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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9)화 (19/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9화

“…….”

“솔직히 그땐 너도 각하도 너무 미웠는데, 이젠 별생각 없어. 보다시피 내게 더 큰 고민거리가 생겨서 말야.”

“…….”

“어쨌든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거면,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이만 가 주라. 고아원에 온 거, 아주 힘든 결정이었거든.”

그 말에 스텔라는 흠칫하더니 눈동자를 떨었다.

“괜히 마음 흔들어 놔서 날 더 힘들게 하지 마.”

내 팔을 붙잡은 스텔라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툭, 나를 놓아 손을 힘없이 떨어트릴 때쯤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리 걱정하진 않아도 돼.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려고 별수 다 쓸 거니까.”

“…….”

시선을 떨군 스텔라는 침묵만 유지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내 걱정을 많이 한 듯했다.

“걱정했다는 거에 부정 안 하네?”

내가 키득키득 웃자 스텔라가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듯 쏘아보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난 이만 들어가 볼게. 나와 있다가 사기꾼 놓치면 안 되거든.”

“야……!”

“나, 간다? 나중에 보자.”

“야! 메이! 야!!!”

그 뒤로 스텔라가 날 몇 차례 부르긴 했지만 무시하곤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대화를 더 나눴다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질 것 같아서였다.

도망쳐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일단은 사기꾼이 날 입양해야 한다.

그래야 나를 대신해서 피해를 보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낯선 그림자가 다른 아이들을 지나쳐 내게로 걸어왔다. 그 그림자 옆엔 선생님의 그림자도 있었다.

그 두 그림자는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낯선 그림자는 나와 시선을 맞추려는 듯 쭈그려 앉았다.

이상하리만큼 꺼림칙한 중년의 남자였다.

“너 참 예쁘구나. 이름이 뭐니?”

나는 그 낯선 목소리에 어째서인지 얼어붙고 말았고, 대답은 선생님이 대신해 주었다.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이름은 메이입니다.”

“그렇군요. 메이.”

그 남자가 기분 나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메이야.”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아떨어진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좋은 예감은 틀려도 불길한 예감은 진절머리가 날 만큼 매번 과녁에 적중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앞에서 내게 말을 거는 이 남자가 원작 메이를 입양해 노예로 팔아 버린 그 사기꾼일 거라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저씨랑 함께 가기 싫니? 왜 말이 없어. 아저씨 따라가면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

이거 누가 봐도 유괴범이 할 법한 멘트 아닌가?

어른들이 아이한테 맛있는 거 사 줄 테니 따라오라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얘기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들이 바보여서 다들 똑같은 멘트로 유인하는 게 아니다. ‘맛있는 거 사 줄게’라는 이 간단한 멘트보다 효과가 더 좋은 유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좋아하니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얼어붙은 몸을 녹인 후, 거짓 미소를 보이며 순진한 척 해맑게 물었다.

“맛있는 거, 어떤 거요? 저는 스테이크를 좋아하는데, 히히. 굽기는 미듐웰던으로요.”

“미, 미듐, 뭐?”

예상했듯, 남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당황할 만하지. 여자애를 노예로 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애한테 스테이크를 사 줄 돈이 있겠어?

뭐, 있어도 애초부터 사 줄 마음 없겠지만.

“장난이에요. 사실 맛있는 거면 다 좋아해요.”

“그렇니, 하하…….”

남자는 어색하게 웃다가 집요하게 다시 물었다.

“메이야, 나와 함께 갈래? 평생 고아원에서 살긴 싫잖아, 응?”

마치 지금 자신을 따라가지 않으면 평생 새 가족을 못 만나서 고아원에서 살 것처럼 얘기한다. 원작 메이한테도 이런 식으로 불안감을 주며 유인했겠지.

사기꾼을 보면 볼수록 화가 들끓었으나 애써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좋아요, 아저씨. 그런데 오늘 말고 사흘 뒤에요.”

“어째서 사흘 뒤니?”

사흘이라는 시간은 내가 페르시스에게 이곳으로 와 달라는 서신을 보내, 그가 서신을 읽고선 이곳으로 오기까지 넉넉하게 잡은 것이었다.

나한테 페르시스라는 빽이 있다는 걸 알면 제 발 저려 줄행랑을 칠 게 뻔하니까.

페르시스가 와서 이 사기꾼 놈이 고아원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내가 만든 여러 시나리오 중 최고의 시나리오다.

페르시스가 약속을 어기고 안 온다거나, 사기꾼 놈이 간덩이가 부어 끝까지 나를 입양하려 든다면 그땐 다른 시나리오를 꺼내야겠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사흘 정도의 시간을 얻는 게 중요하다.

“제가 아저씨를 따라가면 친구들을 못 보게 되니까 마지막으로 추억을 쌓고 싶어서요.”

없는 친구를 만들어 내니까 스스로가 초라해졌다.

