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5화
“다른 사람들은 딱 원작 그대로 살아가는데 너만 다르더라고. 공작 각하께 딸도 아니고 아들이라니. 원작 내용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스텔라가 팔짱을 끼고선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스텔라. 그녀가 나는 여자이고, 심지어 빙의자임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설마 설마 하다가 오늘 여자애의 모습으로 아들 행세를 하고 있는 너를 보고 깨달았지.”
아, 얘도 빙의했구나.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를 썼구나.
“숙부 빼고는 아무도 네가 남자애가 아님을 의심하지 않던데? 뭐, 그건 플로아의 정신계 마법 덕분일 게 뻔하고.”
내 목소리가 저 깊은 심해에서 발버둥 치는 것처럼 틀어막혀 나오지 않는 사이, 스텔라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 갔다.
“남자애로 살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어. 사실 나도 마음이 불편하던 참이었지. 어린애가 맞아 죽는다는데 어떻게 슬프지 않겠어?”
“…….”
“근데 말이야.”
스텔라의 눈살이 구겨졌다.
“꼭 그렇게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어야 했니? 내가 입양된 후에 쫓겨날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은 거야?”
했다. 안 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아들로 살아가는 이 미련한 수단이라도 쓰지 않았으면 난 바로 고아원에 보내졌을 거다.
고아원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나는 내 의사대로 행동할 수 없다. 누군가 날 입양하겠다고 하면, 순순히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 싫다고 해도 고아원에서 억지로 내보내려 하겠지.
그게 설령 날 노예로 팔아먹을 사기꾼일지라도.
스텔라의 눈살이 풀어지더니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거만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원작 읽었으면 너도 알지? 각하는 날 예뻐해서 후계자고 뭐고 날 키우는 데에만 집중해. 그렇게 되면 넌 어떻게 될까?”
“…….”
“찬밥 신세다 못해 쫓겨날 수도 있어. 딸바보가 된 그에게 아들은 필요 없으니까.”
내 목소리는 그제야 겨우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건 그때 되면 내가 알아서 할게.”
이건 내 일이지, 스텔라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관여한다는 건, 내게 원하는 거라도 있다는 걸까?
“그때까지 아들 행세하며 고생할 필요 없어.”
“그러면?”
“내가 돈을 줄 테니까 나가 살아.”
“……뭐?”
나가 살라니. 나는 황당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모아 둔 돈이 꽤 있거든.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의식주를 지원해 줄 정도는 돼.”
스텔라의 뻔뻔함에 내 미간이 구겨졌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나 아직 열 살이야. 열 살짜리가 어떻게 혼자 살아?”
“왜 못 살아? 내가 돈 준다니까?”
대화가 오갈수록 언성은 커졌다.
“너, 이곳 치안이 어떤지는 알긴 해? 여긴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아니야. 허구한 날 밥 먹듯이 납치 매매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바보야? 내가 주는 돈으로 널 지켜 줄 노예라도 사면 되잖아.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살 돈은 준다니까?”
“그 노예가 믿을 만한지는 어떻게 확신하고?”
“내가 그거까지 신경 써야 해? 고아원에 가라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돈을 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쏜살같이 빠르게 오가던 말들이 내 말을 끝으로 멈췄다.
나도 스텔라도 서로를 노려보며 밀린 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건 나였다.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이렇게 바꿀 수 있는데. 더 안전하게 살아갈 방법이 있는데.
내가 왜.
스텔라의 답은 간단했다.
“원작 내용 그대로 살고 싶어서.”
페르시스의 하나뿐인 입양딸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괜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네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 것들을 빼앗기는 기분이니까.
“그러니까 나가 살아.”
나와 엮이지 말고.
지독한 명령에 주먹 쥔 내 손이 덜덜 떨렸다.
“……너 정말 못됐구나.”
그때였다. 스텔라는 내 뒤편을 흘끔 쳐다보더니 급작스럽게 울먹거리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곧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죄송해요, 공자님…… 흐윽.”
스텔라의 돌발 행동을 직관한 나는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야? 얘 갑자기 왜 울어?
울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가? 왜 네가 우는데?
내가 스텔라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볼 무렵, 내 뒤편에서 하인드가 달려왔다.
“스텔라, 무슨 일이야!”
하인드는 엉엉 우는 스텔라를 붙잡고선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곧 페르시스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스텔라는 손등으로,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 가며 훌쩍훌쩍 대답했다.
