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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3)화 (13/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3화

“검술을 입으로 배웠나? 몸뚱어리보다 검술 실력이 더 하찮군.”

쯧쯧, 혀를 차는 게 제 딸의 검술 실력에 10점 만점에 1점 주기도 아까운 듯했다.

이번엔 플로아가 입을 뗐다.

“검술을 배운 지 고작 열흘 차입니다, 페르시스 님.”

“주인님은 아가씨께 바라는 게 너무 많으세요. 아가씨는 아직 열 살이라고요.”

플로아는 요한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는 게 많을 수밖에. 플로티나의 후계자인데.”

플로티나의 후계자라.

플로아는 페르시스의 혈육이 아닐지 모를 메이가 가주가 되길 원치 않으면서도 어쩐지 그녀를 추켜세워 주고 싶었다.

“……열흘 차에 저 정도면 대단하신 겁니다. 목검이 가볍지 않아서 10분만 들어도 힘들거든요. 지금 메이 님께선 1시간째 쉬지 않고 연습 중이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후회하긴 했다. 메이를 페르시스에게 잘 보이게 해서 자신에게 좋을 거 없다는 걸 알아서.

페르시스의 눈썹이 움직였다. 정확히, ‘쉬지 않고’에서였다.

“……메이를 불러 와.”

“네, 주인님.”

그의 명에 요한이 메이를 데리러 갔을 땐, 그녀는 여전히 힘차게 기합을 넣는 중이었다.

“핫! 핫! 얍!”

요한은 또다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심호흡을 해서 애써 참고는 말을 걸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

나는 요한의 말에 목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었다.

페르시스가 나를 부르다니. 내가 뭐 잘못했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를 이유가 없을 테니까.

무얼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반성모드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요한과 함께 걸었다. 머릿속엔 고아원으로 쫓겨날 오만가지 경우의 수들이 그려졌다.

하다못해 기합 소리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 채, 페르시스에게 다가갔다.

역시 으랏차!로 할 걸 잘못했나?

아니면 허이얏!으로 할 걸 그랬나?

곧 내 시야에 반짝거릴 정도로 깨끗한 남성용 구두가 들어왔다. 페르시스의 것이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그의 낯을 올려다보았다.

“부르셨나요, 아버지.”

내가 뭐 잘못했니? 설마 고아원에 보낼 건 아니지?

나는 그의 생각을 읽으려 붉은 눈동자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불쾌해 보이는 눈이었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엔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조금은 평온해 보였다.

내가 뭘 잘못해서 부른 게 아닌 건가 싶을 그때, 그의 나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잠깐 쉬어라.”

도저히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 나왔다.

“네……?”

쉬라고? 나더러 쉬라고? 왜지?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반사적으로 경계했다.

“어, 어째서죠……?”

“어째서긴. 아픈 건 질색이야.”

아픈 게 질색이라니. 그럼 내가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일까?

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의 큼직한 두 손이 내 옆구리를 잡았다.

“?”

그는 그대로 들어 올렸고, 나는 그의 손에 의해 붕 떠올랐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내 얼굴이 그의 뻔뻔한 안면과 같은 눈높이에 도달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했다.

“생각보다 가볍군.”

……그럼 내가 얼마나 무거운 줄 알았던 건데.

페르시스는 나를 그의 옆에 앉혀 주었다.

왼편엔 플로아가, 오른편엔 페르시스, 뒤편엔 요한이 있다.

부담스럽게도 그들은 내게 꽂은 시선을 떼어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말이지, 부담스러워서 쉬는 게 쉬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나는 내 처지를 잘 알기에 말로 꺼내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까닥까닥 목을 앞뒤로 흔들며 걸어가는 새를 구경하는 척해야만 했다.

곧 바람이 스치자 관자놀이에 맺혀 있던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 땀은 훈련을 열심히 한 증거였다.

이를 본 페르시스가 가슴 포켓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넸다.

“닦아.”

응? 진짜로? 이 인간이 나를 왜 챙겨 주나 싶었지만 사양하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흘러내리는 땀만 살짝 닦고선 그에게 내밀었다.

“잘 썼어요.”

그는 손수건에 눈길 한 번 던져 주곤 제 호위를 불렀다.

“요한.”

“네, 주인님.”

그가 눈짓으로 손수건을 가리켰다.

“버려.”

“……?”

겨우 땀 한 번 닦았다고 버린다니. 그의 낭비벽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면, 내 땀이 더럽니?

나는 요한이 내게서 손수건을 가져가기 전, 손수건을 두 손에 움켜쥐곤 끌어안았다.

“어차피 또 땀 흘릴 것 같은데 제가 가지면 안 돼요?”

“…….”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내 내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요한을 제자리로 물렸다.

