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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0)화 (30/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30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리스는 카시우스의 팔을 붙잡았다. 실은 아까 놀라고도 남았지만 들키지 않게 숨겨 왔다가 이제야 표출한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카시우스, 기억해? 몇 달 전에 받았던 익명의 편지!”

“기억하지.”

몇 달 전,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았었다.

‘언젠가 메이라는 이름을 가진 파사베아의 증손주가 나타나면 그 아이에게 수호 기사가 될 기회를 주십시오. 그것만이 그 아이가 살 방법입니다.’

추신으론 편지 작성자가 나타날 때까진 그 누구에게도 편지에 관해 발설하지 말라 쓰여 있었다.

처음엔 장난으로 쓴 편지인가 싶었다. 그러나 파사베아의 이름을 장난으로 언급할 사람은 적어도 이 제국 내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그 편지 내용대로 메이라는 이름을 가진 파사베아의 증손주가 나타났다.

“예언가의 편지인가 봐. 가끔 정신계 마법을 공부하다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되는 사람도 있다잖아. 미래를 보고 우리에게 알려 준 거지.”

“그런 것 같네. 편지 내용대로 따라야겠어. 아이가 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는 건 우리의 일과 다르지 않으니 마다할 리도 없지만. 어쩌면 이게 파사베아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파사베아 실종 사건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스테리한 사건이었다. 당시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는 자신들이 제국의 수호신인 만큼 그를 찾아내려고 애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었다.

“그래. 다음 주나 다다음 주에 시간 나면 플로티나가에 다녀오자.”

“응.”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는 플랫폼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역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스쳐 간 사람 중엔 애꾸눈의 사내도 있었다.

그 애꾸눈의 사내는 떠나가는 기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사내의 일행이 기차와 애꾸눈의 사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왜 그래? 뭐라도 봤어?”

“…….”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기차가 떠나서 보이지 않게 되어도 여전히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

“이봐, 마테로진 키셀? 뭘 본 건데.”

그의 낮은 음성이 입 밖으로 나왔다.

“비체 유리에트.”

“누구?”

“도망간 그 여자랑 너무 닮아서.”

***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기차에서 내린 우리는 페르시스가 미리 역으로 보낸 마차를 타고 플로티나에 도착했다.

저택으로 들어가 안뜰에 들어서자마자 엘렌이 보였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마중을 나온 듯했다.

“엘렌!”

나는 엘렌에게 달려가서 그녀에게 꼬옥 안겼다.

“여행 즐거우셨나요? 플로아 님과 함께 가셨으니 별일 없으셨겠지만 그래도 처음 가시는 여행인지라 걱정했어요.”

“당일치기라서 아쉽긴 하지만 재밌었어! 나쁜 일도 없었고.”

“다행이네요.”

“다음엔 엘렌도 같이 가자. 그땐 일주일 정도 갔다 오자!”

“주인님만 허락하신다면 언제든지요.”

엘렌은 생각만 해도 좋다는 듯이 밝게 대답했으나 나는 ‘주인님만 허락하신다면’이라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페르시스의 허락이 없으면 외박하는 여행을 못 한다니.

성인만 돼 봐라. 일주일 여행이 아니라 한 달 여행, 세계 일주,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리라 다짐했다.

성인만 되면 적어도 ‘꼬맹이가 무슨 외박이야. 안 돼.’라는 소리는 안 듣겠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페르시스가 호위를 이끌고 안뜰로 들어섰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곳에 있던 시종들이 머리를 조아리자 나도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보아하니 외출하려는 것 같았다.

그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생각보다 늦었군.”

해변에서 다섯 시간도 채 못 놀았거든?! 나는 양 볼에 바람을 불어 넣고는 그를 찌릿 째려보다가 그가 무서워서 마냥 미소를 날렸다.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거든요.”

“다음부턴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도록 해.”

“다음에도 여행 보내 주실 거예요?”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아니.”

정 없는 대답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칫…….”

여행에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왜 안 보내려 한담. 나, 돈도 엄청 아껴 쓰는데.

그러다 불현듯 스텔라가 떠올랐다. 아 맞다, 스텔라와의 식사는 무사히 마쳤나?

나는 내민 입술을 집어넣곤 물어보았다.

“아버지, 스텔라랑 식사는 어떠셨어요?”

같이 있어 보니까 스텔라가 좋아지지 않던?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회상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시간만 아까웠다. 앞으로 그 꼬맹이와 식사할 일은 없어.”

식사할 일이 없을 거라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물었다.

“어째서요? 혹시 스텔라가 아버지께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내 시간을 뺏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너도 더는 그런 의미 없는 자리 만들려고 하지 마.”

