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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화 (8/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화

긴장하고 있다는 게, 떨고 있다는 게 티 나지 않도록 메이는 최대한 씩씩하고 당차게 말했다.

잘 해낼 자신 있다는 걸 내가 보여 주지 않으면 이 모든 게 헛수고가 될 터이니.

“여자인 제가 아들 행세를 하겠다는 게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고, 그다음에 내쫓을지 말지 결정해 주세요. 가문에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아 쫓겨난다면 키워 주신 값을 갚을게요. 그것도, 두 배로요.”

예상했지만 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글쎄. 결과가 너무 뻔하지 않나? 결국엔 내쫓게 될 것 같은데 내 입장에선 겨우 키워 준 값의 두 배를 받으려고 그런 수고를 해야 하나 싶군.”

“제가 각하의 핏줄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저희 엄마도 제가 각하의 핏줄이라 말씀하셨어요. 각하의 친자식이 맞다면 저도 가문의 힘을 사용할 수 있어요.”

가문의 힘. 플로티나 사람이면 성인이 되기 전, 불시에 발현된다는 그 힘은 플로아의 마력이었다.

플로아는 초대 플로티나 가주와 노예 계약을 맺을 때, 플로티나 사람에게 자신의 힘을 공유하기로 약속했다.

플로아가 직접 마력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고, 마력이 스스로 플로티나 사람에게 접선을 시도해 불시에 발현되게끔 하는 것이었다.

“각하의 친자식인지 아닌지 확실히 결정 나는 건 늦어도 성년이 되는 생일까지일 테니 그때까지 신세를 지게 해 주세요.”

가문의 힘을 쓰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초대 플로티나 가주의 핏줄을 물려받은 사람일 것.

또 하나는 플로티나의 성을 받아 플로티나 사람임을 인정받을 것.

따라서 페르시스가 메이를 호적에 올리지 않으면 그녀가 정말로 그의 친혈육이라 할지라도 가문의 힘은 발현되지 않는다.

“만일 각하께서 평생 가문을 물려줄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면 딸이라도 필요하실 거예요. 친딸이 낳은 손주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내키지 않아 성인이 돼서 파양하겠다고 하셔도 잔말 없이 이 집에서 나가 돈을 갚을 거예요.

“그리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메이는 또박또박 자신 있게, 그의 마음이 기울도록 설득했다.

“저를 복권인 셈 치세요. 설령 꽝이 나와도, 적어도 키워 주는 값의 두 배로 돌려받는 복권이요. 굳이 긁어 보지도 않고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페르시스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래다.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최악의 상황으로, 이 아이가 다 포기하고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떠난다 해도 그때까지 아들로 살아준다면 가문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 도움은 된다.

‘이 집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파악했군.’

참 이상한 꼬맹이다. 어째서 자신을 버리려는 부모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이토록 당돌하게 아들로 살아갈 테니 자신을 키우라는 제안을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고작 열 살뿐인 아이가.

페르시스가 고민할 동안 메이는 남모르게 진땀을 뺐다.

‘제발 오케이해 줘. 이래도 안 된다고 하면 난 정말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단 말이야……!’

고아원에 가서 사기꾼에게 입양되고, 노예로 팔려 다니다가 백작가 영애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고!

그 간절한 마음을 신이 알아주기라도 한 걸까.

“……알겠다. 대신 후계자 수업을 대충 듣는 둥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내쫓을 거니까 그리 알아둬.”

페르시스가 승낙하자 메이의 얼굴에 무지개라도 생긴 듯 화색이 돌았다.

살았어! 성공이야! 이 집에서 안 나가도 돼!

메이는 활짝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쩐지 페르시스는 자신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도는 듯했다.

‘호칭이 자기 멋대로군. 각하였다가 아버지였다가…….’

하지만 신난 얼굴로 스테이크를 써는 꼬맹이를 보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메이는 세상에서 가장 기쁜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오물거렸다.

‘아들 행세를 열심히 하다가, 성인이 되면 이 집을 나가 자유로운 삶을 사는 거야!’

그 순간만큼은, 아들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걱정은 집어치웠다.

***

“엘렌, 조안! 나, 성공했어!”

페르시스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엘렌은 감격스러워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정말이에요?”

“응! 아들로 사는 거 허락하셨어.”

조안은 함빡 웃으며 기뻐했다.

“그럼 계속 여기 계시는 거죠?”

