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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6)화 (16/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6화

그날 이후, 나는 완벽한 아들이 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단련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코피가 날 정도로 공부했고, 비가 오는 날에 비를 맞으며 검술 훈련을 했다.

엘렌도, 조안도, 아틸라 유디프 부인도, 무리하는 나를 걱정했다. 이러다 쓰러지겠다며 그만 쉬라고 내 팔을 붙잡고 말리기까지 했지만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계속. 계속. 끊임없이 단련했다.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이 펜인지, 포크인지, 검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아들이 되기 위해.

미련하기 짝이 없게 단련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비가 오려는지 흐린 날이었던 것 같다.

부풀었던 물집이 터져 진물이 나오는 손으로 탁, 탁. 목검을 어딘가에 내리치며 검술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툭, 툭, 투두둑. 옷이 흠뻑 젖고 나서야 내가 비를 맞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도 같다.

탁. 탁.

둔탁한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오다가.

……탁.

점점 내 손짓이 느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은 느낌도 함께.

시야가 흐릿하다. 내리는 비 때문일까? 아니면, 정신이 몽롱해서일까?

탁.

마지막으로 내려친 후, 목검은 힘 풀린 손에서 빠져나가 땅에 떨어졌다.

이를 본 플로아가 내게 달려왔던 것 같다. 아니, 달려왔다.

내게 달려오는 그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져 더 이상 그의 얼굴이 아니었을 때,

그대로 암전이었으니까.

***

집무실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일을 보던 페르시스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냉정하게 자신의 이익을 따지는 모습.

언제까지고 그 모습엔 변함이 없을 예정이었지만 불현듯 찾아온 집사장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주인님.”

그가 집사장에게 눈길을 주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썩 달갑지 않은 일일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지?”

“메이 도련님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

집사장은 그가 대답을 주지 않는 1분간 불안에 떨었다.

집사장은 알고 있었다. 메이가 그의 마음이 들지 않는 순간이 오면 그녀를 쫓아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알리고 싶지 않았으나 주치의를 불렀으니 어차피 곧 그도 알 터였다. 그렇다면 먼저 제 선에서 보고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 쓰러졌군.”

페르시스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장이 힐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땐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메이에게 가겠다. 안내해.”

“네, 주인님.”

메이의 방으로 향하는 길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티 나지 않게 소란스러운 것이 있다면, 페르시스의 호위로 따라가는 요한의 머릿속이었다.

‘쓰러지셨다고? 최근 무리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는데 쓰러지실 정도면 얼마나 무리하신 거지.’

기사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훈련했던 자신도 쓰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괜찮으셔야 할 텐데……. 하는 걱정으로 얼굴이 자꾸 울상이 될 것 같았다.

페르시스가 집사장에게 물었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말리지 않았지?”

“플로아 님을 제외하곤 다들 말렸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 끝까지 멈추지 않으셔서…….”

그는 자신이 메이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잠깐 쉬어라.’

‘아픈 건 질색이야.’

‘틈틈이 휴식을 취하도록 해.’

그리 일러뒀건만, 어째서 따르지 않았을까. 그 꼬맹이는 무얼 얻기 위해 미련하게 굴었을까. 미련함으로 얻는 게 있긴 한가?

아니. 얻는 건 없다.

자신의 아버지는 미련한 사람이었다. 그 대단한 초대 가주, 파사베아가 어찌 저런 바보 같은 아들을 두었나 싶을 정도로.

정이 많은 아버지는 고작 가엾다는 이유로 죽은 동생의 아들, 파스칼을 거둬들였다. 그 후 가주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파스칼의 손에 죽었다.

가주가 된 파스칼이 자신에게 무어라 했던가. 병이 들어 오늘내일하길래 그냥 영원히 잠들게 해 줬다고 했던가?

그 병 또한 온갖 패악을 부리던 파스칼로 인해 신경이 쇠약해져 생겨난 것이었다.

그런 바보 천치 같은 아버지가 싫다. 그의 모든 것이 싫다. 취할 수 있는 이익 없이 누군가를 거둬들이는 것도, 하다못해 아픈 것도 싫다. 질색이다.

‘그런데.’

페르시스가 메이의 방에 당도하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시야에 열이 펄펄 끓는 꼬맹이가 들어왔다. 진물 나고,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여 엉망진창이 된 작은 손도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 꼬맹이만 보면, 자신이 아버지와 다를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빙의 이후 익숙해진 메이의 침실 천장이었다.

몸이 꽤나 아팠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리 아프지 않다. 잠들어 있는 사이 많이 나았나 보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지?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이는 그때, 페르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를 간호했던 걸까……?

