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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1)화 (21/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1화

덜컹― 덜컹―

놈을 따라서 올라탄 마차가 돌을 밟아 덜컹거렸다.

페르시스와 삼자대면은커녕 그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한 채 사기꾼 놈에게 입양되어 따라가게 됐다.

결국엔 이렇게 되어 버렸다. 원작 내용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공작가에서 쫓겨나 사기꾼에게 입양되었고.

이제 노예로 팔려 다닐 일이 남은 건가.

놈과 함께 마차로 이동하는 이 시간만큼은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돼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앞에 앉은 사기꾼 놈을 힐끔 쳐다보았다.

놈은 어린애와 함께 도덕심도 팔아 버릴 정도로 돈이 급했던 걸까?

분노하는 것도 지쳤는지 놈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심하게도 평화로운 바깥을 보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시나리오를 그려 봤다.

제일 최악의 시나리오는 원작 메이처럼 백작가 영애의 노예가 된 후, 그녀에게 맞아 죽는 것이다.

그럼 차악은?

그 여자가 날 때리지 않게 평생 아부를 떨면서 사는 것이겠지.

그 시나리오를 생각하니 헛웃음이 다 나왔다.

죽음을 피하고자 죽음보다 못한 삶을 택하는 것 같아서.

메이의 몸에 빙의되기 전에, 원작을 읽고 허공에 던진 질문이 있었다. 메이는 정말로 행복할 수 없었던 걸까.

하지만 나는 이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다. 앞으로 더, 더, 더. 암담해져도 메이는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그러다가 원작 메이가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을 걸 생각하면 괴로워졌다. 그녀에게 이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희망 고문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도 괜히 발버둥 치고 있는 게 아닐까?

순순히 운명을 맞이하면 쉬울 것을, 겨우 행복 하나 찾겠다고 힘들게 사는 게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들이.

전부 부질없는데도 마음만 심란해졌다.

‘하지 말아야지.’

나는 나를 갉아 먹는 생각들을 뚝 끊고선 바깥 풍경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다짐 하나로.

***

마차는 초저녁쯤이 되어서야 어느 골목길에 멈춰 섰다. 놈이 먼저 마차에서 나가더니 내리라는 듯 내게 손을 까딱까딱했다.

“내려.”

나는 이 틈을 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탈출로를 그려 봤으나, 저 앞에 힘 잘 쓸 것 같은 우락부락한 몸의 남성과 눈이 마주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선 마차에서 내려와 사기꾼이 내민 손을 잡았다. 누구의 손을 잡는 게 이리도 끔찍한 적은 처음이었다.

놈은 그 우락부락한 남자에게 날 데려갔다.

“오늘 경매에 낼 거 데려왔어.”

놈이 말하자 우락부락한 경매사가 내 턱을 거칠게 잡아 들어 올려 내 얼굴을 확인했다.

날 꼼꼼히 관찰하는 그 눈빛이 무섭고도 역겨웠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서 손을 떼어 냈다.

“액수는 어느 정도 원하지?”

나는 놈이 날 금액을 매기는 게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꿋꿋이 귀에 박히는 금액은 토가 나올 정도로 역했다.

내게 힘만 있었다면 저들이 평생 지껄일 수 없도록 입을 꿰매 버렸으리라.

“알겠다. 돈은 이 애가 팔리면 주겠다.”

경매사는 내 팔을 덥석 잡아 자신 쪽으로 끌었다. 사기꾼 놈은 돈을 벌어 좋은지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그럼 다시 찾아올게.”

그렇게 사기꾼 놈은 나를 두고 마차 쪽으로 걸어갔고, 경매사는 내 팔을 붙잡은 채로 어느 음습한 건물이 있는 쪽으로 데려갔다.

마음 같아선 팔을 세게 내치곤 튀고 싶었으나 막상 우락부락한 몸의 남자가 바로 옆에 있으니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당하고 있어야만 하는 게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아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때였다.

촤아악―

뒤편에서 농도 짙은 액체가 흩뿌려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 몸집만 한 게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털썩.

그리웠을지도 모를 목소리는 그다음으로 들려왔다.

“메이 플로티나.”

그 부름에 소름이 돋아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멈춰 서니 앞서가던 경매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경매사는 뒤편에서 무언갈 보곤 급작스럽게 벌벌 떨었다.

“사, 살려…….”

경매사가 내 팔을 놓고 뒷걸음질하다가 도망칠 때쯤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감아.”

나는 그의 지시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촤아악―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와 함께 바닥에 무언가가 처참히 흩뿌려지는 소리. 육중한 몸이 중심을 잃고 고꾸라져 넘어지는 소리.

