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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0)화 (20/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20화

심장이 떨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설마 자진해서 자기가 사기꾼인 걸 밝힐지 몰랐던 나는 발끝부터 시작하여 머리끝까지 굳어지고 말았다.

“어떻게든 수를 써서 날 내쫓으려고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애야.”

그가 내 귓가에 더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이곳에 데려갈 수 있는 애는 너뿐만이 아니잖니.”

“이런 미친…….”

내가 낮게 읊조리며 그를 가증스럽다는 듯이 노려보니 놈이 킥킥 웃었다.

“다른 애들이 피해 보지 않길 바라서 나를 붙잡고 있는 게지?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난 어쩔 수 없이 다른 애를 데리고 가야 해. 그래도 괜찮겠니?”

분해서 주먹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겨우 이런 놈 때문에 내가 죽음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놈의 안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이제 순순히 이 아저씨를 따라갈 마음이 생겼으려나?”

***

메이를 만나고 나제트가로 돌아온 스텔라는 복도를 걷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죽든 말든 지 인생이지, 뭐. 걔 말대로 내가 신경 쓸 게 뭐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메이가 미칠 듯이 신경 쓰였다. 메이를 고아원에 두고 온 게, 마치 자신이 죽음에 몰아넣은 것만 같아 죄책감이 밀려왔다.

“망할 원작은 왜 그따위여서……. 메이를 꼭 그딴 식으로 죽였어야 했냐?!”

아아악 짜증나! 신경 쓰여! 원작을 아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냐고!!

스텔라가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며 부르짖으니 지나가던 하녀들이 그녀를 이상하게 보았다.

스텔라는 마지막까지 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른 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고양된 감정을 진정시키며 메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아원에 온 거, 아주 힘든 결정이었거든.’

‘괜히 마음 흔들어 놔서 날 더 힘들게 하지 마.’

메이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고아원에 온 게 아주 힘든 결정이었다며. 괜히 마음 흔들어놔서 더 힘들게 하지 말라며.

스텔라가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몰라. 네가 선택한 거고,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더는 널 말리러 가지 않을 거야.”

죽든 말든 신경 안 쓸 거야!

……그렇게 말할 땐 언제고 자신은 왜 또 고아원에 왔을까.

스텔라는 밤새도록 다시는 메이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수백 번 다짐했음에도 다음 날 고아원에 발을 딛고 말았다.

딸랑―

고아원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스텔라는 잠을 못 잔 티가 났다. 그녀의 퀭한 눈은 메이를 신경 쓴 대가였다.

스텔라가 고아원 안으로 들어서니 어제 봤던 선생님이 그녀를 맞이했다.

“어머, 어제 오셨던 나제트 영애님 아니신가요? 메이랑 대화하고 가셨던…….”

“맞아요. 오늘도 메이를 만나러 왔어요.”

대답하는 목소리엔 기력이 없었다. 이 역시 잠을 못 잔 탓이었다.

“메이요……?”

그 순간 불안한 기운이 스텔라를 옥죄었지만 잠을 못자 피곤해서 그럴 것이라 부정하며 사실을 간과하려 들었다.

“메이는 어딨나요?”

그러나 간과하기엔 사실은 거대했고, 자신을 옥죄는 이 힘은, 자신이 애써 무시하는 불안한 기운에서 나왔다는 걸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어쩌죠? 고아원엔 없어요. 오늘 아침에 새 부모님과 이곳을 떠났거든요.”

고아원엔, 없어요, 새 부모님과, 떠났거든요.

새 부모님과, 없어요, 떠났거든요, 고아원엔.

제대로 들은 말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한다. 혼란스럽게 하고 싶었다. 제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었으니까.

혼란스러워서 뒤섞인 말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머리를 강타했다.

……뭐?

스텔라는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다.

“메이가…… 어쨌다고요?”

“입양하겠다는 분이 오셔서 그분을 따라갔어요.”

벌써 입양이 됐다고?

그 말을 들은 스텔라는 한 번 크게 휘청하더니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양됐다니. 따라갔다니.

그 바보가 기어코…….

주위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급히 괜찮냐 묻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눈앞만 캄캄해졌다.

***

“한동안 안 보이더니 여기 있었나?”

페르시스가 며칠 만에 플로아를 목격한 장소는 늦저녁의 화원 가제보였다. 플로아도 페르시스처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이유 또한 그와 같았다.

플로아는 하루 중 특정 시간대마다 이상해졌다. 메이가 고아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자신과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하고 있었을 그 시간에, 자신도 모르게 온기를 찾아다니는 거였다.

그 아이가 남긴 온기.

훈련 때 사용했던 목검도 좋다. 식사 때 사용했던 식기도 좋고, 수업 때 사용했던 노트도 좋다.

그저 그 아이가 남긴 온기만 남아 있다면 뭐든 좋을 텐데.

그 어디에도 온기가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에 참담해졌다.