그의 안면은 평소보다 더욱 냉랭했다. 나를 향하는 적안은 이제 더는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약간 혼몽한 상태로 그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내쫓겠다 했었지.”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너를 키울 생각이 사라졌다.”

꿈이 아니라는 듯 얼음장같이 차가운 음성이 내게 데일 듯 들붙었다.

사라졌다니? 나를 키울 생각이 사라졌다니? 그럼 난…… 고아원에 가야 되는 거야……?

나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페르시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겁에 질린 나를 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고아원으로 떠나도록 해.”

고아원이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옴과 동시에 내 심장은 크게 멎는 듯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럴 수 없다. 고아원이라니. 고아원에 가야 한다니.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겨우 이 말을 남기려고 내가 일어나기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내게서 멀어질수록 몸의 떨림이 거세졌다.

안 돼……. 절대 안 돼…….

나는 서둘러 이불을 내치고선 그에게로 달렸다.

“아얏!”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철푸덕 넘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기어가 그의 발목을 감싸 안았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안 돼요…… 고아원은 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렁그렁 두 눈에 맺힌 눈물이 내가 맞은 비처럼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페르시스는 자신의 다리를 붙잡은 소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놔.”

“정말 죄송해요……. 앞으론 쓰러지지 않을게요……. 더 잘할게요. 완벽한 아들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울며불며. 혹여 그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안간힘을 다해 꽉 붙잡았다.

“그러니까 제발…… 고아원엔 보내지 마세요. 제발…….”

“네가 놓지 않으면 억지로 떼어내는 수밖에 없어. 팔 풀어.”

그는 바들바들 떨며 오열하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내 절박함은 느껴지지 않는지 무심한 목소리만 늘어놓았다.

“다, 다신 안 그럴게요……. 정말 다신 안 그럴게요…….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세요…….”

죽기 싫어. 평생 아들로 살아가는 한이 있어도 죽기 싫어.

부탁이야. 제발 나를 키워 줘. 이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 줘. 날 죽음에 몰아넣지 마.

내가 놓지 않으니 그는 마력을 사용했다. 그의 육신에서 새어 나온 붉은 기운이 나를 간단히도 그에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의 다리를 놓친 나는 질겁하며 다시 기어가 그를 붙잡았다.

“아, 안 돼요……. 떼, 떼어 내지 말아요……. 하라는 대로 다, 다, 다 할 테니까 이, 이 집에서 사, 살게 해 주세요…….”

“…….”

그는 이번에는 나를 내치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은 재고의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서 나를 고아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길 바라며 빌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 사기꾼은 고아원에 있던 메이를 입양해 노예로 팔아 버린다.

그렇다면. 메이가 고아원에 가지 않는다면.

‘나 대신 사기꾼에게 입양되는 건 누구지?’

그런 생각이 들고서야 눈물이 뚝 그쳤다. 떨리는 몸도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껏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죽음을 피할 계획만 세웠었지, 나로 인해 피해를 볼 이는 고려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고아원에 가지 않는다면 사기꾼은 다른 아이를 입양할 것이다.

그 아이는 원작 메이가 그랬던 것처럼 노예로 팔리겠지. 어쩌면 수차례 팔려 다니겠지.

또 어쩌면 쓰레기만도 못한 주인을 만나 맞아 죽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 아이는 무슨 죄일까.

운이 없었던 죄?

고아원에 있었던 죄?

살아 숨 쉬고 있었던 죄?

전부 아니다. 그 아이에겐 죄가 없다.

그리 생각하니 내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사기꾼에게 입양되지 않으면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는 걸 이만큼이나 늦게 깨달아서.

원작 내용을 아는 만큼 내가 아닌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면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기꾼에게 입양되어야 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는 것이다.

페르시스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팔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는 내게서 풀려난 다리로 주저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이를 듣고 있던 엘렌과 조안이 감히 주인의 앞길을 막으며 절하듯 주저앉아 머리를 조아리는 게 보였다.

“메이 님을 고아원에 보내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제발 고아원에 보내지 말아 주세요!”

“아가씨는 주인님의 하나뿐인 따님이십니다……!”

그러나 페르시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갔다. 엘렌이 일어나서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요한이 막는 바람에 붙잡을 수 없었다.

“주인님 제발……!”

“마음은 알겠으나 이 이상은 안 됩니다.”

요한 또한 엘렌처럼 충격을 받았는지 낯빛이 창백했다.

“이 이상은…… 안 됩니다.”

절망스러운 표정의 엘렌은 멀어져 가는 페르시스를 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조안은 흐느껴 울었고, 그 주위에 있던 다른 고용인들은 숙연하게 이를 지켜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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