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화
짧은 머리에 남성복 차림. 누가 봐도 여느 남자애와 다름없는 나는 식당에 먼저 와서 페르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떨렸다.
과연 후계자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보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설렘이 앞섰다. 지난 1년간 침실 아니면 도서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결과였다.
페르시스가 오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그를 맞이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버지.”
“…….”
그는 내 인사를 아주 가볍게 무시하곤 자리에 앉았다. 지켜보던 요한이 다 뻘쭘해할 정도였다.
칫, 이제 앞으로 매일 볼 사이인데 인사 정돈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냐?
나는 그를 한 번 찌릿 째려보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착석했다.
그러자 페르시스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플로아에게 네가 내 아들로 살아갈 거라 말해 뒀다. 아무도 네 성별을 의심하지 못하는 마법을 걸어 두라 일렀으니 네가 먼저 여자라고 밝히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네가 여자라고 의심하지 못할 거다.”
오, 그것참 희소식인데? 적어도 내가 여자라는 것이 들통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나는 문득 좋은 꾀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까 페르시스가 나를 내쫓지 못하게 하는 마법을 걸면 다 해결되는 거 아냐?
아들 행세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 집에 있을 수 있잖아!
그러나 정신계 마법은 영원하지 않다. 비체의 간청으로 걸어 놨던 마법이 풀려 내가 페르시스와 마주치게 된 것처럼 이 마법도 언제든 풀릴 수 있다는 것.
마법이 풀리는 날엔…….
상상을 하니 돌연 오싹해져 고개를 휙휙 저으며 바로 머릿속에서 떨쳐 냈다.
페르시스에게 마법을 걸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팔에 돋아난 닭살을 가라앉히며 플로아에 대해 생각했다. 플로아는 정신계 마법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다.
원작에서 플로아는 그리 비중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플로아 역시 그저 플로티나가의 수호신일 뿐인 한낱 조연.
하지만 내가 이 세계에 빙의된 후 플로아에 대해 알아보니 정신계 마법으론 그를 이길 자가 없는, 한낱 조연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를 만나 보고 싶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해서 궁금했다. 어떻게 생겼을지, 어떤 성격일지, 마법은 어떻게 쓰는지.
왜 나에게 그 어떠한 기별도 주지 않고 마법을 풀었는지, 등 궁금한 게 많았다.
그리고 마침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생겼다.
“플로아는 네 검술 스승이 되어 줄 거다.”
정말? 내 눈이 급작스럽게 초롱초롱해졌다.
“진짜요?”
“플로티나의 후계자는 플로아가 검술 스승을 맡기로 되어 있다.”
“그럼 오늘 만나는 건가요?”
내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니 페르시스는 조금 떨떠름해했다.
“……이른 시일 내에 플로아가 네게 찾아갈 거야.”
플로아를 만난다니! 영적인 존재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잖아!
나는 플로아를 볼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에 반해 페르시스는 들떠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뭐가 그리 좋은 거지? 플로아에게 어떤 것이든 조금이라도 기대했다간 크게 실망할 거다.”
“어째서요?”
“플로아는 플로티나의 핏줄이 아닌 자에겐 냉혹하니까.”
페르시스 입에서 누구더러 냉혹하다는 평이 나오는 게 웃겼다.
자기는 친딸일지도 모를 애를 고아원에 보내려고 했으면서.
“하지만 제가 플로티나의 핏줄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직 모르는 거지. 내가 플로티나의 핏줄일지 아닐지는.
“정정하지. 플로티나의 핏줄이라 확정되지 않은 자에겐 그래.”
“……그렇군요.”
그래도 과연 페르시스만큼 냉혹할까. 직접 겪어 보면 알 터였다.
“오늘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될 거다. 전에도 말했듯이 내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언제든 내쫓을 거야.”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나는 밝게 대답했다.
“수업에 열심히 임하겠습니다.”
“당연한 소리. 오늘 오후에 네 가정교사가 될 유디프 부인이 방문할 거다. 부인에겐 네가 아들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 알려 뒀어.”
나는 페르시스 뒤에 서 있는 요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유디프 부인이면 요한 경의 어머니인가? 내 비밀을 알려 준 걸 보면 믿을 만한 분인가 보네.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내게 부드럽게 눈웃음을 쳤다.
유디프 부인도 요한처럼 좋은 사람이겠지? 나도 그에게 눈웃음을 보였다.
“부인에게도, 플로티나 가문에도 누가 되지 않도록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
페르시스의 말대로 오후에 유디프 부인이 방문했다. 나는 내 서재에서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아틸라 유디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자님.”
머리카락 한 올조차 튀어나오는 걸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꽉 조여 묶은 밤색 머리. 고지식해 보이는 네모난 안경. 자주색 입술. 카리스마 있는 눈빛.
요한처럼 사근사근할 것 같다는 내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아틸라가 악수를 청해 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부인.”
