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8화
“와, 플로아 엄청 기네요.”
“……칭찬이십니까?”
“칭찬이에요.”
페 모 씨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짧다고 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플로아는 공손하게 배꼽 위에 두 손을 올린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러고 있으면 됩니까?”
“팔은 활짝 벌려 주세요. 그래야 모래를 덮었을 때 모양이 예쁘거든요.”
“해 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
바다에 온 건 처음이니 해 본 적 없을 텐데 왜 이리 잘 아는 것 같냐는 식의 말에 나는 뜨끔하여 시선을 휙 피했다.
‘그야 예전에 대한민국에서 해 본 적이 있어서 그렇지…….’
괜히 저 멀리 날아가는 갈매기 떼를 보며 변명했다.
“당연히 해 본 적 없죠. 상상해 보니 두 손을 모은 자세보다 양팔을 벌린 자세가 모양이 더 예쁠 것 같다는 거예요.”
다행히 플로아는 의심하지 않았다.
“확실히, 양팔을 벌린 자세가 더 예쁠 것 같긴 하네요.”
“그렇죠?”
난 그제야 그와 눈을 마주하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플로아가 만들어 낸 큰 삽으로 모래를 파서 목부터 발끝까지 덮으니 그의 몸이 완벽하게 모래에 가려졌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뿌듯해했다.
“완성이에요, 플로아.”
“꼼짝도 할 수 없군요.”
“거짓말, 마력으로 1초 만에 모래를 날려 버릴 수 있으면서.”
“메이 님께서 고생해서 덮어 주신 걸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홀로 모래사장을 걸어가는,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곱슬거리는 은발에 체리색 눈동자를 소유한 잘생긴 소년.
그 소년이 나와 플로아 쪽으로 다가와 내 눈앞을 지나가는 동안, 나는 소년에게 시선을 뺏겨 뗄 수가 없었다.
……뭐지? 내 머릿속 오래된 기억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생각날 것 같은데…… 아!’
나는 그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 기억은 《페르시스의 입양딸》 속 어느 대사였다.
《“어쩌면 좋을까, 페르시스. 아들이 보고 싶어. 항상 그랬지만 오늘은 보고 싶어서 버티질 못하겠어. 내 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뭐든 바칠 수 있는데. 하다못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데 왜 찾을 수 없지? 어째서 신은 도와주지 않는 거야.”》
하인드가 페르시스와 단둘이 술을 마시다가 잃어버린 아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였다.
그다음에 하인드는 그렇게 말했다.
《“너무 보고 싶어…… 우리 밀로.”》
그래, 맞아! 밀로!
하인드의 잃어버린 아들 이름이 생각나자 나는 눈을 희번덕였다. 곧바로 소년을 향해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밀로?”
소년은 내 부름에 이렇다 할 반응 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가 내게서 멀어졌다.
“밀로가 누군가요?”
플로아가 물었으나 난 오직 소년에게 집중해 있었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못 들은 건가?
내 목소리를 못 들었다고 판단한 나는 소년을 뒤따라갔다. 모래에 묻혀 있는 플로아가 황급히 물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서 소년을 따라가 어깨를 붙잡았다. 소년은 그제야 멈췄다.
“밀로……?”
두근두근. 하인드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되어 심박수가 올라갔다.
은발의 남자애가 뒤돌아보자 체리색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체리색 눈동자. 체리는 흔해도 체리를 콕 박아 둔 듯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본 체리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하인드뿐이어서 더욱 희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눈동자를 이 아이가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하인드와 같은 은발.
나는 이 남자애가 하인드의 잃어버린 아들이라 70% 정도 확신했다.
“밀로 맞지?”
남자애는 내 또래쯤 되어 보였다. 속눈썹이 길고 피부가 하얘서인지 동화에서나 나오는 어린 왕자가 존재한다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그 소년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밀로가 아니라고?”
하인드의 머리색, 눈동자색과 완전 똑같은데 아니라니.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싶었다.
내가 믿지 못하는 눈치라는 걸 알았는지, 소년은 내 의심에 쐐기를 박았다.
“……아니에요.”
도도한 외모와는 다르게 그 목소리는 꽤 부드러웠다.
“혹시 어릴 때 대저택에서 살았던 기억 안 나? 아주 어릴 때라 기억이 없으려나?”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정말로 밀로가 아니야?”
“네. 정말로 아닙니다.”
정말 아니라고까지 얘기하니 이 남자애는 밀로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미안, 내가 사람을 착각했나 봐.”
“괜찮아요.”
사람을 착각했다는 사실에 뻘쭘해서 시선을 떨구자 남자애의 손에 있는 소라가 보였다.
“그거 소라야?”
“네. 소라예요.”
