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2화
나제트가로 돌아온 하인드는 스텔라와 식사를 나눴다.
평소 말이 없던 스텔라는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플로티나 공작저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스텔라의 입적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하인드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반응했다.
“친우를 보러 간 거지, 뭐. 하하…….”
곧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며칠 전에도 갔다 오셨던 것 같은데, 친우분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나요?”
“무슨 일?”
하인드는 스텔라의 관심이 의아했으나 따로 묻진 않았다.
“아아, 페르시스에게 자식이 있더라고. 자기도 모르게 키워진 딸…….”
그러다가 메이가 아들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게 떠올라 바로 정정했다.
“딸이 아니라 아들이.”
하인드는 스테이크를 썰어 자신의 입속에 넣었다.
삼키고 나서야 스텔라를 보니 그녀는 자못 놀란 얼굴로 굳어져 있었다.
“왜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키워졌다는 부분에서 놀란 건가? 하인드는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랄 만하지. 나도 처음 들었을 땐 깜짝 놀랐었으니까.’
얼어붙어 있던 스텔라의 입술이 드디어 움직였다.
“아들이요……?”
“응. 아들. 나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세상에 별일이 참 많아.”
그는 다시 스테이크를 써는 데에 집중했다.
덕분에 알지 못했다. 스텔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페르시스 플로티나에게 아들이 있다고?’
스텔라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스텔라도 나이프와 포크를 잡아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었다.
“……플로티나 공작님께 아들이 있었군요.”
입가엔 알 수 없는 미소가 맺혔다.
“저, 친해지고 싶어요. 그 아드님과.”
***
곧 여름이 올는지 햇볕이 쨍쨍한 봄날의 낮.
플로아를 만난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검술 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훈련을 위해 공작저 연무장에 가면 기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서 쑥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얼마 안 가 익숙해졌다.
“먼저 준비 운동부터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서 몸을 풀어 주십시오.”
“네!”
준비 운동은 별거 없었다. 손과 발을 돌리고, 목을 돌리고, 허리를 돌리고……. 내가 열정적으로 허리를 돌리니 플로아가 옅게 웃는 것 같기도 했다.
“플로아 님, 지금 저 보고 웃으시는 건가요?”
그러자 플로아는 바로 정색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만.”
아닌데? 웃는 거 봤는데?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지금은 표정이 밝으신걸요?”
“착각이십니다. 몸을 다 풀었으면 연무장 다섯 바퀴를 돌도록 합니다.”
이를 들은 나는 놀라서 눈이 커다래졌다.
“네? 다섯 바퀴요?”
어제까지만 해도 두 바퀴만 돌았기 때문이었다.
“점점 횟수를 늘릴 겁니다. 그래야 검을 제대로 들 만한 힘이 생기지요.”
나는 넓은 연무장을 다섯 바퀴나 돌 생각을 하니 착잡했지만 그의 말이 옳기에 토 달지 않았다.
“네…….”
연무장을 달리니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플로아는 순간이동 하여 내 옆으로 와 더 빨리 달리라며 재촉했다.
“걷는 건지, 기는 건지 분간이 안 됩니다. 더 빨리 달리세요.”
“다, 달리고 있어요……!”
그가 얄밉게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당장은 빨리 돌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아- 하아- 다, 다섯 바퀴, 끝!”
겨우 다섯 바퀴를 다 돈 나는 터질 듯한 폐를 애써 달래 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십 번을 가만히 들이쉬고 내쉬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앞으론 매 훈련 때마다 이렇게 달리셔야 합니다. 최종 목표는 10바퀴입니다.”
“10바퀴요?!”
눈앞이 캄캄해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로아는 나긋하게 미소했다.
“일단은 힘들어 보이시니 10분간 쉬도록 하죠.”
플로아가 연무장 끄트머리에 있는 벤치에 가서 앉자, 나는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서서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플로아는 왜 옆에 앉냐는 듯 나를 슬쩍 쳐다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후회하실 듯합니다.”
나는 그가 무얼 말하는 건지 몰라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를요?”
“페르시스 님의 아들로 살겠다고 한 거요.”
“아…….”
두 바퀴만 뛰던 사람이 한 번에 다섯 바퀴를 뛰게 되었으니 몸살 날 게 걱정될 정도로 힘든 것은 맞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이것만이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살길이니까.
“후회 안 해요.”
내가 너무 미련 없다는 듯이 말했는지 플로아는 바로 믿지 않았다.
“진심이십니까? 힘드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후회를 안 할 수가 있죠?”
“제 목표를 위해서라면 꼭 해야 하는 거라서요.”
플로아는 목표에 관해 어떠한 기억이 있는 것처럼 흠칫했다.
