싶었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만 선물이 늦은 이유는 신메뉴 개발 때문이었다. 메이는 내게 더 맛있는 초콜릿을 주려고 했던 거야. 단짠 초콜릿이라고 아나? 넌 못 받았겠지만 난 받았어.”

“그러십니까.”

퍽 유치한 모습에 플로아는 나긋하게 미소했다. 페르시스 또한 메이가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를 본 플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와 같은 표정이십니다.”

“그때?”

“페르시스 님께서 가장 행복하셨을 때요.”

페르시스 플로티나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일까.

페르시스는 그때가 언제였는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아차린 후엔, 표정이 급격히 빠르게 굳어졌다.

“비체…… 그 여자와 함께였을 때와 같은 표정이라고?”

지금 내가?

“표정이 밝지 않습니까. 좀처럼 밝은 표정은 찾아보기 힘든 분인데.”

일순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동자는 정처 없이 떨렸다.

자신이 그때처럼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다니.

페르시스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야.”

“하지만…….”

“아니라면 아닌 거다.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페르시스의 고집에 플로아는 약간 당황했으나 곧바로 정중히 사과했다.

“……기분 나쁘시라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플로아가 사과하는 사이, 페르시스는 혼란스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로지 비체와 함께였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는 말만 머릿속에 떠다녔다.

덕분에 플로아의 해명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1시간 전에 메이와 나눈 대화가 들렸다.

‘이젠 제가 좋은 거죠?’

꼬맹이가 뜻 모를 질문을 던지자 자신은 멈칫, 하곤 튕겨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처음엔 절 싫어하셨잖아요.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을 안아 줄 리는 없으니 이젠 제가 좋아지신 거죠? 그런 거죠?’

꼬맹이는 큼지막한 눈을 깜빡거리며 무구한 목소리로 그런 말들을 내뱉었다.

꼬맹이의 푸른 눈동자로부터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으나 애써 눈을 피해 외면했다.

‘왜 대답 안 해 주세요?’

‘딱히 해 줄 말 없다.’

‘아직도 제가 싫어요?’

그 물음에 우뚝 멈춰 서서 다시 그 푸른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러고선 자신이 무어라 했었나.

떠올리려 할 때쯤 플로아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그저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행복해 보인다고.”

예민하게 굴 필요 없는데도 그 여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곤두선 듯 예민해진다.

지금 내가 그 여자를 사랑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라고?

부정하고 싶었으나 불현듯 떠오른 외마디 기억에 실패로 돌아갔다.

‘아직도 제가 싫어요?’

‘아니. 싫지 않아.’

그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했는지는 꼬맹이의 푸른 눈동자에 비쳐 보여 알고 있었다.

자신은 플로아의 말마따나 행복해 보였다.

플로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실제 자신의 모습이 그러하단 걸 깨달은 페르시스는 스스로에게 분노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멍청하게 사랑에 미쳐 살던 때와 같은 모습이라니.

버림받고 그토록 괴로워했으면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니. 또 감정에 지배되었다니.

예민함은 미숙한 화를 끌어냈다.

“차라리 욕을 해. 감정 조절 못 하는 등신이라고.”

이런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난다.

어째서 자신은 이리도 감정적인가.

감정적으로 굴었다간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 아버지를 통해 보기도 했고, 자신이 직접 겪어 보기도 했는데 왜.

페르시스는 자신을 버린 비체 유리에트를 떠올렸다. 그녀는 극심한 살인 후유증을 앓고 있던 그에게 다가와 온기를 나눠 주고 그가 생기를 되찾을 수 있게 한 인물이었다.

페르시스는 그녀를 필요로 했고, 비체 또한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엔 이별을 고했다. 페르시스가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려주며.

그 후 그는 술과 불면뿐인 지옥 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그녀가 임신했다며 다시 돌아왔을 때 페르시스의 가슴 한편엔 그녀에 대한 증오와, 다른 한편엔 기쁨이 있었다.

이를 부정하려 들었지만 이미 그는 그녀에게 머물 방을 내어 주고 있었다. 참으로 비참하게도.

그 일로 다시는 무언가에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기로 했으면서 어째서 자신은 아직도 감정적으로 구는 것인가.

그는 이에 대한 해답을 남에게서 찾으려 했다.

마침, 제 시야에 들어온, 곤히 잠든 메이에게서.

메이라는 자그마한 아이는 페르시스의 원망의 대상이 되기 딱 좋았다.

‘그래, 이 꼬맹이 때문이다.’

자신이 감정에 지배된 건 이 꼬맹이 탓이다. 꼬맹이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평화로웠으니까. 그러니 꼬맹이의 책임이다.

하나, 원망하는 그 순간마저도 그의 본능은 손으로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게 만들었다.

아이를 너무 예뻐해서 쓰다듬는 것처럼.

“!”

그는 손에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느껴지자 반사적으로 손을 뗐다.

꼬맹이를 원망하는 이 순간마저도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자식을 예뻐하는 본능.

페르시스는 힘겹게 본능을 억눌렀다. 억누르는 게 익숙해졌다 싶을 때쯤, 여전히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메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달이 빛을 비추는 지점을 따라 하나하나, 메이의 이목구비를 살펴보았다.

‘이 꼬맹이만 없었더라면.’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이 작은 꼬맹이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성적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

얼마 후, 페르시스는 메이에게서 시선을 떼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났을 때의 표정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덕분에 경각심이 생겼어.”

“어떤 경각심 말입니까?”

“감정을 조절해야겠다는 경각심.”

비체를 사랑한 자신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자신이 이성적이었더라면 비극에도 망가지지 않았을 터.

감정 없이 살아야 한다. 늘 해 왔던 것처럼. 그저 내 이익만 따지면서.

그렇게만 산다면.

후에 어떤 일이 생기든 무너지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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