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3화
“페르시스 님.”
페르시스가 그의 침실로 들어가기 전, 그를 불러 세운 건 다름 아닌 플로아였다.
“메이를 데려왔으니 그 꼬맹이한테 가 보든가.”
페르시스의 말은 어쩐지 차가웠다. 자신은 할 도리 다 했으니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말처럼 들렸다.
“사과는…… 하셨습니까?”
고아원에 보내서 미안하다는 사과 말입니다.
페르시스는 아무런 표정 없이 대답했다.
“하긴 했지. 그래야 데려올 수 있으니까.”
그에게 있어서 사과는 진심이 아니라 메이를 데려올 수단이었다.
얼마 되진 않지만 메이와 함께 있어 봐서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안다. 고집이 세고 정이 많은 아이.
그런 아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사과가 최적의 수단이라 생각했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메이는 그 아이 방에 있다. 지금쯤 저를 키운 시녀 품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페르시스는 가 볼 거면 가 보든지, 라는 어조로 말하곤 그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홀로 들어선 그는 착용하고 있던 녹색 크라바트를 풀며 생각했다.
메이는 이제 자신의 아이다. 친자식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 사실은 언제까지고 변함없을 예정이다. 이를 인정했다.
그래서 거둬들이기로 결심한 거지만 간혹 불쾌감이 생긴다.
자신의 아버지는 친자식이 아닌 파스칼을 친자식처럼 키웠고, 그 후 가주 자리를 욕망하던 파스칼로 인해 처참히 죽었다.
가엾다는 이유로, 불쌍하다는 이유로 거둬들이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걸 모두가 안다.
미련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아버지를 싫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자신도 메이를 거둬들이는 꼴이라니. 단편적인 모습만 보면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다.
아버지처럼 행동하기 싫다. 아버지와 닮고 싶지 않다.
하지만 메이를 포기하기엔 이미 그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버렸다. 그 아이가 다른 이를 부모로 삼는 건 허락할 수 없다. 자신이 키워야만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처럼 되는 건 싫으니.
택한 방법은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친자식이라 확정되기 전까진 메이를 아들로 키우는 방법이었다.
후계자가 필요해서 거둬들인 거라면 자신과 가문을 위한 명백한 이유가 존재하게 되니까.
자신이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되니까.
겨우 그런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페르시스는 메이를 아들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
그대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눈물을 그쳤을 땐 잘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엘렌과 조안은 나를 진정시키곤 침대에 눕혔다.
나는 그들과 떨어지기 싫어 응석을 부렸다.
“엘렌, 조안, 같이 자면 안 돼?”
엘렌이 내게 이불을 덮어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저희가 어찌 아가씨 방에서 자겠어요.”
“그럼 내가 하녀방으로 갈게. 같이 자자.”
“그건 더더욱 안 돼요. 주인님께서 아셨다간 혼내실 거예요.”
“그래도 같이 있고 싶은데…….”
엘렌 옆에 있던 조안이 맑은 미소를 보였다.
“우리 이제 매일 볼 거잖아요. 앞으로 언제든 같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긴 하지. 아빠가 날 내쫓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엘렌이 내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주었다. 손길이 부드러웠다.
“그러니까 내일 봬요.”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겠어. 내일 봐 엘렌, 조안.”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좋은 꿈 꾸세요.”
내게 상냥한 인사를 남긴 그들은 불을 끄고선 문을 살포시 닫고 나갔다. 나는 적막 속에서 멀뚱멀뚱 익숙한 천장을 보았다.
이제 나는 죽을 일이 없다. 페르시스가 사기꾼을 죽였으니 나를 대신해 피해를 볼 아이도 없다.
게다가 페르시스에게서 공작저에서 내쫓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오늘 있던 일들이 꿈만 같았다.
내가 또다시 감격에 젖어 있을 때였다.
“주무십니까?”
근처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누, 누구…… 플로아 님?”
도대체 언제 들어온 건지, 플로아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날 올려다보자 창밖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청승맞은 얼굴을 비췄다.
내가 플로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무릎은 왜…….”
그가 내뱉은 말은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뭐가?
내가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떨궜다.
“무리하도록 놔 둬서 미안합니다.”
아아, 내가 쓰러진 거?
“그걸 왜 플로아 님이 사과해요. 제가 주위 사람들 말 안 듣고 무리해서 쓰러진 건데.”
“저도 말렸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메이 님께서 쓰러지지 않으셨을 겁니다. 고아원에 가지도 않았을 테고요.”
“혹시 그게 미안해서 고아원에 가는 날 배웅도 안 해 준 거예요?”
