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2화
그의 사과가 달갑지 않았다. 물론 사과를 못 받는 것보단 받는 게 낫긴 하다. 하지만 그때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사과로 일을 끝내려는 그가 얄밉고 못마땅했다.
게다가.
“내가 사과를 해야 할 게 있으면 말해. 전부 사과할 테니까.”
하! 사과해야 할 걸 나더러 말하라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사과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래? 그럼 이제 없는 것 같군.”
그 뻔뻔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조금 전까지 한 사과는 진심으로 미안해서 한 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고백하는 척 얘기했다.
“전부 내 심술이었다. 네가 단지 비체의 딸이라는 이유로 내 시야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고, 어떨 땐 괴롭히고 싶기도 했지.”
나빴다. 정말 나빴다. 내가 비체의 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란 걸 알 만한 사람이 저랬다니까 말이다.
“전 지금 각하께서 왜 사과를 하는지 물었어요.”
“왜 사과하냐고? 네가 필요해졌거든.”
고아원에 보내 놓고 이제 와서 필요해졌다니.
그 말이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난 필요하면 거두고, 필요치 않으면 내치면 되는 그런 존재란 걸 확인사살 당한 것 같아서.
“……그래서 저를 다시 데려가려고 사과를 하는 거예요? 미안해서 사과한 게 아니라?”
“내 잘못임을 인정해서 사과한 거야.”
난 그 말뜻을 안다. 사과할 마음이 그다지 없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과한다는 거겠지.
“너를 데려가려는 조건으로 사과를 하는 건 아니야. 내가 원하는 패에 그것밖에 못 걸 사람도 아니고.”
“…….”
“네가 필요해졌어. 널 자식으로 인정해 주마.”
“……그래서요?”
“널 내 자식으로 들일 거야. 그런데 그냥 들이진 않아.”
그냥 들이진 않겠다는 걸 보니 아직도 내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들로 살아가는 건가요?”
“이전과는 달라. 네가 내 핏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저 내 아들로 살아가면 돼.”
“각하의 혈육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요?”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네가 내 핏줄이 맞다면 아들이 아닌 딸로 살아가게 하겠다. 나로 인해 생겨난 아이이니 책임지고 플로티나의 하나뿐인 공녀로서 평생 대우받게 해 주지.”
이전의 그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얘기였다. 물론 내가 페르시스의 친딸이라면 응당 누렸어야 할 것이지만 내가 그의 친딸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남자로 살려는 거라면 이미 고아원에 오기 전부터 각오했던 거기도 하니까.
애초에 내 목표 또한 공작저에서 지내다가 밥벌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출가하기였다. 지금으로선 내게 이보다 파격적인 조건이 없다.
거기다 그는 내게 가문의 힘이 발현되는 그 순간부터 평생, 그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고 살게 해 주겠다며 말을 덧붙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끔 모든 최대한 지원해 줄 거라며.
“내 피가 섞인 내 딸이니까.”
그런데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왜일까. 그는 그저 자신의 친딸이 살아갈 미래를 알려 준 것뿐인데.
어째서 가슴이 저릿했던 건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거절하고 싶다면 지금 해. 그리고 앞으론 내 눈에 띄지 마.”
그것은 경고였다. 더는 자신을 정 따위에 휘둘리게 하지 말라는 경고.
“선택해. 내 자식으로 살 건지, 고아원에 갈 건지.”
사실 나는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결정을 내렸다.
고민할 게 뭐 있어? 당연히 콜이지.
플로티나 공작저만큼 안전하고도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친딸이 아니어도 지내게 해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난 그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평화롭게 지내면 되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면 되는 것이다!
다시 공작저에서 지내며 엘렌과 조안과 수다를 떨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신이 났으나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대로 오케이 하기엔 사과가 부족했으니까.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 각하의 아들로 살아갈게요.”
“……그거면 되나?”
쉽다는 듯한 어투에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거면 된다니요? 사과에 진심이 들어가야 해요. 그거 엄청 어려운 거예요.”
“그래, 진심을 담아 사과하지.”
페르시스가 눈을 감고선 다시 입을 뗐다.
“내가 미안해. 앞으론 네게 모질게 굴지 않겠다. 내쫓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에 떨게 하지 않을 것이고, 그 여자 딸이라는 이유로 널 미워하지 않을게.”