“어떤 목표 말입니까?”
“성인 될 때까지 이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는 목표요. 그러려면 연무장 도는 것도 제대로 못 해서는 안 되잖아요.”
“…….”
플로아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짙은 회색 눈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는 것처럼, 온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플로아는 목표 있어요?”
“……저는 그런 걸 만들지 않습니다.”
“이참에 만드는 게 어때요? 제게 좋은 스승이 되는 목표요, 히히.”
이것은 천천히 바퀴 수를 늘리자는 내 자그마한 애교였다.
“뻔뻔한 면이 있으시군요.”
“저도 좋은 제자가 될 건데요, 뭐.”
내가 시시덕거리니 플로아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서렸다. 나는 이를 바로 보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봐요. 표정이 밝아졌다니까요? 솔직히 말해 봐요. 요즘 저랑 검술 훈련하니까 안 심심하죠?”
플로아는 자신이 웃었다는 게 놀라운지 눈이 커다래지다가도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심심하지는 않군요.”
“그러면 제 덕을 본 거니까 앞으로는 세 바퀴만 돌기로…….”
“그건 안 됩니다.”
쳇. 은근슬쩍 깎아 보려고 했으나 아쉽게도 플로아는 그런 얕은 기술이 먹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멀쩡해지신 걸 보니 훈련해야겠군요.”
“아직 3분 정도 남았는데…….”
“3분 일찍 끝내 드릴게요. 갑시다.”
플로아가 일어나자 나는 다시금 쳇, 하며 그를 따라갔다.
***
메이가 목검으로 수련용 볏짚 인형을 내려치는 훈련을 할 동안, 플로아는 나무 아래 긴 벤치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가 볏짚 인형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소녀에게 집중해 있는 사이, 페르시스가 그의 호위와 함께 연무장에 당도했다.
그는 제 딸에게 스치듯 눈길을 주곤 플로아가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가 말문을 열었을 땐, 벤치 벽에 등을 기대 다리를 꼬고 있었다.
“메이가 훈련을 게을리하면 언제든 보고해. 내쫓는 건 쉬우니까.”
그러나 말뿐인 말. 이제 와서 그가 과연 저 아이를 내쫓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플로아의 잠잠한 눈동자는 여전히 메이를 향했다.
“훈련을 게을리할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해서 걱정이 될 정도다.
“……가주님께 거래를 내걸 정도면 어느 정도 당돌할 거라 예상은 했었습니다만…….”
“메이에게 한 방 먹었나 보군.”
페르시스의 입꼬리가 재밌다는 듯이 비스듬히 올라가다가 다시 제 위치를 찾았다.
“……네.”
죽이겠다고 하면 무서워서 울거나, 페르시스에게 달려가 딸로 살아가게 해 달라고 빌거나, 더 나아가 자진해서 고아원에 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
어린아이가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앞으로 잘 부탁한다니?
심지어 그보다 더 해맑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제대로 먹이시더군요.”
분명 자신이 저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꿰뚫은 거겠지.
바람이 불어와 꼬맹이의 광대를 스쳐 유리알 같은 땀방울을 닦아 주는 걸 보았다.
특이한 아이.
어찌 보면 미련한.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불쾌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눈이 갔다.
그리고 그건 페르시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페르시스의 시선도 메이에게 닿았다. 그는 평소처럼 지극히, 자신의 딸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열 살은 저리 작은가?”
“앞으로 클 날이 많으니까요.”
“이상하군. 내가 열 살 땐 저 정도로 작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여자도 키가 큰 편이었고.”
잊으려고 애썼던 비체를 자신의 입으로 꺼냈다. 하나, 이전과 달리 그녀에 대한 감정은 얕아진 상태였다.
그러다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아, 친아비가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걸 깜빡했군. 비체는 뭐 땅딸막한 남자를 만났나 보지?”
비딱한 어조. 그답지 않은 심술이었다.
곁에 서 있던 요한이 듣다 못해 알려 주었다.
“원래 열 살 여자아이는 저만합니다, 주인님.”
그제야 그의 미간도, 어조도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쉬운 남자였다.
그 쉬운 남자는 메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정말이지 저 아이는.
“작고.”
키가 비체만큼은 클 순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작고. 또.
“하찮군.”
“……귀엽다는 표현을 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끄럽다.”
요한이 친절하게 권유했지만, 페르시스가 그런 말을 입에 담을 리 없었다.
그때, 메이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핫! 핫! 얍! 얍! 합!”
목검으로 내려칠 때마다 핫핫! 거리는 게 귀여워서 요한은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꾸욱 참았다. 플로아도 입술 끝이 살짝 가늘어졌다.
딱 한 명. 페르시스만 진지하게 감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