그래도 이런 부탁이면 거절할 수 없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추억은 이제껏 많이 쌓았지 않니? 사흘은 너무 늦으니까 내일 가는 거로 하자꾸나.”

“안 돼요! 적어도 사흘은……!”

“안 되는 게 어딨어. 그럼 내일 다시 오마, 메이.”

“아저씨……!”

망할 사기꾼 놈은 내 계획을 처참히 부수곤 사라져 버렸다.

***

사기꾼이 돌아간 후, 나는 재빨리 계단을 올라 2층 원장실로 달려갔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서신을 보내야만 했다.

내일 당장 입양될지라도, 서신이 늦게 도착할지라도, 지금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했다.

나는 티보르 남작이 있을 원장실 문을 세게 젖혔다.

쾅! 하는 소리에 느긋하게 책을 읽던 고아원 원장, 티보르 남작이 화들짝 놀랬다.

“까, 깜짝이야……. 메이야, 문은 살살 열어야지…….”

배가 불룩 나온 티보르 남작은 어딘가 정감이 있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죄송해요. 급해서 그만……. 그건 그렇고, 원장님!”

내가 크게 부르자 남작은 또 놀랐는지 크게 흠칫거렸다.

“메, 메이야……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면 원장님이 깜짝깜짝 놀래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해서……. 지금 빨리 서신을 보내야 해요!”

“서신? 아아, 전에 부탁했던 거?”

불행 중 다행인 건 티보르 남작이 아이들을 제법 아낀다는 것이었다.

내가 서신을 최대한 빨리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총알 같이 보내 줄 사람이었다.

페르시스의 명이기도 하니 거절할 수도 없겠지만.

나는 서신에 구구절절 와 달라는 애원을 쓸 시간이 없었기에 무작정 빨리 와 달라는 한 줄만 적고 남작에게 전달했다.

“꼭꼭! 빠른 배송 부탁드릴게요!”

남작은 알겠다며 제 옆에 있던 기사에게 서신을 넘겼다.

기사는 서신을 들고 원장실 밖으로 나갔다.

“방금 나간 기사가 발 빠른 말을 잘 다루는 기사이니 오늘 안엔 도착할 거란다.”

“정말요? 정말 오늘 도착해요?”

“원장님이 장담하마.”

이 얼마나 안심되는 말인가. 서신이 오늘 안에만 도착한다면 내일 사기꾼과 삼자대면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동안 남작이 물었다.

“그런데 메이야, 플로티나 공작님을 봬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니?”

그 물음에 나는 사실대로 털어놓아야 할지 고민했다.

나를 입양하려는 사람이 애를 노예로 팔아먹을 사기꾼인 것 같다고.

그러면 남작은 날 절대로 사기꾼에게 넘기지 않을 터.

수 초간 고민한 끝에 관두기로 했다.

“입양 가기 전에 고아원에서 공작님과 삼자대면하기로 약속했었거든요. 그뿐이에요.”

이미 놈이 나를 입양하기로 한 마당에 별의별 이유로 안 된다고 했다간 다른 아이를 입양하려 들 수도 있고, 고아원이 사람을 차별한다는 둥 나쁜 소문을 퍼트려 고아원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도 있어서였다.

역시 놈과 페르시스를 만나게 해서 제 발 저리게 해서 내쫓는 방법이 최고야.

내가 페르시스와 친분이 있다고 하면 감히 날 노예로 팔 생각은 하지 못할 거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아닌 다른 아이로 입양하겠다고 하는 건 그것 나름대로 이상해지니까.

결국 아무도 입양하지 못하고 달아나겠지.

그러나 다음 날 찾아온 망할 사기꾼 놈은 내 뜻대로 행동해 주지 않았다.

“메이야, 아저씨랑 가족이 되는 게 싫으니? 왜 자꾸 입양을 미루려고 해, 응?”

놈이 동이 트자마자 고아원에 찾아온 것이다!

저녁에 와도 이르다 싶을 정도인데 아침에 오다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렴. 아저씨는 메이와 가족이 되고 싶은데 메이가 싫다고 하면 다른 아이를 알아볼 테니까.”

놈은 내게 가식적인 서운함을 드러내며 다른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애써 삼켰다.

가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노예로 팔아 버릴 거면서……!

“아저씨랑 가족이 되는 게 싫진 않은데 친구들이랑 좀 더 있고 싶어서요. 내일 다시 오시면 안 될까요?”

“네가 자꾸 날을 미루면 아저씨는 속상해. 아저씨 마음도 생각해 줘야지.”

아오! 나는 순간 자제를 못 하고 제 앞의 남자를 주먹으로 퍽퍽퍽 때릴 뻔했다.

놈은 화를 참는 나를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이내 흉악하게 비웃었다. 그 표정을 본 나는 움찔했다.

이, 이 사기꾼 놈 왜 이래? 왜 저렇게 웃어? 기분 나쁘게시리…….

곧 그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너,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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