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4화
메이의 대답에 플로아의 눈빛이 한 번 심하게 흔들렸다. 그 이유 또한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상관없잖아요, 플로아. 내가 떠나든 말든.”
근데 왜 상관있는 것처럼 구는 거죠?
플로아는 반박할 수 없어서 입만 벙긋거리다가 이내 시선을 떨궜다.
확실히 그렇다. 그녀가 떠나든 말든 자신에겐 상관이 없다.
그녀는 플로티나의 혈육이 아닐 수도 있으며, 맞다 한들 딸이므로 가문을 물려받을 수 없으니 자신에겐 중요치 않은 존재다.
그런데 왜. 떠날 거라는 말이 뾰족한 가시로 긁어내리는 것처럼 가슴이 쓰라릴까.
플로아가 답이 없자 메이가 다시 물었다.
“제가 떠나서 가주가 되지 않는다면 플로아에겐 좋은 거잖아요. 플로아가 바랐던 거잖아요.”
플로아는 떠나길 바랐다는 말이 억울해서 메이를 똑바로 보며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부정했다.
“떠나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진심이었다. 처음엔 그녀가 공작저에서 키워지든 고아원에 보내지든 상관없었고, 아들로 키워지게 된 이후엔 그저 가주 자리를 넘볼까 경계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녀가 떠나길 바란 적은 없었다.
“그러면 제가 가주가 되어도 괜찮아요? 아빠의 친딸이 아니어도?”
“그건…….”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어서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어째서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을까. 분명 자신은 그녀가 가주가 되길 바라지 않는데.
그녀가 파사베아의 혈육일 수도 있어서?
아니면, 그녀가 떠나기라도 할까 봐?
그렇다면 왜?
왜 자신은 그녀가 떠나길 바라지 않는 걸까.
애처롭게 다시 시선을 떨군 플로아를 보며 메이가 말문을 열었다.
“떠날 마음이 있는 거지, 무조건 떠나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에요.”
“……정말입니까?”
플로아의 낯빛이 빛 한 줄기를 받은 듯 옅게 밝아졌다. 희망을 보는 표정이었다.
“아빠가 제게 모질게 굴었던 걸 뉘우치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딸로 살아가게 한다면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을 듣고선 얼굴에 들어왔던 빛은 가셨다.
“하지만 아빠는 그럴 사람이 아니죠. 그래서 떠나겠다고 한 거예요.”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아뇨. 하지 마세요.”
그의 말을 싹둑 자른 거절은 차가울 만큼 단호했다.
“아빠를 설득하지 마세요.”
“…….”
플로아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 앞의 소녀가 페르시스의 핏줄인 것만 같았다.
그의 핏줄이 아니고서야, 이리도 단호할 순 없으니까.
“아빠가 스스로 잘못을 깨우쳐야 의미가 있는 거예요. 플로아가 설득해서 사과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설령 그 덕에 지금 당장 아들 행세를 끝낼 수 있더래도요.”
“…….”
메이는 허벅지까지 덮인 이불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애꿎은 이불자락이 그녀의 손에 의해 마구잡이로 쥐어졌다.
“제가 언젠가 떠날 거란 건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특히나 아빠는 절대로 알아선 안 돼요.”
떠난다고 하면 페르시스는 반성은커녕 떠나지 못하게끔 막으려고만 할 테니까.
메이는 이불을 놓곤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얇은 소맷자락을 잡았다.
“플로아는 항상 제 편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절대로 얘기하지 말아요. 절대로! 알겠죠?”
플로아는 상대의 푸른 눈동자의 깊이를 알아보듯 빤히, 슬프게 바라보았다.
“……명심하겠습니다.”
***
그날 오후, 하루 중 바람이 가장 따뜻할 때였다. 여느 때처럼 공작저 화원 가제보에서 여유롭게 티타임을 갖던 플로아는 기운이 없었다.
정확히, 메이가 언젠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물론 그가 힘차고, 정열적이고, 언제나 기운 넘치는 사내는 아니었지만 나른한 얼굴이 졸려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그의 귓가엔 오늘 아침에 메이가 했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아빠를 설득하지 마세요.’
‘아빠가 스스로 잘못을 깨우쳐야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당부했으나 그녀가 떠나도록 놔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 덕분에 겨우 파사베아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살게 된 플로아로서는.
‘어쩌면 좋을까.’
떠나질 않길 바라서 그녀에게 정신계 마법을 쓸까 하는 위험한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어찌 그 맑은 소녀를 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겠는가.
옳지 않은 방법이란 걸 알기에 바로 관두었다.
그는 의미 없이, 정원사가 파릇파릇한 꽃들에 물을 주는 모습을 보다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바람과 함께 사라진 그가 다시 발을 디딘 곳은 페르시스가 있는 집무실이었다. 플로아는 앉아서 일을 보고 있는 페르시스에게 다가갔다.
페르시스는 플로아가 왔음을 눈치챘지만 딱히 그에게 눈길을 주진 않았다.
플로아가 페르시스의 책상 앞에서 물었다.
“어째서 메이 님을 아들로 키우시려는 겁니까.”