내 볼에 미지근한 액체 서너 방울이 튄 게 느껴졌을 무렵 나는 깨달았다.

미친 페르시스가 놈들을 죽였다는 것을.

차갑게 식어 가는 액체 방울이 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 턱 끝에 매달렸던 방울이 톡, 바닥에 떨어지니 그제야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사람이 둘이나 죽었다. 살아 있느니만 못한 인간들이었지만 어쨌든 사람이 죽었다. 페르시스의 손에.

그동안 난 페르시스라는 캐릭터를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냉담하고 비정하지만, 스텔라에게 푹 빠져 그녀의 딸바보가 될 남자.

그리 해석했건만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건 오로지 원작에서 그려진 페르시스를 해석한 거였으니까.

현실의 페르시스는 다르다.

그는 파사베아의 핏줄이다.

파사베아가 누구인가? 이 스타시아 제국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제국 건국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하며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겠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제 발 아래에 두었겠는가.

그의 손주인 페르시스가 뭘 보고 배우며 자랐겠는가.

페르시스는 미치광이다. 하필이면 강하기까지 해서 누구든 언제든지 자기 멋대로 죽일 수 있다. 아마 사람을 죽이는 것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겠지.

터벅터벅. 그가 내게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은 뜨지 않았다. 처참한 풍경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눈 뜨지 마.”

그는 그 말과 함께 나를 안아 들었다.

처음 느껴 본 페르시스의 품. 내게 스며드는 그의 온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었나.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 애를 고아원에 보냈나.

나를 안고서 어디론가 향하는 그에게 물었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마차 뒤를 쫓았다.”

“서신이 그렇게 빨리 갔어요?”

“서신을 보냈었나? 난 서신을 보고 온 게 아니야.”

“그러면요?”

그럼 공작 각하께선 저를 왜 찾아오셨어요? 다신 안 볼 듯이 고아원에 보낸 저를 왜?

그의 대답은 뜨뜻미지근했다.

“너를 만나려고 고아원에 갔더니 직전에 누가 널 데려갔다고 하더군. 그래서 쫓아갔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고, 죽였지.”

역시 죽였구나.

죽였다는 말이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덕분에 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이 남자는 정말 미친 사람이구나, 싶어서이기도 했고, 내가 그에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아 원작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죽음을 피했다는 걸 마냥 기뻐하기에는, 신경 쓰이는 그의 말이 있었다.

“저를 왜 만나려고 했는데요?”

“…….”

그는 침묵을 유지하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타고 온 마차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안고 있던 날 내려놓아 어딘가에 앉혔다. 엉덩이에 닿는 촉감이 푹신한 걸 보아 마차 좌석에 앉힌 듯했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 떠.”

눈을 뜨니 예상대로 마차 안이었다. 하인드 나제트에게 저녁 만찬을 초대받아 타고 갔던 그 마차.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에 울음을 삼키기 바빴던 그 마차였다.

페르시스는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더니 가슴 포켓에 있던 회색 손수건을 꺼냈다. 그 손수건으로 내 뺨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뺨에 낯설지만 싫지 않은 손길이 느껴질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왜 널 만나려고 했는지 물었나?”

“네.”

내가 보낸 서신을 보고 온 것도 아니면서 왜 날 만나려고 했을까. 나로선 그 이유를 추측할 수도 없었다.

그는 내 피를 다 닦아 주고선 일어나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 전에 사과부터 하지.”

“사과요?”

천하의 페르시스가 사과라니. 원작 소설에서도 스텔라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사과하는 꼴을 못 봤는데 나한테 사과를 하겠다고?

못 믿겠어서 눈만 껌뻑거리자 그가 표정 없는 낯으로 입술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너를 억지로 고아원에 보내려 했던 걸 사과하마.”

내 두 눈이 휘둥그레진 건 그가 말을 마친 후였다.

당신이 그걸 왜 사과해? 당신이 왜?

뭐 잘못 먹기라도 했어?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믿기지가 않아서 내 앞의 남자가 실은 페르시스가 아닌가 싶었다.

그의 사과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스텔라에게 계속 사과를 시켰던 것도 사과하지.”

뭐야, 내 잘못 아닌 거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계속 사과시킨 거였어? 이 나쁜……!

나는 분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못됐어. 내가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날 괴롭힐 수가 있어?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화나고 속상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꾹 참았다.

“네게 비정하게 굴었던 걸 사과하지. 미안해.”

화가 났기 때문인지, 미안하다는 말이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반사적으로 경계했다.

“……갑자기 왜 사과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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