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5화
나는 다음 수업에 읽을 책을 찾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곤 기지개를 켰다.
“으음- 기차 여행 하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페르시스가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일찌감치 포기해야 하는 내 처지가 가여웠다.
“에휴, 딸바보 아빠였으면 오늘 당장 출발했을 텐데.”
왜 하필 내 아빠는 페르시스인가요.
“하아…….”
내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도서실 밖으로 자리를 옮길 무렵,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가 내 곁으로 왔다.
“제가 허락 구해 보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니 나른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플로아가 보였다.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검술 수업 없지 않아요?”
수업도 없는데 왜 찾아왔나 싶었다.
플로아는 나를 따라서 장난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서운합니다. 그래서야 꼭 수업이 있어야 만날 수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음, 꼭은 아니지만 보통 수업 때만 만나긴 하잖아?
그래도 그는 내 편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건지 내 옆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흘렸다.
“아빠가 기차 여행 하는 거 허락해 줄까요?”
“허락해 주실 겁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으니까요.”
그 말이 나와 페르시스에게도 해당하는 말일지 의문이 들었으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나는 페르시스에게서 내쫓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으니까!
플로아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듯싶었다.
“지금 허락 맡으러 가시겠습니까?”
나는 그 손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나중에 해요. 제가 지금 갈 곳이 있거든요.”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그에게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 만나러요.”
***
메이가 친구를 만나러 가겠다며 집 밖으로 나선 후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나제트가였다.
응접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메이는 하녀들이 내온 초코칩 쿠키를 맛있게 먹는 중이었다.
입가에 쿠키 가루가 묻었는지도 모른 채 쿠키를 열심히 오물거리다가 목이 막혀 우유를 들이켤 때쯤, 어느 교양 없는 영애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가에 우유 수염을 만들고 잔을 내려놓자마자, 그 교양 없는 영애가 응접실 문을 쾅 열고 들어왔다.
저 예쁜 얼굴을 왜 저렇게 막무가내로 쓰나 싶을 정도로 매서운 표정을 한 스텔라였다.
스텔라는 메이를 노려보며 숨을 가쁘게 내쉬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마냥 매서운 표정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지극히도 걱정했던 사람의 표정이었다.
스텔라가 버럭 소리 질렀다.
“너 미쳤어? 진짜로 사기꾼을 따라가면 어떡해!!!”
메이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귓구멍이 아플 만큼 큰 소리에 놀란 건 아니었다.
“사기꾼을 따라간 건 어떻게 알았어? 아빠가 후작님께 말했나?”
“내가 고아원에 또 찾아가서 알았다, 어쩔래!”
“또 찾아왔다고? 너 정말 내 걱정 많이 했구나?”
감동했다는 듯이 물으니 스텔라는 분하고 아니꼬운지 두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렸다. 어느덧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왜 너 같은 바보를 만나게 돼서……. 너 때문에…….”
점점 작아지나 했던 목소리가 다시 깜짝 놀랄 만큼 커졌다.
“너 때문에 내 인생 다 꼬였다고!!!”
스텔라는 씩씩거리며 메이를 계속 노려봤다. 눈시울이 붉어지길래 울까 했더니만 울지는 않았다.
“꼬였다니? 아직 꼬인 건 아니지…… 않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어서 말끝이 흐려졌다. 스텔라에게 있어서 메이라는 존재는 그녀가 원작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크나큰 걸림돌이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벌써 꼬였어.”
스텔라는 체념한 어조로 페르시스와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일전에 있었던 일로 메이에게 사과하러 공작저에 찾아갔다가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앞으론 플로티나에 찾아오지 마. 가능하면 내 눈에도 띄지 말고.”
“…….”
“너같이 영악한 꼬맹이를 다시 보는 일 없도록.”
“…….”
“나한테 이랬는데 딸바보가 될 리 있겠니? 내 인생 다 꼬였어!”
스텔라는 짜증을 내며 발을 구르다가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쭈그려 앉았다.
그녀가 감싸 안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자 메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그러자 스텔라가 또 버럭 소리 질렀다.
“너라면 괜찮겠니!!”
“미안…….”
메이는 스텔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시스는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사과시킨 건 자기면서 스텔라는 왜 싫어한단 말인가.
오히려 괴롭힐 건수를 준 스텔라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뭐, 자기가 괴롭히는 건 좋고 남이 괴롭히는 건 싫은 건가?
역시 그는 이상한 사람이다.
메이는 스텔라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이며 스텔라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울어?”
스텔라는 여전히 얼굴을 숨긴 채 허공에 손을 세게 내저었다.