“흐윽, 흑, 공자님께 예, 예쁘다고 했더니…… 화를 내셔서…… 흐윽, 흐윽. 죄송해요…….”
“뭐어?”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입술만 벙긋거렸다.
이를 들은 페르시스는 싸늘한 안면으로 내게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메이, 그게 사실이야?”
절대 아니라고, 그런 적 없다고 해명하기도 전에 내 입술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해명해 봤자 스텔라가 우기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
“…….”
내가 시선을 내리깐 채로 대답이 없으니 그가 질책했다.
“하인드는 내 오랜 친우다. 저 아인 그의 조카고. 사이좋게 지내는 게 그리 어렵나?”
순간 울컥해서 눈물 핑 돌고 코가 매워졌다.
서러웠다. 난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스텔라에게서 집을 나가라는 어이없는 말까지 들었는데.
하지만 페르시스에게 지금 나는 애 울리는 심성 나쁜 꼬맹이겠지.
더 슬픈 건, 이 와중에도 그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죄인이 된 마냥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사과해.”
울지 않으려 꾹 다문 입술이 바들바들 떨린다.
당한 쪽은 난데,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구나.
사과하고 싶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지만 더는 페르시스의 기분을 망치게 해선 안 되기에 눈물을 꾹 참고선 스텔라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영애.”
“흐윽, 흐윽.”
스텔라는 내가 사과를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페르시스의 잔혹한 지시가 떨어졌다.
“사과 받아 줄 때까지 다시.”
나는 억울함에 양손 주먹을 꽉 쥐었다.
“죄송합니다, 영애.”
“흐윽, 흐어엉-”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 스텔라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어도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영애.”
기어코 눈가에 맺힌 눈물이 차디찬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톡톡. 바닥에 내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이어서 세 방울. 떨어져도.
“용서해 주세요.”
“흐어엉-”
그 뒤로도 스텔라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나는 몇 번을 더 사과했는지 모른다.
***
공작저에 돌아온 나를 반기는 건 밝은 얼굴의 조안이었다.
“도련님, 잘 다녀오셨어요?”
내가 제대로 외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내게서 나제트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평소 같으면 나도 밝게 이야기를 해 줬을 텐데. 기운이 너무 빠진 터라 해 줄 수가 없었다.
“미안, 조안. 나중에 얘기해도 될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조안은 힘없는 나를 보며 의아해하다가 눈치 빠른 엘렌에 의해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 침대 위에 풀썩 엎드려 누웠다.
얼마 안 가, 베개에 파묻은 얼굴이. 아니, 몸 전체가 자그맣게 떨렸다.
“흑, 흐윽…….”
베갯잇이 무언가에 의해 조금씩 젖어 갔다.
그것은 나제트가 저택에서, 그리고 마차 안에서 꾹 참다가 이제야 터져 나온 눈물이었다.
“너무해……. 어떻게 계속 사과를 시킬 수가 있어? 스텔라는 도대체 왜 운 거야. 왜 내가 사과해도 울음을 멈추지 않은 거야…….”
어차피 넌 페르시스에게 입양될 거잖아. 쭉 행복해질 거잖아. 굳이 나 같은 거 괴롭히지 않아도 다 가질 주인공이잖아.
“왜…… 도대체 왜…… 흐윽.”
나는 너무 억울해서 콧물까지 흘리며 엉엉 울었다.
스텔라가 마음만 먹으면 이런 일은 계속될 거다. 그녀에게 점점 빠지는 페르시스는 스텔라의 편을 들어 줄 거고, 나는 또 굴복하겠지.
공작저에서 같이 살게 되어도 이런다면 나는…… 그 서러움을 견딜 수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큰 문제인데 더 심각한 문제는 페르시스가 날 내쫓을 수도 있다는 거다.
스텔라의 말대로 원작에서 페르시스는 입양 후, 딸바보로 전락하여 완결 날 때까지 후계자의 ‘후’ 자도 언급하지 않는다.
스텔라를 입양한 후엔 그에게 아들이 필요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필요 없어지면 나는 고아원에 보내지겠지.
……그래선 안 돼.
나는 울음을 그치고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베개엔 눈 모양, 콧구멍 모양, 입 모양대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두 팔로 눈물을 훔친 뒤 결심하듯 주먹을 쥐었다.
쫓겨나지 않으려면 완벽한 아들이 돼야 한다. 페르시스가 스텔라에게 빠져도 내쫓기엔 아까운 인재가 되어야 한다.
살려면,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