아틸라는 큼큼, 거리며 목을 풀더니 왼손으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안경에 섬광이 감돌았다.
“앞으로 검술을 제외하고 인문, 경제, 정치, 역사, 종교 등등 학문부터 시작하여 예절까지 공자님께서 완벽한 후계자가 되실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아틸라는 일부러 쏘아붙이듯 쉼 없이 빠르게 말했다.
“공자님의 사정은 각하께 전해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자님께서 플로티나의 후계자 구색을 갖출 때까지 쉬는 날 없이 교육을 진행할 것이니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랩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 빨라서 듣고 있던 나는 얼떨떨했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제가 공자님의 현 수준을 알아야 하니 테스트부터 진행하겠습니다.”
“테스트요……?”
“네, 테스트요.”
아틸라는 내 등을 밀어 나를 책상 앞 의자에 앉혔다.
눈 한 번 깜빡이니 책상 위엔 없던 시험지와 펜이 생겼다.
빠, 빠르다…….
“시간은 3시간 드리겠습니다. 정확히 3시간이 지나면 바로 걷어 갈 테니 시간 분배 잘하며 풀어 주십시오. 그럼 시작합니다.”
버, 벌써?
나는 너무 빠른 아틸라에 당황해 처음 1, 2번은 허겁지겁 풀다가, 3번부터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차근차근 풀었다.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는 많지 않았다. 문제 난이도는 열 살 아이한텐 굉장히 어려울지 몰라도 성인한텐 풀 만한 수준이었다.
시간 안에 다 풀 수 있겠는데? 헷갈리거나 막히는 문제는 표시해 두었다가 시간 남으면 풀자.
나는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나갔다.
***
3시간 후. 아틸라는 채점한 시험지를 붙잡곤 손을 떨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세 문제 빼고 다 맞았다.
찍어서 세 문제 맞힐까 말까 할 줄 알았더니만 세 문제 빼고 다 맞았다. 이 정도면 이 작은 소녀가 가정교사를 해도 무리 없다고 봐야 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아틸라는 말까지 더듬었다.
“고, 고, 공자님. 도대체 공부를 얼마나 하신 거죠?”
메이는 잠시 생각해 보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빙의한 이후 제국어를 깨우치기 위해 책을 가까이했었다. 페르시스와 마주치면 쫓겨날 테니 침실 혹은 도서실에만 박혀 있어야 했고, 그에 따라 책 읽는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
장르 불문,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제국어를 깨우치는 건 물론, 여러 지식이 많이 쌓인 것이다.
“다른 과목이야 암기했다고 쳐도 수학은 독학하기 어려우셨을 텐데요?”
그녀는 모르겠지만 메이가 이전 생에서 치른 k-입시 과정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기본이었다.
실제로 아틸라가 낸 수학 문제는 대한민국 중학교 1학년 수준이었다.
메이는 방긋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부인께서 쉬운 문제만 골라 주신 덕분인걸요?”
“쉬,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만 골랐더니 쉬운 문제만 골라 준 덕이란다.
아틸라는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판이었다.
오히려 메이는 당황해하는 아틸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지? 내가 생각보다 많이 맞혔나? 아차차, 나 지금 열 살이지? 열 살 수준에 맞게 몇몇 문제는 틀릴 걸 그랬어.
메이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만회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그 쉬운 문제라는 말은…… 찍기 쉬운 문제였다, 이 말이었어요. 전부 객관식이었잖아요. 주관식이었으면 못 풀 문제 많았어요.”
아틸라는 반쯤 넋이 나가 있다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곤 시험지를 다시 훑어보았다. 찍었다기엔 푼 흔적이 선명했다.
‘설령 찍어서 맞혔더라도 이런 점수가 나올 수는 없어. 이 점수를 받으려면 적어도 아카데미에서 3년은 공부해야 해.’
그렇다면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플로티나 공자는 어떻게 이리 많이 맞힌 거지?
아틸라가 메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는 다시금 순진무구하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
푹―!
아틸라는 심장에 하트 모양 촉 화살이 꽂힌 것 같았다.
‘서, 설마 내가 맡게 된 제자가…….’
아틸라의 자줏빛 입꼬리가 점점 가늘게 올라가더니 볼록 튀어나온 광대를 뾰족하게 찔렀다.
‘천재?!’
아틸라 유디프는 가정교사 10년간 여러 영식들을 가르쳐 왔다.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말썽꾸러기에, 말을 지지리 안 듣고, 아틸라를 도발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기선제압을 해서 기를 죽여 놓는 게 중요했었는데…….’
천재 앞에선 기선제압이 무슨 쓸모란 말인가! 말 그대로 내 제자가 천재인데!
‘게다가 여느 영식들과 달리 차분하기까지 하니 말이야.’
이미 그녀는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어져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아틸라는 제 앞의 소녀를 향해 헤벌쭉 웃었다.
‘완벽한 제자를 만나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