온기는 어째서 머무르지 않고 달아나 버렸나. 따뜻함을 갈망하게 만들곤 사라져 버렸나.

그렇게 찾아다니던 그때, 손에 닿은 건 제국어 사전이었다.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살짝 너덜거릴 정도로 헌것이 되어 있는 사전.

첫 장을 펴니 귀여운 글씨체로 간절한 소원이 쓰여 있었다.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제발 돌아가게 해 주세요.]

플로아의 시선은 수 분간 그 문구에 멈춰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평범한 일상은 자신이 마법을 풀기 전일 것이다. 버려질까 봐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나날들.

그래, 자신이 귀찮다는 이유로 마법을 풀지만 않았어도 그 아이는 지금쯤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터.

그 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평범했던 일상을 망친 건 다름 아닌 플로티나가의 수호신이라는 작자라는 것을.

이 간절한 소원을 읽고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알면서도 그 아인 자신에게 잘해 줬다. 협박까지 했는데도 웃어 보였다. 자신은 그런 맑은 아이의 소원을 처참히 부숴 버린 거다.

‘온기는 내가 없앤 거였어.’

내가 달아나게 했고, 내가 사라지게 한 거다.

참담한 마음을 안고 도서실을 나온 플로아는 그 이후로 계속 이 가제보에만 앉아 있었다.

“그 꼬맹이에게 배웅도 안 했다지.”

페르시스가 묻자 플로아는 시선을 떨궜다.

“제겐 배웅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플로아는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메이가 무리할 때 한순간도 빠짐없이.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말리지 않았다. 검술 스승인 자신이 말렸다면 적어도 쓰러지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도 말리지 않았다.

자신은 언제부터 이리 못난 사람이었나.

돌이켜보면 파사베아가 곁에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생명을 소중히 여겼었다. 생명에 별 관심 없는 파사베아에게, 플로티나가 앞마당에 화원을 만들어 수많은 식물을 키우자고 제안했을 정도로.

하지만 파사베아가 말없이 떠난 이후 자신은 망가졌다. 매순간, 그가 떠난 이유가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탓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게 지쳤고, 귀찮아졌고, 약속을 어겼고, 마법을 풀었다.

오로지 플로티나의 수호신으로서의 역할만 간신히 해냈다.

그것만큼은 해야 했다. 그래야만 언제 돌아올지 모를 파사베아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생각했기에.

그래서 그 어린애가 쓰러질 때까지 말리지 않고 지켜만 봤다. 참으로 잔인하게도.

“차라리 내가 꼬맹이를 발견한 날 그 즉시 고아원에 보내도록 만들지 그랬어. 얼마든 할 수 있었잖아. 네 정신계 마법으로.”

그랬으면. 이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은 들지 않았을 텐데.

“……지금껏 제 선택엔 후회가 없었습니다. 비체 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도 후회하지 않았고, 하다못해 메이 님께 가주 자리를 넘보지 말라 협박한 것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으니까.

협박했었다는 말에 페르시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겠지. 넌 플로티나를 위한 존재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젠…… 이젠 후회가 됩니다. 무리하도록 놔뒀던 게 후회가 됩니다. 말리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됩니다.”

파사베아 대신, 그 아이가 곁에 있어 줌으로써 스스로 부족하다 탓하지 않고 쓸모 있는 존재라 여기게 되었으며, 활력을 되찾았다. 그 아이의 존재만으로 자신은 치유되었다.

플로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애석한 감정이 묻어났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붙잡은 몸이 불덩이 같았습니다. 자그마한 육신이 뜨겁게 타올라 터질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그런 아이를 자신이 마법을 풀어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고, 아프게 만들었고, 끝내 고아원에 가게끔 만들었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대로 두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

“몹시 후회가 됩니다.”

그는 한순간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또한 진심이었다.

그가 한껏 처량해진 낯으로 물었다.

“페르시스 님은 후회되지 않으십니까?”

***

챙그랑―!

이 요란스러운 소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페르시스가 식사 중 낸 소리였다.

난생처음, 그가 포크를 떨어트렸다. 그는 자신이 포크를 놓쳤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빈 손바닥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불쑥, 플로아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페르시스 님은 후회되지 않으십니까?’

‘메이 님을 내쫓은 걸 후회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 따분한 물음에 자신은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었다.

‘내가 내린 결정으로 후회한 적은 없었지.’

‘그럼 메이 님을 영영 못 보게 되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이에 대한 답은 더욱 모호했던 것 같다.

‘글쎄.’

그는 하녀가 바닥에서 주워 간 포크를 보며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그 꼬맹이도 포크를 떨어트렸었지.’

눈앞에 아른거리듯 환영이 보인다.

포크를 떨어트려 일순간에 돌처럼 굳어 버린 그 꼬맹이가.

혼을 내지 않으니 안도하던 그 꼬맹이가.

입가에 소스가 묻었는지도 모르고 먹기 바빴던.

내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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