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화
하인드와 마주쳐 그에게 아들로 살아가게 된 내 가여운 사정을 들려준 후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플로아 님은 대체 언제 오시는 거야?”
오늘도 플로아를 못 만날 듯해서 시무룩해졌다.
“이른 시일 내에 온다고 해 놓고는 벌써 며칠째야…….”
하염없이 기다리기는 지치지만 페르시스에게 플로아가 정확히 언제 오는지 물을 용기가 안 나서 무작정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언제 오냐고 재촉했다가 괜히 심기를 건들면 안 되니까.
나는 내 침실 앞에 도착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오늘도 포기하려는 그때.
“뭐, 언젠간 오겠…….”
고고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지? 설마…….
“플로아 님?”
안 올 것만 같던 플로아가 놀랍게도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옮겨 내게 시선을 주었다.
“화원 산책은 재밌게 하셨습니까?”
아니, 왜 소리 소문도 없이 내 방에 와 있어?
나는 떨떠름해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곧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플로아 님이에요?”
“네, 제가 플로아입니다.”
플로아는 여유롭고도 나른하게 미소를 흘렸다.
‘이 사람이 플로아……!’
외관상 20대 초반밖에 안 되어 보이는 백발의 미남.
가문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자가 내 앞에 있다.
나는 그의 존재가 너무 신기한 나머지 들뜨고 말았다.
“그럼 마법 쓸 수 있어요? 이~만한 푸딩이 생기게 한다든가요!”
내가 양팔을 활짝 벌려 허공을 크게 그리니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튕겨 내 몸집만 한 커스터드푸딩을 만들어 냈다.
탱글탱글. 푸딩이 양옆으로 몸을 흔들다가 서서히 멈췄다.
“우와!”
내가 감탄하며 푸딩을 콕 찔러 만지니 뿅! 하고 사라졌다.
“신기해요!”
“이 정돈 기본이죠.”
그는 미소를 보이다가 이내 표정을 지우곤 분위기를 잡았다.
“……제게 궁금한 게 있지 않으십니까?”
궁금한 거? 어떤 거?
“이를테면, 비체 님과 약조한 마법을 왜 풀었는가에 대해서라든가요.”
“아, 맞아요. 궁금했어요. 왜 이렇게 마법을 빨리 푸신 거예요?”
마법이 계속 유지됐으면 아들 행세 안 해도 되는데.
나는 그에게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저, 하마터면 고아원에 갈 뻔했어요. 아빠가 절 키우리라 판단이 설 때 풀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보아하니 원작에서도 플로아가 이맘때쯤에 정신계 마법을 풀었던 것 같다. 소설 본문엔 단순히 메이와 페르시스가 우연히 공작저 앞마당 화원에서 마주쳤다고 쓰여 있지만 속사정은 이러했을 터.
원작에서도 메이가 열 살 봄에 페르시스와 처음 마주치고, 메이에게 빙의한 나도 열 살 봄에 페르시스와 처음 마주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원작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리고 내 상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결코 페르시스가 날 키우리라 판단이 설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면 플로아는 왜 정신계 마법을 풀었는가.
“꼭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순간, 분위기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창밖에서 들던 햇빛도 사라져 방 안이 어두워졌다.
플로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판단을 잘못 내려 마법을 푼 것 따위가 아니라.”
점점, 그는 나에게 가까워졌다.
그가 너무 바짝 다가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했다.
내 등이 방문에 부딪쳐 더는 뒷걸음질 할 수 없을 때까지 그는 계속 다가왔고, 코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꺾듯 들어 올려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알아 버렸다.
그의 짙은 회색 눈이 적의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절대로 아이를 귀엽게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귀찮아져서 풀었다는 것을요.”
지금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자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귀찮아서? 겨우 귀찮아서 풀었다고? 내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었는데?
“처음 비체 님이 제게 간청하셨을 땐 마법을 5년 정도만 유지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지금껏 플로티나의 혈육은 다섯 살 내외로 가문의 힘이 발현됐고, 페르시스 님이 제아무리 비체 님을 싫어한다 한들 가문의 힘이 발현된 아이를 내쫓진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10년이 지나도록 가문의 힘은 발현되지 않았죠. 물론 성인이 되기까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습니다만…….”
그가 건조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일소했다.
“플로티나의 혈육일지 아닐지 모를 아이를, 더군다나 가문을 물려받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제가 굳이 마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한 마디, 한 마디. 우박처럼 쏟아진 말들이 내 머리를 강타해 나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거냐.
화를 내며 따져도 모자랄 상황에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턱 막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정말로, 그저 귀찮아서 풀었습니다.”
그는 제 앞의 소녀를 억하심정 따위로 몰아가는 게 아니었다.
“당신이 고아원에 가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으니까요.”
여린 꼬마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는 데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플로티나만을 위한 존재.”
