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9화
페르시스가 외박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나와 플로아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우리는 초저녁쯤 되어 역에 들어섰다. 플로아가 짐을 찾아와서 그의 두 손엔 짐이 가득했다.
나는 플로아 대신 역무원에게서 티켓 2장을 받고선 기차에 올랐다. 이번에도 1등칸이 아닌 2등칸이었다.
“아침에 타는 기차랑 저녁에 타는 기차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네요.”
“아무래도 아침에 향하는 곳과 저녁에 향하는 곳은 다르니까요.”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말이죠?”
“바로 그거죠.”
플로아가 짐을 선반에 올려놓는 사이, 나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마주 보는 앞 두 좌석엔 올 때와 달리 다른 승객이 있었다.
복도 쪽 좌석엔 고동색 중절모를 얼굴에 덮고 자는 남자가, 창가 쪽 좌석엔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채로 신문을 읽고 있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커플인가 싶었다.
나는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보다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은 점점 캄캄해지고 있었다.
플로아가 내 옆에 앉고, 드디어 기차가 출발했다.
많이 못 놀고 돌아가서 그런지 벌써 떠나는 게 아쉬웠다. 나중에 넉넉하게 일정 잡아서 또 와야지.
순간, 나중에 또 르라트 해변에 와서 그 소년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물어봤다. 소라도 줬는데 이름 정도는 물어볼걸.
“플로아, 우리 다음엔 외박 허락받아서 또 여기로 와요.”
“얼마든지요.”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할 무렵.
꼬르륵―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시계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나였다.
“배고프십니까?”
“네, 배고파요.”
“샌드위치와 우유를 드시겠습니까?”
“있어요?”
“승무원이 팔고 있습니다.”
그 말에 얼굴을 옆으로 내밀어 복도를 보았다. 플로아의 말마따나 승무원 두 명이 복도 끝에서 서빙 카트를 끌고 승객들에게 샌드위치와 우유를 팔고 있었다.
기차에서 무언가를 사먹는다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메뉴를 고를 생각과 함께 절로 신이 났다.
“샌드위치와 우유를 팝니다. 치킨샌드위치, 에그마요샌드위치, 햄치즈샌드위치, 비프샌드위치까지 총 4종류가 있습니다.”
“구매하실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간단한 메뉴들이었고, 다 나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는 치킨샌드위치였다.
내가 플로아에게 치킨샌드위치가 먹고 싶다고 얘기하니 플로아는 사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갑자기 치킨샌드위치가 많이 팔리는 게 아니겠는가.
“치킨샌드위치 두 개랑 우유 세 병 주세요.”
“비프샌드위치 하나랑 치킨샌드위치 세 개요.”
“치킨, 에그마요 각각 두 개씩 주세요.”
덕분에 승무원이 우리에게 오기도 전에 치킨샌드위치는 동이 나고 말았다.
나는 급격히 우울해져 손을 툭 떨구곤 이마를 테이블에 툭 꽂았다.
“다 팔려 버리다니……. 치킨샌드위치 먹고 싶었는데…….”
“제가 당장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플로아가 일어나려고 하자 내가 힘없이 그를 붙잡았다.
“무력으로 뺏으려고요? 됐으니까 앉아요. 그냥 다른 거 먹죠, 뭐…….”
너무 먹고 싶었던지라 앞좌석에 탈 걸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운이 없어, 운이.
“에그마요샌드위치를 먹어야 하나…….”
내가 혼잣말을 하는 그때였다.
똑똑―
“아가.”
내 앞좌석에 앉은 여자가 테이블에 노크하며 부르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연하늘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날 부른 건가?
난 손으로 날 가리키며 물었다.
“저요……?”
“응. 여기에 아가는 너 하나뿐인걸?”
여자는 싱긋 미소를 보이며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제야 알아차린 거지만, 그녀의 손에 있던 신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치킨샌드위치가 있었다.
“이거 먹을래?”
여자가 쓴 남색 중절모 안에 끝이 살짝 걸려 있던 연하늘색 머리카락이 살랑 내려와 그녀의 볼에 닿았다.
“아까 너 오기 전에 사 둔 거야. 사 둔 게 많아서 그런데 언니 거 먹을래?”
여자는 내게 눈웃음을 보였다.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순간 나는, 천사를 목격한 줄 알았다.
***
“음냠냠냠-”
난 마음씨 고운 천사 같은 앞좌석 언니 덕에 원하는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다. 언니는 내게 우유와 다른 샌드위치도 건네주었다.
“입에 묻었다.”
그리고 내 입가에 묻은 소스를 상냥하게 닦아 주었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목 막히면 우유도 마시고.”
나는 입안에 샌드위치가 가득 차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사가 따로 없어!
소스를 전부 닦아 준 언니는 다시 턱을 괴고선, 맛있게 먹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엄마가 있었으면 날 이렇게 챙겨 주고, 따스하게 바라봐 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오른손엔 샌드위치, 왼손엔 우유를 들고 쉴 틈 없이 먹고 있으니 언니는 한 번 더 천천히 먹으라 하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아이리스라고 해. 아가는 이름이 뭐니?”
나는 입안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곤 대답했다.
“메이 플로티나요!”
아이리스는 의미심장하게 내 이름을 읊었다.
“메이…… 네가 파사베아의 증손주구나.”