플로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헛숨을 내쉬었다.
날 싫어해서 배웅 안 한 건 아니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했다.
“저는 플로아 님이 저를 말리지 않은 것보다 배웅 안 해 준 게 더 속상해요. 다신 못 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얼굴 한 번 안 비출 수가 있어요? 순간이동 하면 1초 만에 올 수 있잖아요.”
“……미안합니다.”
그는 내가 무어라 답을 할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많이 서운했던 게 아닌지라 그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알겠어요. 용서할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제야 플로아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한테 진 빚이 있으니까 앞으로는 항상 제 편이 되어 주세요. 다시는 절 속상하게 하지 않겠다고도 약속해 주세요.”
“……정말 그거면 됩니까?”
“그럼요. 플로아 님이 제 편이 되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요.”
플로아는 범접할 수 없는 마력을 가진 자다. 그런 플로아가 내 편이 되어 주는 것보다 듬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왜요? 싫어요?”
내가 장난스레 물으니 그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손을 뻗어 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내게 맞닿은 손도, 입술도 저녁 바람처럼 시원했다.
“메이 님께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보였다.
플로아는 내가 잠이 들면 가겠다며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는 내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졸린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플로아 님, 궁금한 게 있어요.”
“플로아라 부르셔도 됩니다.”
“그럼 플로아라 부를게요. 플로아, 궁금한 게 있어요.”
“하문하시지요.”
“플로아는 수호신인데 왜 아빠랑 저한테 존칭을 써요?”
수호신이면 일단은 신인 건데, 어째서 인간인 페르시스와 자신에게 존칭을 쓰는 건지 늘 궁금했었다.
“계약이 그리되어 있습니다. 플로티나의 사람에겐 존칭을 쓰도록요.”
“조금 억울하지 않아요? 플로티나 사람이 플로아에게 존칭을 써야 맞는 거잖아요. 가문의 수호신인데.”
“아시다시피 계약은 저로 인해 맺어진 겁니다. 파사베아 님이 괜찮다 하시는 걸 제가 설득해서 계약을 맺었죠. 그런 제가 억울할 리가요.”
“그렇군요…….”
플로아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눈꺼풀이 무거워져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잠이 들려는 건지 목소리에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이제 가 보셔도 돼요……. 잘 거예요…….”
“잠드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곯아떨어졌다. 전날 사기꾼을 만나 불안함에 잠을 설쳤으니 하루 꼬박 새우고 잠을 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
플로아는 의자에 앉은 채, 제 앞에 놓인 침대에서 새근새근 자는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플로티나의 혈육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플로티나의 혈육들은 다섯 살 내외로 가문의 힘이 발현됐으니까.
그래서 가주가 될까 봐 경계했건만, 왜 오늘 그녀를 보니 파사베아와 닮은 것도 같을까.
외모, 성격, 분위기, 무엇 하나 비슷한 게 없는 생판 다른 사람인데 왜.
그 이유를 찾다 보니 파사베아가 언젠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플로아, 너는 내게 사람을 왜 그리 쉽게 용서하냐고 물었었지.’
‘용서받은 사람들이 파사베아 님을 우습게 볼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래. 알다마다. 나를 우습게 볼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그들을 용서하는 이유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란다. 용서해서라도 꼭 이뤄야 할 목표가.’
‘목표 하나 이루겠다고 파사베아 님이 우스워져도 괜찮으시다는 겁니까? 저로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 어때. 어차피 목표만 이루면.’
다신 안 볼 사람들인데.
***
어젯밤, 늦게 잤음에도 메이는 일찍 눈이 떠졌다. 엘렌이 깨우러 찾아오지 않은 걸 알고는 8시도 안 됐음을 알 수 있었다.
메이는 어젯밤 플로아를 만났던 게 꿈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그가 있었던 곳을 보았다.
“……플로아?”
놀랍게도 그곳엔 아직도 플로아가 있었다!
메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자는 것만 보고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아직도 여기에…… 아니면 다시 찾아온 거예요?”
그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뜬금없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메이 님께서 그러셨죠. 가주 자리를 절대로 넘보지 않겠다고.”
눈을 다 비빈 메이는 손을 내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플로티나의 후계자로 키워질 거면서 말이죠.”
갑자기 그건 왜 묻지?
“……그랬었죠. 왜요? 혹시 제가 가주 자리 넘볼까 봐 또 경계하시는 거예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그가 말을 끊고 되물었다.
“그렇다는 건, 떠나실 거라는 겁니까?”
저도 페르시스 님도 버리고?
그의 나른한 얼굴이 한껏 처연해졌다. 메이는 그가 도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