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8화
페르시스는 일전에 스텔라가 울음을 터트렸던 게 메이를 난처하게 만들 모함임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메이를 계속 사과시켰다.
‘……죄송합니다, 영애.’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 어린 꼬맹이가 억울해서 눈물을 꾹 참는 모습이 보여도 계속, 계속 사과시켰다.
이유는 단순했다. 메이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겨우 열한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만든 모함에 빠진 건 순전히 메이의 잘못이다.
애초에 메이가 상대가 자신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행동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터.
이번 경험으로 깨달음을 얻어 다시는 모함에 당하지 말라는 차원에서였다.
그것이 페르시스가 메이를 계속해서 사과시킨 이유였다.
그래서 그날 일을 사과하겠답시고 온 스텔라가 순수하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쿵쿵. 강한 적대감에 스텔라의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크게 뛰어 댔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메이가 나와 있었던 일을 전부 불었나?’
“호, 혹시 공자님께 들으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꼭 들어야 하나?”
“예……?”
“꼭 들어야 하냐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가관이었다. 스텔라는 바로 앞에 있는 이 남자가 나중에 자신의 딸바보가 될 거란 게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네가 알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메이는 여자애다. 이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내 눈치를 봐 가며 아들로 살아가고 있었지.”
그가 소파 팔걸이에 팔을 얹고선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어 얼굴을 받쳤다.
“그런 애가 내 친우의 조카에게 화를 낸다고? 그것도, 고작 예쁘다는 말에?”
스텔라는 순식간에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 그렇다는 건…….”
메이가 잘못한 게 아님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계속 사과를 시킨 거야?
왜? 무엇을 얻으려고?
‘내가 얼마나 못돼먹었는지 알아보려고?’
그러나 이유가 뭐든 지금으로선 중요치 않다. 자신의 잘못인 걸 그가 알고 있으니 사죄를 해야만 했다.
스텔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공자님께…….”
“사과 받을 사람은 이 집에 없다.”
잘못을 비는 와중에, 제일 충격적인 소식이 귓구멍을 때렸다.
“그 꼬맹인 고아원에 보냈으니까.”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고아원에…… 보냈다고요……?”
원작 내용을 아는 그녀는 눈동자가 지진 난 듯이 흔들렸다.
메이를, 메이를 고아원에 보냈다고? 그럼 이제 그 애는…….
“그러니까 앞으론 플로티나에 찾아오지 마. 가능하면 내 눈에도 띄지 말고.”
페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입구 쪽으로 걸음을 뗐다.
“너같이 영악한 꼬맹이를 다시 보는 일 없도록.”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떠났고, 충격에 휩싸인 스텔라는 오래도록 응접실에 남아 있었다.
***
플로티나 공작저를 떠나 티보르 남작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다행히도 고아원 생활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남작이 잘 관리하는지 시설도 깨끗했고,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이들을 굶게 하진 않았고, 선생님들의 케어도 괜찮았다.
조금 서러운 게 있다면, 고아원 아이들이 나와 놀아 주지 않는다는 것과, 내 옆에서 자는 꼬마가 자꾸 내 자리를 침범한다는 것.
뭐, 잠자리를 침범하는 건 지금으로선 괜찮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잠자리에 적응하질 못해 잠을 설치는 중이니까.
아이들은 내가 예쁘게 생겼으니 제일 먼저 부모가 생길 거라며 나와 놀아 주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친해진 친구가 고아원을 떠나 버리면 부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말을 걸면 무시하는 건 좀 서럽다.
“아, 엘렌이랑 조안 보고 싶다…….”
고아원으로 가는 마차에 오르기 전, 엘렌과 조안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조안은 원체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여서 우는 모습을 많이 봐 왔지만 엘렌이 그렇게 펑펑 우는 건 처음 봤다.
고아원에 가겠다는 선택을 한 걸 조금 후회했던 게 그때였던 것 같다.
플로아는 내가 쓰러진 이후부터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싶었으나 나타나지 않아서 못했다.
티는 안 냈지만 실은 내가 싫었던 걸까? 하긴, 플로티나의 혈육이 아닐지도 모를 내가 가주가 될까 막으려고 했으니, 싫을 만도 하지.
싫어도 마지막 인사는 해 주지. 무정한 플로아.
내가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한구석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였다. 건물 밖에서 마차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마부가 워워 말을 진정시키며 멈춰 세우는 게 들려왔다. 이를 들은 아이들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누가 왔는지 구경했다.
나는 긴장했다. 아이를 사기 입양해 노예로 팔아먹을 사기꾼이 온 걸지도 모른다.
얼마 안 가, 고아원 안으로 누가 들어왔다. 나는 들어온 누군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주인공 아니랄까 봐 후광이 반짝반짝 비치는 백금발 소녀.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얼마 전 나를 엿 먹였던 스텔라!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 사이, 고아원 선생님은 스텔라와 대화를 나누다가 내게 안내했다.