나는 손수건을 주섬주섬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히히, 손수건 득템. 훈련할 때마다 써야지.

페르시스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틈틈이 휴식을 취하도록 해.”

“……신경 써 주시는 거예요?”

“…….”

그는 대답이 없었다. 신경 써 주는 게 맞지만 본인이 인정하긴 싫은 듯했다.

이 냉혈한이 날 신경 써 줄 줄도 아네?

신경 써 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그저, 적어도 고아원엔 보내지 않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히히.”

“기분 나쁘게 웃는군.”

그래?

“히히히.”

“…….”

“히히히히.”

“그만 웃어.”

아쉽네.

기분 나빠하길래 더욱 웃어 줬건만 그만 웃으라니 멈춰야만 했다.

“그런데 연무장엔 어쩐 일이세요?”

그는 절대로 용건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연무장에 온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인드 나제트가 내일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

“후작님이요?”

“그래. 너도 데려오라더군.”

나도……? 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되물었다.

“저도요?”

“왜, 가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가면 스텔라를 만날 터. 페르시스와 스텔라의 첫 만남일 텐데 내가 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한낱 조연. 조연은 원래 주연들의 병풍이지 않은가. 겨우 병풍 하나가 어디에 있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가서 친해질 수 있으면 친해져야지. 어차피 가족이 될 텐데 점수 따 놔서 나쁠 거 없잖아?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갈래요!”

***

다음 날, 원작 주인공을 만날 생각에 잠을 설친 나는 기대를 한 아름 품고 마차에 올랐다. 페르시스와 단둘이 탄 마차는 무척 조용했다.

나제트가에 가는 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스텔라를 그려 보았다.

파도치듯 물결 진 백금발에 눈부신 자안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

또래 아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미모를 가졌을 것이다.

나는 앞에 앉은 페르시스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로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잠깐 눈을 붙인 상태였다.

페르시스는 스텔라를 보자마자 딸로 삼고 싶어지려나.

원작에서 페르시스는 하인드를 만나러 나제트가에 갔다가 우연히 스텔라를 만나게 된다.

사랑스러운 스텔라는 겁도 없이 페르시스에게 말을 걸고, 그는 스텔라의 해맑은 얼굴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그 후 페르시스는 스텔라를 자신이 입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이듬해 봄에 스텔라를 양녀로 맞이한다.

그런데, 첫 만남이 원래 오늘이었던가?

원작에선 페르시스뿐만 아니라 공작저 고용인들까지도 메이를 잊어 갈 때쯤 첫 만남이 이뤄졌던 거로 안다.

그렇다면 원래는 첫 만남이 오늘이 아니라는 것. 아마 나 때문에 바뀐 걸지도 모른다.

내가 아리송해하는 사이, 페르시스가 눈을 떴다. 내 시선이 자신에게 닿고 있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챈 듯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나는 아뇨, 없는데요, 라고 하려다가 문득 어제 유디프 부인에게 여성식 예법 수업을 받은 게 떠올랐다.

“아, 있어요. 제가 여성식 예법 수업 받는 거 허락해 주셨다면서요?”

의외였다. 그에게 난 지금도, 앞으로도 쭉 아들이지 않은가. 당연히 남성식 예법만 배울 줄 알았더니 여성식 예법도 배울 수 있게 해 줘서 놀랐다.

“혹 나중에 쓰일 데가 있을 수 있으니 배우게 한 것뿐이다. 네가 내 딸로 살게 될 일은 없을 테니 헛된 꿈은 꾸지 마.”

흥, 나도 알거든?

나는 얄밉게 말하는 페르시스를 쏘아보다가 관두었다. 눈을 내리뜨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진심을 전했다.

“그래도 감사해요. 배우고 싶었거든요.”

나중에 공작저에서 나가 여자로 살게 되면 미리 배워 둔 여성식 예법이 큰 도움 될 테니까.

“…….”

페르시스는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의 무반응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그에게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 참, 제가 여자라는 건 후작님 외엔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렇지. 마법도 걸려 있으니 하인드 외엔 네가 여자라 생각하지 못할 거다.”

그렇다는 건 스텔라도 내가 여자라는 걸 모른다는 거네?

친해지면 몰래 귀띔해 줘야겠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을빛에 젖은 구름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하늘 아래. 마차는 나제트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

나제트가에 도착했을 땐 날이 서서히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우리가 나제트가 저택 안뜰에 들어서자 하인드가 반갑게 맞이했다.

“오느라 고생했어. 메이,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

하인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자 나도 방긋 미소 지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후작님.”

나는 하인드에게 인사를 마친 후 그의 옆에 있는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입이 떡 벌어지며 감탄이 나올 정도로 눈이 부시고 사랑스러운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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