그의 눈꺼풀이 올라가더니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제 됐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내 위치에서 다시 사과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약속을 어기면요?”
“어길 일은 없을 것 같군.”
“그건 모르는 거죠.”
“……내 재산 중 반을 떼어 주지.”
반이라고? 엄청난 딜에 내 입이 떡 벌어졌다.
페르시스의 재산 중 반이면 얼마야…….
정확히 얼마인지 따질 것도 없이 삼대가 돈을 펑펑 쓰고 살아도 남을 돈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약속을 어긴 적은 없거든. 상대가 어기면 몰라도.”
“기대 안 해요.”
돈보다는 어린 나를 안전하게 키워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할 건가? 내 자식.”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의 입가에도 보기 드문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그와 대화를 마친 후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감색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방긋 올렸던 입꼬리가 조금씩 내려가 내 기분과 타협할 수 있는 지점에서 멈췄다.
나는 안다. 그가 누구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사과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한다는 것부터가 거짓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다행이다.
언젠가 메이 플로티나의 삶을 내려놓고 공작저를 떠날 때, 미련은 없을 테니까.
***
마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페르시스는 지루한 바깥 풍경에서 시선을 떼, 맞은편에 앉은 백금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이 소녀의 짧은 머리칼을 휘날리게 했다. 한 올 한 올 엉키지 않고 찰랑거리는 생머리.
소녀를 낳다가 죽은 그 여자는 생머리가 아니었다.
반면에 그는 소녀와 같은 생머리였다.
페르시스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저 머리칼만큼은, 자신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
마차에서 내렸을 때의 하늘은 완연한 감색이었다. 그 하늘에 떠 있는 작은 별들이 희게 빛났고, 그 빛은 내 눈에 가득 들어온 플로티나 저택을 은은하게 비췄다.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구나.
원작의 굴레에서 벗어났구나. 죽음을 피했구나.
더는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서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고개를 들어 흘러나오지 않도록 했다. 엘렌과 조안을 밝은 얼굴로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페르시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행동이 낯설어서 손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자신이 그의 손을 거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님을 깨닫곤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내 손보다 따뜻했다.
페르시스는 내 손을 잡자마자 곧장 걸음을 뗐다. 그가 다리가 길어서 보폭이 넓어, 나는 속도를 맞추려고 빨리 걸어야만 했다.
이 인간은 아이한테 배려가 없어, 배려가! 천천히 좀 걸어 주면 어디 덧나나?
그의 옆통수를 한껏 째려보니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흠칫하며 곧장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째려본 거 눈치챘으려나?
혼내진…… 않겠지?
그는 걸음을 멈추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나를 들어 안았다. 그가 나를 안고 걸으며 말했다.
“다리가 짧아도 너무 짧군.”
뭐시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나 다리 안 짧거든? 롱다리거든? 그리고 앞으로 클 날이 많이 남았거든?!
그렇게 반박해 주고 싶었으나 내 처지에 뭘 할 수 있겠는가.
“잘 먹고 잘 자면 다리가 길어질 거예요.”
예쁜 말로 순순히 인정하는 수밖에.
“약속했으니 뭘 하든 내쫓는 일은 없겠지만 저번처럼 쓰러지지는 마. 아픈 건 질색이야.”
저번에 쓰러진 이유는 쫓겨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몸을 혹사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젠 불안감을 가질 일이 없으니 무리하지도 않을 것이고 쓰러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체력 관리 잘할 거니까 쓰러질 일은 없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페르시스가 날 안고선 저택 안에 들어가자 고용인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럴 만했다. 다신 안 볼 것처럼 애를 고아원에 보낸 그가 친히 안고서 데려왔으니까.
페르시스는 나를 내 방까지 안아서 데려다준 후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얼마 안 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엘렌과 조안이 내 방으로 달려왔다.
문을 열어놓은 덕에 달려오는 엘렌과 조안을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아가씨……!”
“메이 아가씨!”
“엘렌! 조안!”
허겁지겁 달려온 엘렌과 조안을 보자마자 그동안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엘렌과 조안에게 달려가 안겨 펑펑 울었다.
“보고 싶었어, 엘렌…… 조안…….”
“저도 아가씨 보고 싶었어요.”
“아가씨가 없어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울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울려 퍼질 정도로 울었다. 해방의 눈물이었다.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에서의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