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6화
갑작스레 안겨진 나는 그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나랑 동행하겠다고……?
“플로아가 왜요?”
가문의 수호신이어서 그런지 플로아가 플로티나 저택 밖으로 나가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냉큼 나와 동행하겠다니. 놀란 건 페르시스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왜?”
플로아의 답은 단순했다.
“그야, 그러고 싶으니까요.”
“…….”
의자에 앉아 있던 페르시스는 어딘가 불쾌한 낯으로 플로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나를 안은 플로아의 팔을.
페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플로아에게서 나를 데려가려는 찰나.
휙. 플로아는 페르시스가 나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몸을 반대편으로 비틀었다.
“……?”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통 알 수 없어서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페르시스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내놔.”
내놔라니! 내가 물건이냐!
나는 나를 물건 취급하는 그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획 돌리곤 플로아에게 얼굴을 기댔다.
흥! 당신한텐 안 가!
등에 따가운 시선이 꽂히는 듯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플로아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페르시스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웃어?”
플로아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메이 님이 귀엽지 않습니까.”
“……메이 플로티나.”
페르시스가 호명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흠칫거렸다. 내가 흠칫거리는 걸 느꼈는지 플로아가 한마디 했다.
“그리 부르시면 무서워하실 겁니다.”
“후…….”
내가 슬쩍 페르시스를 보니 그는 성가시다는 듯이 입으로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다.
곧 그가 내게 팔을 벌렸다.
“메이, 이리 와.”
그의 딴에선 한껏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나는 플로아에게 찰싹 달라붙어선 페르시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안으려는 걸까. 그는 사기꾼한테서 날 데려왔을 때 빼곤 안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안아 올리기는커녕 포옹 한 번 한 적도 없었는데.
설마 자기가 안는 건 괜찮아도 남이 안는 건 싫다 이건가?
참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다지 그에게 안기고 싶지 않아서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페르시스의 안면이 빠르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아주 서늘하게.
나는 순간 오싹해졌다. 오라는데 거부했다간 뼈도 못 추스를 것만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페르시스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에게 안기겠다는 듯 양팔이 절로 뻗어졌다.
부드럽게 부르면 뭐 해. 애가 후폭풍이 두려워서 억지로 안기려고 하는데.
흑흑, 불쌍한 내 인생.
나를 받아 든 페르시스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표정이 바로 풀어졌다. 물론 전까지 인상을 쓰고 있던 건 아니었으나 낯빛이 밝아졌다는 걸 나도 플로아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플로아는 나와 페르시스를 흐뭇하게 보았다.
“페르시스 님도 동행하시겠습니까?”
“네가 가는 건 확정된 것처럼 말하는군.”
“페르시스 님을 제외하곤 메이 님을 보호할 수 있는 건 저뿐이니까요.”
페르시스는 안고 있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나는 ‘설마 기차 여행 허락한 걸 취소할 생각은 아니죠?’ 하는 눈빛을 보냈다.
“갔다 와. 난 시간 아까우니 가지 않겠다.”
페르시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양손을 위로 쭉 뻗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싸! 여행 간다!”
이게 얼마 만의 여행인가. 이전 생에서도 현생에 치여 여행에 가기 힘들었었다.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역시 여행하면 바다려나?
기차 타고 바다 여행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당장 짐을 싸서 출발하고 싶었으나.
신이 난 것도 잠시, 페르시스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떨어졌다.
“다만 외박은 안 돼.”
“네에에에?”
외박은 안 된다니? 그럼 기차 여행을 당일치기로 갔다 오라는 소리야? 오고 가는 데에만 시간 다 잡아먹힐 게 뻔한데.
“안 돼요! 바다에 가고 싶은데 당일치기로 가면 제대로 놀지도 못 하고 돌아와야 한단 말예요……!”
“꼬맹이가 무슨 외박이야.”
“플로아랑 같이 가잖아요!”
“그래도 안 돼.”
그는 내가 더 떼쓸 수도 없을 만큼 단호했다.
“칫…….”
내가 울적하게 시선을 떨구곤 보란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그가 명했다.
“입술 집어넣어.”
아니, 입술도 내 마음대로 못 해?
그가 하라는 대로 하기 싫었지만 반항하기는 무서워서 꾸깃꾸깃 입술을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대신, 양 볼에 바람을 가득 넣어 삐진 티를 팍팍 냈다.
“그런 태도면 여행 허락한 것도 취소한다.”
그 말에 나는 얼른 양 볼에 바람을 빼곤 아주 기쁘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아, 기차 여행이라니! 당일치기라도 너무 행복해요! 아빠 최고!”
두 손을 모으며 굉장히 가식적으로 반응했으나 페르시스는 가식인 걸 모르는지 입가가 살풋 올라가기까지 했다.
젠장, 페르시스한테 이렇게나 아첨해야 한다니!
이젠 내 신세가 불쌍하다고 말하기 입 아플 정도였다.
어쩔 수 없나. 당일치기라도 만족해야겠다. 여행을 갈 수 있는 게 어디야.
