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1화
“너, 내가 찾아오지 말랬지!!”
“커피 맛 쿠키 가져왔어.”
“누가 그런 거 먹고 싶대?!!”
나는 스텔라가 더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음에도 기어코 찾아갔다.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내게 화를 냈지만 내쫓지는 않았다.
“너도 어려서 커피 못 마시지 않아? 커피 맛 쿠키 중에 제일 커피 맛이 강한 쿠키를 가져왔으니까 맛봐 봐.”
나는 내가 가져온 상자 뚜껑을 열어서 쿠키 하나를 꺼내 스텔라의 입에 들이밀었다.
스텔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절대 안 먹겠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다가도 유혹적인 커피향이 코를 찌르자 입을 서서히 열었다.
쏘옥. 쿠키가 입안으로 들어가니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별말 없는 걸 보니 쿠키가 입에 맞나 보다.
나는 싱긋거리며 내 입에도 쿠키를 넣었다.
“음, 맛있네, 그치?”
스텔라는 나를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보았다. 나는 입안에 있는 쿠키를 꿀꺽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내일은 시간이 안 될 것 같고 모레에 또 올게!”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계획을 짜는 바보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여기가 무슨 친구 집이니? 오지 마!”
“친구 집 맞는데?”
스텔라는 일순 울컥해져서 소리를 꽥꽥 내질렀다.
“누가 친군데?!”
“너.”
“뭐?”
스텔라의 표정은 황당함을 지나 당혹스러움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알만했다. 자신이 괴롭힌 전적이 있는 애가 자기더러 친구라고 하니까 그렇겠지.
“너, 내가 너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까먹었어? 혹시 공작 각하가 굶기니? 그래서 하다못해 그걸 까먹은 거니?”
“다 기억하지. 나보고 나가서 살라고 하고, 내가 곤란해지게끔 거짓말을 하며 울고, 사과해도 끝까지 안 받아 준 거.”
내 말에 스텔라는 더욱 이해를 못 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도 나랑 친구를 하겠다고? 너, 진짜 바보야?”
“아니. 바보 아니야. 그런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바보라고 생각해도 돼.”
스텔라는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진지했고, 진심이었다.
“그건 무슨 말장난이야……?”
“말장난 아니야. 네가 날 바보라 생각해도 상관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왜 상관이 없냐고.”
네게 막 대한 사람이 널 바보라고 생각한다는데 어떻게 상관이 없을 수 있냐고.
“넌 정말 속도 없어? 나한테 사과도 못 받았잖아.”
“평생 사과 안 할 것도 아니잖아.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많은데.”
“뭐……?”
“우리 사이에 나쁜 일이 있었다고 해서 사이가 쭉 안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내 말에 스텔라의 몸이 움찔 움직였다.
“적어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어느 날 내가 메이의 몸에 빙의했을 때, 나는 쉽게 자각했다.
마음씨 따뜻한 엘렌도, 매사에 긍정적인 조안도, 그 누구도 빙의자인 내 처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쫓겨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나 혼자만 알고서 견뎌 내야만 한다는 게 내게 큰 짐이 되었다.
오리 무리에 있는 미운 백조 새끼마냥 완전한 내 편은 없다고 생각할 무렵 스텔라가 등장했다.
나와 같은 미운 백조 새끼.
비록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상처를 받았지만, 마음 한편에선 나와 같은 세계에 살던 사람을 만나 기쁨을 느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원작대로 살지 못할까 봐 내게 함부로 대하는 그 모습에서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행동 방식만 다를 뿐, 아, 이 아이도 나처럼 전전긍긍하고 있구나, 싶었다.
죄의식으로 고아원에 있는 나를 찾아왔을 땐 동질감은 더욱 커져 있었다.
나와 스텔라는 서로를 가까이해야 한다. 그녀만이, 그리고 나만이 같은 빙의자 처지로서 서로의 모든 행동들을 이해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사람이 있어야 남장을 하며 꾸역꾸역 살아가려는 나 자신에게 허망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망가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하여 그녀는, 내가 진심으로 용서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다.
바보 취급당하더라도, 내겐 그녀가 필요하니까.
스텔라의 눈빛이 떨리는 게 보였다. ‘이 바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내 의사를 당당히 밝혔다.
“적어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나와 같은 빙의자를 발견했음에도 서로 모르는 척 지내고 싶지 않아.
스텔라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왜?”
도대체 왜?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전부 기억하면서 왜 나를 원하는 건데? 하는 표정으로.