곧 내 앞에 스텔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올려다본 스텔라는 전과 달리 인간미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답지 않게 날 걱정이라도 했다는 듯이 날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고 미간을 좁혔다.
“너 솔직히 말해. 어디 모자라지.”
갑작스러운 공격에 약간 당황해 유치한 방어가 툭 튀어나왔다.
“아닌데? 유디프 부인이 나보고 똑똑하다고 했었어.”
“그건 또 누구야…….”
스텔라는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질 듯 보다가 내 팔을 덥석 잡아 휙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레 일어나게 된 나는 깜짝 놀라 눈만 껌뻑거렸다.
얘, 힘이 왜 이렇게 세……?
“밖에서 나랑 얘기 좀 해.”
스텔라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가, 고아원 뒤편으로 데려갔다. 맞짱이라도 뜨러 온 건가 싶었다.
스텔라는 내 팔을 놓고선 버럭 화를 냈다.
“너, 미쳤어? 고아원엔 왜 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나는 덤덤하게 반문했다.
“여긴 왜 찾아왔어?”
“몰라! 내 맘이야!”
“…….”
씩씩거리는 스텔라는 팔짱을 끼고선 흥! 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스텔라는 조곤조곤 나를 쏘아붙였다.
“나갈 거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고아원엔 왜 가?”
“내가 말했을 텐데? 열 살짜리가 혼자 사는 건 위험하다고.”
“고아원은 안 위험해? 외려 너한텐 고아원보다 더 위험한 곳이 없지 않니? 아니면, 너 죽고 나더러 평생 죄책감 갖고 살라 이거야?”
스텔라의 입에서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조금 웃기긴 했다. 한편으론 스텔라가 그리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누가 죽는대? 나, 안 죽을 거거든?”
“그럼? 죽으려는 게 아니면 고아원엔 왜 간 건데?”
“내가 고아원에 가지 않으면 다른 희생자가 생기니까.”
“…….”
스텔라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지더니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희생자가 생기는 걸 놔둘 수 없어서 온 거야.”
이내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결치는 머리칼을 앞에서 뒤로 쓸어 넘겼다.
“너 영웅 놀이하니? 네가 그런다고 알아주는 사람 한 명도 없어. 너만 죽음에 가까워질 뿐이야.”
진짜로 바보인 게 틀림없다. 누군지도 모를 아이를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자기 목숨을 걸다니?
제 앞의 짧은 머리 소녀는 바보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내가 알아주잖아.”
“……뭐?”
“남들 다 몰라 줘도 내가 아니까 상관없어.”
페르시스가 날 고아원으로 보내겠다고 한 게 시작이긴 했지만 결국엔 내가 선택해서 이곳으로 온 거다. 다른 피해자가 나올 거란 걸 깨달을 순간, 그가 내쫓지 않았어도 언젠간 이곳으로 왔을 거다.
“죽더라도 내가 죽지 다른 아이를 죽게 할 순 없거든.”
영웅 놀이? 아니. 애초에 이건 정의감 따위가 아니야. 그저 내가, 누구 희생하는 꼴을 못 봐서 선택한 거니까.
“너…… 정말 상상 이상으로 바보구나? 역시 어디 모자라는 게 틀림없어.”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할 말은 다 했어?”
“뭐어?”
너무나 빠른 인정에 스텔라는 어이없어했다.
“할 말 없으면 갈게. 잘 지내, 스텔라.”
내가 그녀에게 인사를 남기고 고아원에 들어가려고 하니 스텔라가 놀란 듯 재빨리 나를 붙잡았다.
“야……! 나 아직 본론도 안 들어갔다고……!”
“결론까지 다 난 거 아니었어?”
난 또 할 말 다 한 줄 알았지.
내가 능청스레 물으니 스텔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자기 가슴을 팍팍 때렸다.
“이 바보야! 내가 여기에 왜 왔겠어. 널 여기서 꺼내 주려고 온 거잖아!”
“내가 말했을 텐데? 고아원에 온 건 내 선택이었다고. 다른 희생자 생기는 게 싫어서 내가 사기꾼에게 입양되려고 여기 온 거라고.”
그러자 스텔라가 참담해진 낯빛으로 내게 물었다.
“정말로…… 사기꾼에게 입양되겠다고……?”
나는 그런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여기 있으면 너한텐 더 좋은 거 아냐? 네가 바랐던 거잖아. 원작 내용 그대로 사는 거.”
“…….”
스텔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영웅 놀이는 네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가 나를 신경 쓸 이유는 하나도 없잖아. 아니면, 저번에 나한테 못되게 굴었던 게 갑자기 미안해지기라도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