그의 안광이 섬뜩하게 일렁였다.
“플로티나의 혈육이 아닐지도 모르는 자가 가주가 되게끔 놔둘 수 없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내가 고아원에 가든, 공작저에서 길러지든 그 어떠한 관심도, 상관도 없을 것이다.
나는 어차피 딸이니까.
플로티나의 명맥을 이어 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딸이니까.
그런데 그의 입장에서, 플로티나의 핏줄일지 아닐지 모를 메이가 아들로 키워지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혹여 메이가 플로티나의 핏줄이 아니라면? 가주 자리를 노리고 있다면? 페르시스가 가주 자리를 내어 준다면?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겠지.
플로아는 초대 플로티나 가주, 파사베아를 위해 플로티나에 모든 것을 내건 입장이다.
평생 플로티나를 위해 살아야 하는 마당에 파사베아의 피를 물려받지 못한 자가 가주가 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테다.
그가 무릎을 굽혀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동시에, 거침없이 손을 들어 내 목을 붙잡았다.
“저와 약조하세요. 플로티나의 혈육이 아니라면 작위를 받기 전에 이곳을 떠나겠다고.”
나를 죽일 생각은 없는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하나, 그의 차가운 손길에서는 살의가 느껴졌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나를 죽일 수 있다는 듯이.
“감히 가주 자리를 넘보면 내 손에 죽겠다고.”
“…….”
“약조하세요.”
친절한 어조의 매서운 협박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페르시스가 왜 그를 냉혹하다는 단어로 설명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자는 정말로 플로티나를, 아니, 파사베아의 핏줄을 위한 존재. 그 외의 것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보였으니까.
“…….”
나는 플로아의 고운 얼굴을 감상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가주 자리만 넘보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
“난 또 뭐라고.”
“……?”
“약속하면 되는 거죠?”
내 목에 놓인 그의 손을 잡아떼서 손가락을 수동으로 굽혀 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지금 뭐 하는…….”
무서워하지 않고, 심지어는 태연한 내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얼빠진 그의 얼굴이 볼 만했다.
가주 자리는 줘도 안 가지지. 나이가 차면 이 집에서 나와 자유롭게 살아갈 거니까!
“약속.”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손바닥에 사인을 했다.
“사인.”
마지막으로 손바닥을 맞대 복사하는 것까지.
“복사.”
약속이 이리도 간단할 수 없었다.
그의 손을 놓으니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나는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듯이 눈빛에 힘을 가득 실었다.
“가주 자리 절대로 넘보지 않을게요. 절~대로!”
여전히 플로아는 얼이 빠져 있었다. 그가 낮게 읊조렸다.
“어째서…….”
“네?”
“어째서 무서워하지 않는 겁니까?”
죽이겠다는데도, 죽일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플로아의 입장에서는 얼이 빠질 만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원작에서도 플로아는 막강한 마력을 가진 자로, 동시에 정신계 마법을 잘 사용하는 인물로, 그가 원하면 오래도록, 그리고 차마 상상도 못 할 고통을 안겨 주며 죽일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었으니까.
실제로 그의 손에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고작 열 살인 내가 무서워하지 않는 듯하니 놀랍겠지.
“어째서 저를 무서워하지 않느냐 물었습니다.”
나는 순수하게 대답했다.
“그야, 약속을 잘 지킬 자신 있으니까요?”
약속을 지키면 죽이지 않을 거잖아.
“제가 방금 목을 잡아 위협을 가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손에 힘이 안 들어갔는걸요?”
“…….”
그는 말문이 막혀 버린 듯했다. 고작 손에 힘을 안 줬다고 무서워하지 않는다니.
뭐, 확실히 플로아라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목을 댕강 날려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제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나는 질문의 저의를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플로아 님이잖아요.”
“…….”
“왜요? 사실 아니었던 거예요?”
나는 일부러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똘망똘망하게 쳐다봤다.
나쁜 속내는 하나도 없다는 듯이, 절대로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듯이 천진하게 굴어 그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다행히 플로아는 꼬리를 내려 주었다.
“……플로아가 맞습니다.”
“역시 그렇죠?”
나는 그에게 방실방실 웃어 보였다.
“그래도 플로아 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제가 나쁜지 아닌지 어찌 판단하십니까?”
“제가 마음에 안 들면 정신계 마법으로 아빠를 조종해서 저를 고아원에 보내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잖아요.”
“……정신계 마법은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나쁘지 않다는 거죠.”
나는 그에게 악수하자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가 가주가 되길 바라지 않고, 나는 가주가 될 마음 없다. 고로 우린 적이 될 일 없다는 말씀!
“앞으로 잘 부탁해요, 플로아 님!”
“…….”
플로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그에게 내 온기를 나눠 주니 어느새 새어 든 햇살이 우리를 환히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