“인생은 원래 혼자 사는 거잖아. 내가 빙의자이든 원작 주인공이든 네가 알 게 뭐야.”
그저 각자 알아서 살아가면 되는 것을.
“왜 사과 한마디도 안 한 괘씸한 나를 용서하려고 하는 건데…….”
스텔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여자이고, 또래이고, 원작 내용을 알고 있는 빙의자잖아. 공감대를 형성할 게 얼마나 많겠어. 그런 우리가 지난일 때문에 친구가 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사사로운 감정 따윈 버려야 했다. 사람은 감정에 휘둘릴수록 후회하는 법이니까.
“아니면 넌 그냥 내가 싫은 거야? 그래서 친구 하기도 싫니?”
그건 절대 아니라는 듯 스텔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
“내 말은…….”
그녀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런 내가……. 너랑 친구 해도 괜찮겠냐 이 말이야.”
그녀는 같은 빙의자 소녀에게 돈을 줄 테니 나가 살라고 했었다. 혼자 사는 게 위험하면 노예를 구하라는 말도 했었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며.
싫다고 하니 짜증이 나서 울음을 터트려 곤란하게 만들었었다. 몇 번을 사과해도 받아 주지 않았다.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안하무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스텔라를 안아 주며 답했다.
“당연히 괜찮지. 우린 분명 단짝 친구가 될 거야. 그리 믿고 있어.”
스텔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기 바빴다.
“울지 마. 울면 눈 팅팅 부어.”
스텔라는 날 꼭 끌어안았다. 그녀 또한 기댈 사람이 필요했던 것처럼.
“울지 마.”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줬다.
***
스텔라가 눈물을 그친 후,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스텔라는 내게 빙의되기 전의 삶, 소윤의 삶을 들려주었다.
“내가 스텔라가 아니라 소윤이었을 땐, 하루도 빠짐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가난한 집안에, 아이를 키울 줄 모르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키워진 게 그녀였단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 받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가출해서 없고, 일을 하지 않는 아빠가 술만 마시고 있었고.
그런 생활이 10여년간 이어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생각만 할 뿐, 정작 죽진 못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어느 날, 몇 년째 돌아오지 않았던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그녀를 이모 집으로 데려갔다고 했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아빠랑 이혼하겠다나 뭐라나.
그녀는 엄마와 아빠의 이혼에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열심히 알바비를 모아서 독립하면 남으로 지낼 계획이었으니까.
그렇게 이모 집에서 지내는 며칠간 그녀는 로판 소설에 빠지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페르시스의 입양딸》이었다고. 그리고 그 책을 읽고 잠이 들었더니 주인공인 스텔라의 몸에 빙의되어 있었다고.
스텔라가 되었음을 깨달았을 땐 감격스러워서 눈물부터 났다고 했다. 신이 나를 가엾게 여겨 새 삶을 주나 보다고.
이대로 원작처럼 페르시스에게 입양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을 고대했었는데.
그런데 또 다른 빙의자가 등장해 버린 거다. 그녀를 원작대로 살지 못하게 할, 그녀에게 가야 할 행복을 가로막는 나라는 인물이.
“널 보니까 질투가 나고, 불안해지고 화가 났었어. 그래서 괴롭혔어. 정말 미안해…….”
스텔라는 내게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게 정말 미안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고 있는 모습이 목적이 있어서 사과를 했던 페르시스와는 확실히 달랐으니 말이다.
나는 처진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장난스럽게 용서했다.
“그땐 괜찮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 친히 용서해 줄게.”
“바보……. 내가 너였다면 영영 용서 안 했을 텐데…….”
어디 용서만 안 했겠는가. 당한 만큼, 아니 그의 배로 복수했을 터. 스텔라는 그렇게 투덜댔다.
스텔라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뭐 어떠냐는 듯이 싱긋 웃었다. 스텔라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선 하녀에게서 손수건을 가져오라 명했다.
손수건을 건네받은 스텔라는 쿠키 가루가 묻은 내 입가를 세게 문질러 닦았다.
“으휴, 웃을 거면 입 좀 닦고 웃던가. 더러워서야, 원.”
“히히, 그럼 이제 진짜로 친구인 거지?”
스텔라는 대답하기 쑥스러운지 고개만 끄덕였다.
“아싸, 친구 생겼다, 히히.”
내 입을 깨끗하게 닦아 준 스텔라는 쿠키 가루가 묻은 손수건을 보며 얼굴을 찡그리다가 하녀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보니, 벌써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