비록 외박은 허락 못 받았지만 그래도 곧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다.
“플로아, 우리 기차 타고 바다에 가요!”
“좋습니다.”
“바닷가에서 맛있는 거 잔뜩 사 먹어요!”
“좋습니다.”
플로아는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페르시스의 명을 들었다.
“메이의 건강이 최우선이야. 다치는 일 없도록, 위험한 일 없도록 성심껏 보필해.”
“감히 메이 님을 해하는 자가 있다면 전부 죽여 놓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숨통을 제대로 끊어 놔.”
“네, 페르시스 님.”
그들의 대화가 태연하기 짝이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날 해하려는 사람이 없길 기도해야겠다. 사람이 죽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 닷새 후, 나는 플로아와 함께 기차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
기차 여행을 떠나는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초여름에 접어들어 장마가 오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다행히도 아직은 장마철이 아닌 것 같다.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역에서 기차에 오른 나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기차 내부를 구경하기 바빴다.
기차 안은 아틸라가 알려 주었던 대로 왼편, 오른편 전부 창이 널찍하게 뚫려 있어서 바깥을 구경하기 좋았다.
좌석은 양쪽 창문에 각각 두 개씩 붙어 있는 형태로, 앞에 놓인 두 좌석과 마주 볼 수 있도록 놓여 있었다. 마주 보는 좌석 사이에 테이블이 있어서 식사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양 좌석 사이로 난 복도를 달려가, 햇볕이 적당히 잘 드는 자리에 앉았다.
이내 뒤따라온 플로아가 두 손 가득한 짐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정말로 1등석이 아니어도 괜찮겠습니까?”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2등칸이다. 플로아가 1등칸에 타자고 권유했지만 내가 거절해서 2등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럼요! 1등석은 룸 형태로 되어 있어서 기차에 탄 느낌이 덜 난단 말예요. 이렇게 가림막 없이 뻥 뚫린 2등석이 훨씬 더 좋아요!”
내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승객들을 보며 생긋거렸다.
사람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야 기차 여행이지!
플로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가볍게 헛숨을 내쉬며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이윽고 출입문이 닫히고 기차가 다음 역을 향해서 출발했다.
어? 아무런 소리도 안 나네?
기차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내심 놀랐다. 칙칙폭폭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21세기 대한민국의 지하철마냥 꽤나 조용히 달려서였다.
마력으로 운행되는 기차라 그런 듯했다.
나는 창턱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괬다. 바깥의 파릇파릇한 녹색의 나무들을 보니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다.
***
플로아도 메이를 따라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실 그에겐 이번 여행에 대한 각오가 있었다.
‘추억을 만들어야 해.’
자신은 그녀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동행한 것이다. 그녀가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정이 들어서 떠날 수 없도록.
추억을 쌓는 것만큼 정을 붙이기에 좋은 것은 없으니까.
플로아는 자신의 짙은 회색 눈동자에 비친 풍경이 몇 번 바뀌고 나서야 앞을 바라보았다.
기차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 앞의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잠을 자고 있었다.
어젯밤, 기차 여행 갈 생각에 들떠서 잠을 청하지 못했나 보다.
플로아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에 올려뒀던 갈색 곰 얼굴 모양 쿠션을 꺼냈다. 그 쿠션을 창문과 소녀의 머리 사이에 끼워 넣어 좀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했다.
플로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입가엔 늘 그랬듯, 엷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해안가로 달려 나온 메이는 눈부시도록 반짝거리는 푸른 바다를 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우와아-! 바다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휴양지로 유명한 르라트 해변이었다.
여행 갈 생각에 설레서 전날 잠을 설친 메이는 실컷 구경해야 할 기차에서 잠들어 버려 우울해했지만 이젠 괜찮았다.
기차야 뭐, 돌아갈 때도 타고 가니까! 지금은 내 앞의 오션뷰를 만끽하면 된다!
메이는 들뜬 채로 신발을 벗고선 모래사장을 마구 밟으며 달려가 발을 바닷물에 적셨다.
“앗, 시원해!”
바닷물을 따라 꿀렁꿀렁 춤을 추는 해초들이 내 발을 간지럽힐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히히, 간지러워.”
메이가 홀로 참방거리며 놀고 있는 동안, 온갖 짐을 떠맡은 플로아는 짧은 머리 소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떠나지 않게 하려면 자신에게 정을 붙이게 하는 방법뿐이다. 정이 들어, 떨어지면 보고 싶을 걸 알기에 절대로 버리고 갈 수 없도록.
그리고 정을 붙이게 하는 데엔 추억을 쌓는 것만 한 게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홀로 잘 놀고 있는 메이를 보고 있으니 그녀는 자신이 아닌 바다와 추억을 쌓을 듯하다.
‘바다보다 나와 있었던 일이 더 인상 깊어야 하는데…….’
플로아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제 주위에 있는 짐들이 눈에 들어왔다.
메이가 기차에서 베고 잔 곰 얼굴 모양의 쿠션, 여행지에서 입을 옷과 페르시스가 준 돈이 들어 있는 가방…….
플로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하곤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