“저리 가! 보기도 싫으니까!”
그 손에 맞으면 꽤 아플 것 같아서 세 뼘 정도 옆으로 물러났다.
스텔라는 다시 다리를 감싸 안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다가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네가 멀쩡히 살아서 여기에 있다는 건 공작 각하께서 널 받아들였다는 거지?”
“딸로는 아니고 아들로. 나를 자식으로 인식하셨다곤 하긴 하는데 여전히 딸은 필요 없다는 생각인가 봐.”
“…….”
메이는 스텔라의 눈치를 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네 처지가 곤란하게 된 것 같은데 내가 자리라도 마련해 볼까? 너랑 아빠가 대화해 볼 자리.”
스텔라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은 찔끔찔끔 운 증거였다.
“……네가 무슨 수로.”
“열심히 졸라 볼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스텔라는 싱긋거리는 메이를 보며 못 볼 거라도 본 마냥 표정을 찌푸렸다.
그래도 메이의 말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는지 기회를 놓치진 않았다.
“나랑 공작 각하와 단둘이 식사할 수 있게 해 줘.”
“알겠어. 노력해 볼게.”
“……정말로?”
네가 왜?
스텔라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자기한테 못되게 굴었던 여자애한테 기회를 만들어 주고 노력까지 하려고 하니 말이다.
‘쟤는 속도 없나?’ 하는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메이는 스텔라가 기분이 풀어지는 걸 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락 맡으면 편지 보낼게. 그럼 나중에 봐.”
메이는 해맑게 손을 흔들며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스텔라는 소녀가 나간 곳을 멍하니 응시했다.
바보인 게 틀림없다. 자신이 저 소녀였다면 절대로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얻을 게 뭐 있다고 자신의 아빠에게 입양될지도 모를 여자애와 단둘이 식사할 기회를 만들겠는가.
그것도 열심히 졸라서.
“나한테 아직 사과도 못 받았으면서…….”
너무 바보 같아서, 마음이 언짢아질 정도였다.
***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페르시스의 집무실로 달려가 그에게 들은 첫마디는.
“싫어.”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한 말이었다.
나는 양손을 모아 잡고선 오른손 검지를 들어 올리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한 번만요……! 딱 한 번만 스텔라랑 만나 주세요, 네?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제발요.”
“싫다고 했다.”
자신이 왜 스텔라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하는지 회의감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약속은 했고,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이대로 스텔라가 입양되지 않으면 그녀에게 미안해질 터인데.
“스텔라는 제가 고아원에 있을 때 걱정돼서 찾아왔던 애예요. 제 친구란 말예요. 처음 사귄 친구가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싫어요.”
“쯧. 친구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군.”
내가 떼써도 페르시스에겐 소용없었다. 그는 혀를 차며 계속해서 업무를 보았다.
나는 몰래 그를 째려보며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다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떨궜다.
“서러워요.”
남자로 키워지는 것도 서럽고, 매번 아빠 눈치 봐야 하는 것도 서럽다.
내가 다른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다른 가족이 있었으면 이리 고생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면 더더욱.
“절 미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왜 이 쉬운 거 하나 안 들어주시는 거예요? 아직도 제가 미우신 거예요?”
“메이, 난 약속을 어기지 않아. 널 미워하지도 않고.”
“그럼 제가 지금 기차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면 허락해 주실 거예요?”
갑작스러운 기차 여행에 페르시스는 떨떠름해했다.
“당연히 아니지. 너같이 어린 애가 무슨 기차 여행이야.”
“거봐요. 미워해서 제게 그 무엇도 해 주고 싶지 않으신 거잖아요.”
페르시스는 답답한지 멀쩡히 있는 제 머리를 괜히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런 거 아니라고.”
나는 일부러 그의 심기를 건드려 그가 허락하게끔 유도했다.
“아니라고만 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요? 미워하니까 아니라는 말밖에 못 하고 행동으로 못 보이는 거겠죠.”
그리고 그 유도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그 꼬맹이랑 식사 한 번 하면 되는 거지?”
그 말에, 나는 언제 우울해 있었냐는 듯 싱글거렸다.
“기차 여행도 허락해 주셔야죠.”
“…….”
그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상관없다. 스텔라와의 식사 자리와 기차 여행만 따낼 수 있다면야!
“……시간 내 보도록 하지.”
그때였다.
“시간 내실 필요 없습니다.”
플로아가 내 옆에 뿅! 하고 등장하더니 나를 안아 들었다. 플로아에게 안긴 건 처음이었다.
“제가 동행할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