페르시스의 아들도 아닌 파사베아의 증손주라 칭하는 게 희한했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는 다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려다가 문득 그녀의 이름이 제국 3대 수호신 중 한 명의 이름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고개를 드니, 여자의 시선은 플로아에게 가 있었다. 플로아를 바라보는 아이리스의 눈빛은 어째 익숙한 이를 보는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가문의 수호신이면 애 좀 잘 먹이고 다녀. 한창 클 나이인데 부족함 없이 먹여야지.”
이를 들은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플로아를 소개한 적도 없는데 그가 수호신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외출 시 플로아는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게 누군가 자신이 플로아임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정신계 마법을 걸어 둔다.
그런데도 플로아의 정체를 안다는 건, 그녀가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그분이라는 걸까?
보통 자신보다 더 큰 마력을 가진 사람한텐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까.
플로아는 귀찮다는 듯이 입을 뗐다.
“……부족하게 먹이진 않아.”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답변은 아이리스의 입에서 나왔다.
“수호신들끼리는 매년 회의를 하거든. 각자의 수호가 방해받지 않고 잘 이뤄지기 위해 수호 범위를 조율하려고 해마다 한 번씩은 꼭 만나.”
플로아가 플로티나의 수호신이 된 게 한참 전 일이니 그들의 관계가 아주 오래됐음을 뜻했다.
“으음-”
때마침 중절모로 얼굴을 가리고 잠을 자고 있던 남자가 기지개를 켜며 깨어났다.
“거의 다 왔어?”
남자가 대뜸 묻자 아이리스가 대답했다.
“응. 곧 도착하니까 일어나.”
남자는 얼굴에 덮었던 중절모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붉은 머리와 노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남자는 제 앞의 플로아를 보며 입을 뗐다.
“플로아라길래 꿈인가 했더니만 정말 플로아였네. 웬일이야? 외출 잘 안 하잖아.”
“여행 왔어. 내가 지켜 드려야 할 분이 여행 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남자가 내게 손을 건네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 카시우스라고 해.”
아이리스에 카시우스까지. 동명이인이 아닐까 싶었으나 역시나 제국 3대 수호신이었다.
제국의 수호신이 내게 인사를 건넸어……!
잘 보이면 수호 기사단에 넣어줄지도 모를 단장들이!
나는 영광스럽게 그 손을 맞잡았다.
“메이 플로티나예요.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방긋방긋 웃으니 카시우스의 입꼬리가 씩- 절로 올라갔다. 꼬마애를 귀엽게 보는 얼굴이었다.
“플로아 넌 좋겠네. 메이가 귀여워서 수호하는 게 즐겁겠어.”
플로아는 고민도 없이 바로 인정했다.
“즐겁지. 평생 수호하고 싶을 만큼.”
그가 나를 보며 나긋하게 미소했다.
내가 카시우스와 손을 잡고 있으니 아이리스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랑도 악수해, 메이.”
“좋아요!”
나는 비어 있는 왼손을 건네 아이리스와 악수했다. 졸지에 양손으로, 그것도 팔을 교차해서 악수하게 되었다.
아이리스는 내 손을 귀여워했다.
“손이 작고 말랑말랑하네.”
그녀가 내 손을 조몰락거리고 있을 때 내가 물었다.
“혹시 헤스티아 님도 이 기차에 계시나요?”
제국의 3대 수호신 중 한 명인 헤스티아. 아이리스, 카시우스를 보게 되었으니 헤스티아의 실물도 보고 싶어졌다.
“아니. 헤스티아는 보통 자기 기사들과 함께 다녀. 기사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거든. 뭐, 우리라고 기사들을 아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군요.”
헤스티아가 자신의 기사들을 자식처럼 아낀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제국 3대 수호신을 항상 책으로만 접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기차는 속도를 줄이며 플랫폼에 들어섰다. 완전히 멈춰서 문이 열리자 승무원이 안내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역은 페인트공원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짐을 전부 챙겨서 내려 주십시오.”
카시우스와 아이리스는 그제야 내 손을 놓아주었다.
“우린 이제 가야 해.”
“이번 역에서 내리시는 거예요?”
내가 아쉽다는 듯이 말하니 아이리스도 아쉬워했다.
“응. 그래도 네가 어디 사는지 아니까 시간 나면 놀러 갈게. 그래도 되지?”
카시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에서 가방을 꺼내며 말했다.
“나도 갈게.”
“네! 언제든지 오세요!”
“나중에 봐.”
“꼭 놀러 오세요!”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내게 손을 흔들곤 기차 밖으로 나갔다. 나는 대화를 몇 마디 못 나눈 게 아쉬워서 그들이 나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기차 문밖으로 사람들이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놀러 오셨으면 좋겠다. 좋은 분들이었는데…….
그들이 놀러 오길 소망할 때였다.
내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백금발. 생머리. 벽안.
장신의 사내는 날카로운 것에 베여서 생긴 듯한 상처 때문에 한쪽 눈을 못 뜨는 애꾸눈이었다.
“!”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앞을 보게 되었다.
뭐지……? 나 왜 피했지?
그 사람이 무서웠나? 애꾸눈이어서?
그래서 지금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 하는 걸까?
그 이유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돌려서 그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이 닫힙니다.”
승무원이 안내하는 소리와 함께 기차 문이 닫혔고, 곧 기차는 다음 역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