충격이었다. 이번 식사로 스텔라에게 호감이 쌓일 줄 알았던 나로선 그랬다.

원작에서 스텔라는 주인공이며 냉혈한 페르시스를 딸바보로 만든 대단한 존재이지 않은가. 저번엔 적대감을 보였을지라도 이번엔 조금은 그녀에게 빠졌을 거라 생각했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땐 어쩌면 페르시스가 스텔라를 입양하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했을 정도로.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원작을 과도하게 믿었던 것 같다.

나도 스텔라도 원작의 메이와 스텔라가 아닌데 말이다.

내 운명이 달라진 것처럼 스텔라의 운명도 원작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스텔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가 생각에 잠겨 있으니 그가 큼큼거리다가 다시 입을 뗐다.

“다음엔 나와 함께 가도록 하지.”

“……여행이요?”

“응, 네가 원하는 곳으로. 그땐 나와 함께 가는 것이니 외박도 허락하지.”

“와아- 정말이죠? 약속 무르기 없기예요!”

나는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져서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페르시스와 같이 가는 게 흠이지만 여행을 허락해 주는 게 어디야! 그것도 외박 여행을!’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외출을 나섰다.

“나갔다 오마.”

페르시스가 가자 그의 뒤에 있던 요한이 내게 미소를 보이며 인사하곤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현관 밖으로 나간 후, 곁에 있던 엘렌이 내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여행 중에 못 씻으셨다고 하셨죠? 욕조에 물 받아 놓을까요?”

나는 고양된 감정을 진정시키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웅. 찝찝해서 씻고 싶어.”

“네, 지금 바로 물 받아 놓을게요.”

“웅!”

***

다음 날 나는 해가 뜨자마자 곧장 나제트가에 찾아갔다.

스텔라는 페르시스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부 포기한 상태였다.

“이제 됐어. 원작대로 사는 꿈, 버렸어.”

“뭐어?”

원작대로 페르시스의 유일한 딸이 되어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던 스텔라가 어찌 포기하게 되었는가.

그 꿈에 방해가 되는 나를 괴롭히기까지 했던 그녀가.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빠가 널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했어?”

페르시스는 미친 사람이니까 정말로 그리 협박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목숨이 걸려 있으면 스텔라도 어쩔 수 없이 포기했을 것이고.

스텔라가 고개를 저었다. 시선은 떨군 채였다.

“아니. 죽이겠다고 하진 않았어.”

“그러면?”

“내 말을 전부 무시하시더라. 나만 쫑알거렸고, 각하께선 대답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식사가 끝났어.”

식사 내내 아이의 말을 전부 씹었다니. 그의 태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때 얼마나 뻘쭘했는지…… 생각도 하기 싫어. 난 그런 사람이 내 아빠가 되길 바라지 않아. 자고로 부모는 우리 숙부처럼 마음씨가 따뜻해야지.”

“…….”

“그래서 원작대로 사는 꿈, 완전히 버렸어.”

체념한 목소리에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잠깐 흐르던 정적을 깨고,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면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너 지금 무호적자잖아.”

“숙부의 딸이 될 거야. 이미 얘기는 해 놨어. 숙부가 내 아빠가 됐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알겠다던데?”

“정말?”

“응. 숙부가 정이 많아서 그런지 내 앞에서 고민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바로 알겠다며 입적 서류를 작성하더라고. 기관에 보냈으니 곧 정식으로 나제트가 사람이 될 거야.”

“다행이다. ……내가 이런 말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하인드에게 감사할 정도로 다행이었다. 스텔라의 미래가 어두웠다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테니까.

스텔라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녀가 새초롬하게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더는 찾아오지 마. 너랑 나,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서로 볼 일 없어.”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낯으로 물었다.

“왜?”

하지만 스텔라는 다시는 나와 보지 않을 것처럼 고개도 돌린 채 다소 날카롭게 대꾸했다.

“왜라니? 너, 나한테 그다지 좋은 감정 갖고 있는 거 아니잖아? 나도 그래. 서로에 대한 마음이 이런데 앞으로 더 엮여서 좋을 게 뭐 있어?”

“…….”

일은 전부 마무리되었으니까 이 이상 엮이지 말자고. 서로에게 관심 끄고 살자고.

스텔라는 그리 말했다.

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지금 네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알아들었으면 이제 가.”

스텔라는 나가라는 듯 눈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난 나가지 않고 스텔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해, 안 가고?”

“또 찾아올 거라고 얘기하려고. 네 마음이 달라질 때까지.”

“……뭐?”

황당해하는 스텔라를 뒤로하고,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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