페르시스의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에만 꽂혀 있었다. 그의 답은 단순했다.
“아들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메이 님을 데려오신 건 아니잖습니까. 아들이 필요하기만 했다면 굳이 메이 님을 데려올 필요도 없고요.”
정말로 그저 아들만 필요했을 뿐이라면, 여자아이를 데려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아들이 필요했고, 그런 와중에 메이를 내 자식으로 인식하게 됐고, 그래서 데려왔지.”
“메이 님은 여자입니다.”
남자가 아니라.
“…….”
플로아의 말에, 세련된 까만색 만년필을 잡고선 서류 위를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이내 그는 만년필을 내려놓곤 고개를 들어 플로아를 바라보았다.
페르시스의 얼굴엔 늘 그랬듯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고, 플로아의 얼굴은 어쩐 일인지 감정에 지배되어 있었다.
“플로아, 네가 뭘 우려하는지는 알겠어. 파사베아의 핏줄이 아닐 수도 있는 메이가 가주가 될까 봐 이러는 거잖아.”
“…….”
차마 메이가 떠날까 겁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기로 그녀와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내 아들이라고 해서 가주가 된다는 법은 없지. 가주가 될 남자아이는 언제든 따로 만들 수 있어.”
네가 그랬잖아. 내 생식 능력이 온전하다고.
그는 정말 딸을 아들로 키우게 해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장난조의 말까지 내뱉었다.
그의 말은 모순덩어리였다. 애초에 아들이 왜 필요하겠는가. 가문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있어야 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가문을 물려줄 아들은 따로 만들겠다니.
그렇다면 굳이 딸을 아들로 키울 필요가 뭐가 있지?
이보다 모순일 순 없었다.
“……인정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가문에 아무런 짝도 쓸모없는 딸을, 그것도 친딸이 아닐지도 모를 아이를 자신이 직접 거둬들인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 메이 님을 아들로 키우려는 겁니까.”
그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 애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지.”
회피는 긍정이었다. 그가 쐐기를 박았다.
“이 집에 여자애는 없어.”
“…….”
그는 다시 만년필을 잡아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저 일을 보았다.
“메이가 가문의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는 아들로 키울 거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이 결정엔 변함이 없을 것이고.”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플로아가 물었다. 후회하지 않겠냐고.
그러고 보니 하인드도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물었었다.
‘……정말로 메이를 아들로 키우려고?’
후회하지 않겠냐는 표정으로.
‘전부 답지 않은 걱정들이지.’
“전에도 그리 물었었지. 그때 모호하게 답했으니 오늘은 확실히 일러두지.”
아들로 키우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 꼬맹이를 고아원에 보내려 한 것도, 울게 만든 것도.
그 무엇 하나 빠짐없이 전부.
“후회하지 않아.”
차갑다 못해 얼어붙은 음성이 가슴에 박히듯 다가왔다. 못 박힌 자리의 고통이 상당해서, 차라리 메이가 아닌 자신이 듣고 있다는 게 감사할 정도였다.
그는 쉽게도 그런 말들을 늘어놓는다.
“앞으로도 후회할 일은 없어.”
페르시스가 바라던 대로 꼬맹이는 그의 자식이 되었고, 바라던 대로 아들로 키워질 것이며, 그 꼬맹이는 자기 신세를 알기에 아버지에게 반항 하나 하지 못할 터.
결국 모든 게 페르시스, 그의 뜻대로 되었으니까.
***
플로아는 페르시스의 집무실에서 나와 소리 소문 없이 도서실 한구석에 안착했다. 조용한 걸음으로 책장 서너 개를 지나치니 소파에 앉아 수업 중인 메이와 유디프 부인이 보였다.
메이가 책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마력으로 작동하는 기차라고요?”
“제국 3대 수호신의 마력으로 움직인답니다.”
“신기해요! 꼭 타 보고 싶어요!”
그들은 제국 3대 수호신의 마력으로 운행되는 기차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차 창문이 커서 바깥 풍경을 보는 맛이 있다며 기차 여행을 꼭 해 보라는 말과 꼭 해 보겠다는 말을 주고받고 있었건만.
남몰래 제 눈동자에 메이를 담던 플로아의 귓가엔 무감정한 음성이 맴돌았다.
‘후회하지 않아.’
‘앞으로도 후회할 일은 없어.’
과연 그럴까. 과연 저 소녀를 잃고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소녀가 떠날 때쯤이면 이미 서로가 길들어져 있을 터인데.
어쩌면 자신이 소녀가 떠나지 않길 바라는 이유가 페르시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주인 그가 비체에게 버려져 그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것처럼, 딸에게도 버려져 다시 망가지게 될까 봐.
자신은 플로티나를 위한 존재니까. 늘 플로티나 가주의 안위를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러나 큰 시련으로 견고해진 그가 다시 망가질 걱정을 한다는 건 기우에 불과할뿐더러, 그런 이유로는 자신의 마음이 왜 이리 미어지는지 설명이 불가하다.
‘그 무엇 때문도 아니라 그저 나 스스로가 그녀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거겠지.’
플로아가 사색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덧 수업은 끝나 아틸라 유디프는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