소년이 손을 펴서 소라를 보여 주었다. 분홍빛, 보랏빛, 하늘빛이 섞인 파스텔 색감의 성인 손 크기만 한 소라였다.
“와아- 예쁘다. 여기서 주운 거야?”
“네.”
나도 소년처럼 예쁜 소라를 찾아 집에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손 주세요.”
“손?”
얼결에 손을 내밀자 소년이 내게 소라를 쥐여 주었다.
“어? 나 주는 거야?”
소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정말로 내가 가져도 돼? 이렇게 예쁜 소라 찾기 힘들잖아.”
“괜찮습니다. 드리고 싶어요.”
소년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괜히 소라를 쳐다봤나 싶어 미안해졌다.
“미안, 갖고 싶어서 쳐다봤던 건 아닌데…….”
“저는 여기에 자주 올 수 있으니 또 찾으면 돼요.”
그렇다는 건…… 반대로 나는 여기에 자주 못 온다는 걸 아는 건가?
내가 이곳에 자주 올 수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다가 외지인처럼 생겼나 싶어서 그저 고마움만 표했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뒤를 돌아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소년을 응시했다.
하인드에게 저 애를 본 걸 얘기해야 할까.
은발에 체리색 눈동자를 가진, 하인드의 잃어버린 아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소년.
하지만 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자랐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하인드의 아들이 아닌 거겠지.
괜히 하인드에게 알려 줘서 그를 희망 고문 하지 말자.
나는 소라를 만지작거리며 플로아에게 돌아갔다. 플로아는 여전히 모래를 덮은 채로 있었다.
“누구랑 대화하고 오신 겁니까?”
“어떤 남자애요. 나제트 후작님과 머리색, 눈동자 색이 같길래 혹시 후작님의 잃어버린 아들이 아닐까 해서 물어봤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렇군요. 갑자기 말도 없이 가셔서 놀랐습니다. 이 모래 무덤을 헤치고 쫓아가야 하나 계속 고민했습니다.”
“죄송해요. 후작님의 아들을 찾았다는 생각에 말도 안 하고 가 버렸네요. 근데 모래 무덤 안 헤치고 가만히 계셨네요?”
“열심히 만들어 주신 모래 이불이니까요.”
“히히, 이제 나오셔도 돼요.”
플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선 손가락을 튕겨 몸에 묻은 모래를 단번에 털어 냈다.
“그 아이는 나제트 후작의 아들이 아닐 겁니다.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같은 건 흔한 일이니까요.”
맞는 말이다. 이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전부 다른 색의 머리칼과 홍채를 가지겠는가.
“그건 뭔가요?”
플로아가 손으로 내가 쥐고 있는 소라를 가리켰다.
“그 남자애가 줬어요. 괜찮다고 사양했는데 주고 싶다면서 주더라고요. 예쁘죠?”
“…….”
좋아서 실실 웃는 나와는 달리 플로아의 안면은 살짝 어두워졌다.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이내 그는 바다로 몸을 틀었다.
“잠시 바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여기 계세요.”
“바다는 왜요?”
플로아는 내 물음에 대답도 안 해 주곤 뿅! 하고 사라졌다.
이 사람이 어린 나를 홀로 두고 어딜 간 거야?
그를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3초가 지났을 때.
뿅! 플로아가 다시 내 눈앞에 등장했다.
……거대한 소라를 들고서.
“그, 그게 뭐예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검지로 대왕 소라를 가리켰다.
“메이 님께 드릴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전 이런 대왕 소라를 바란 적 없는데요?”
“그냥 제가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플로아에게서 대왕 소라를 건네받았다. 소라가 수박보다도 컸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플로아를 쳐다보았다.
“경쟁심이라도 생긴 거예요? 자기가 제일 큰 소라를 주겠다는 경쟁심?”
“경쟁심이라뇨. 그 누구도 제게 경쟁 상대가 되질 못합니다.”
플로아는 나긋하게 미소 지었지만 그가 하는 말뜻은 절대로 나긋하지 않았다.
“앞으론 외간 남자가 주는 거 받지 마십시오. 다 흑심 품고 있는 겁니다.”
……? 흑심?
“저한테 정신계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아요? 상대가 저를 절대로 여자일 거라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요. 그런데 무슨 흑심을 품어요?”
“…….”
맞는 말인지 플로아는 좀처럼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신계 마법은 다른 마법과 달리 온전하지 않아서 가끔 마법의 힘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상대가 보유한 마력이 크면 정신계 마법이 안 통하기도 하고요.”
“그렇다 해도 그렇지, 저렇게 어린 애한테 흑심이라뇨.”
그냥 순수하게 자기 또래니까 준 것 같구먼.
“……아무튼 다음부턴 외간 남자가 주는 거 받지 마세요. 제가 다 구해다 드릴 테니까요.”
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