“물론이지!”

“와아아-! 전 우리 아가씨가 해내실 줄 알았어요!”

나와 조안은 손을 맞잡고 콩콩 뛰며 기쁨을 표출했다.

하지만 내가 고아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엘렌은 점차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아가씨,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아들로 사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많은 시련이 있을 거고요.”

그냥 아들도 아니고 플로티나가의 후계자가 될 아들이다.

항상 엄마의 마음으로 내 곁을 지켜 주었던 엘렌으로선 걱정할 사유로 충분했다.

나는 뛰는 걸 멈추고 엘렌을 바라보았다.

“이미 벌린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버티다, 버티다 너무 힘들면 아빠한테 아들 행세하는 거 포기하겠다고 할게. 내쫓겠다고 하면 돈을 모아서 나가서 살지, 뭐.”

내 목표는 홀로 돈을 벌어 먹고살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공작저에서 머무는 것.

일단은 성인이 된 후 출가할 계획이다.

상황에 따라서 그 전에도 출가할 의향이 있긴 하다. 이곳에서 여자는 열여섯 살 생일을 맞는 순간부터 성인이지만 열넷, 열다섯도 직장을 구할 수 있으니까.

어찌 되었건, 아들 행세를 하는 게 고될지라도 근 몇 년간은 절대로 포기할 생각 없다.

아들로 사는 걸 걱정하는 엘렌의 말에, 내가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기뻐하던 조안도 우울해졌다.

“아가씨, 그럼 전 이제 아가씨를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해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우리 예쁜 메이 아가씨를 어떻게 도련님이라고 불러요…….”

조안이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계속 부르다 보면 적응될 거야. 자, 따라 해 봐. 메이 도련님.”

“메이 도련님…….”

조안이 힘 빠지는 목소리로 불렀음에도 나는 칭찬해 주었다.

“잘하네.”

그리고 엘렌은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에 시선을 두었다.

“공자님으로 살게 되면 드레스도 전부 처분해야겠네요. 리본이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도요. 옷장을 남성복으로 채워야 하니 쇼핑도 해야 해요.”

“그러네…….”

나풀나풀 바람에 휘날리는 사랑스러운 드레스와 깜찍하리만큼 아기자기한 장신구는 아들이 되면 착용할 수 없다. 그 당연한 사실이 조금은 한스럽기도 했다.

“그동안 입을 옷을 구해 와 줘서 고마웠어, 엘렌, 조안.”

페르시스 몰래 살아가는 동안엔 그의 돈으로 옷을 살 수 없으니 엘렌과 조안이 구해다 줬었다.

“친언니한테 아가씨…… 아니, 도련님보다 두 살 더 많은 딸이 있어서 안 입는 옷 가져왔던 것뿐인걸요? 사이즈가 잘 맞아서 다행이었죠.”

“저도 아이가 있는 친구들한테서 안 입는 옷을 달라고 해서 받은 거라…… 외려 새 옷을 구해 오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에요.”

“아니야. 내 옷들 정말 마음에 들었는걸? 고마웠어.”

새 옷, 헌 옷이 뭐가 중요한가. 마음에 들어 잘만 입고 다녔으니 만족스러웠었다.

“나름 추억이 있는 옷들이라 버리긴 아까운데…… 상자에 담아 두면 안 될까?”

“그리해요.”

엘렌과 조안은 곧바로 내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안이 밖에서 큰 상자를 가져오자 엘렌이 드레스를 곱게 접어 차곡차곡 담았다.

그사이, 나는 침대에 놓여 있던 토끼 인형을 껴안았다.

내 품 안에 매일 안고 잤던 토끼 인형. 페르시스 플로티나의 아들이 되면 너와도 이별해야겠구나.

지금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좋은 시절은 다 갔다. 하지만 좌절하진 않는다.

노예로 팔려 다니다가 맞아 죽는 것에 비해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아들 행세에 임해야지.

나는 토끼 인형을 들고 언젠가 물려받은 드레스와 갖가지 장신구가 들어 있는 상자로 갔다.

그 상자 앞에서 토끼 인형을 한 번 더 껴안고는 드레스 위에 올려두었다.

“잘 있어, 예쁜이들.”

그 위로 상자 뚜껑이 덮였다.

***

메이가 아들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건 단 이틀 만에 공작저의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다. 조안이 시종들에게 주의를 준 결과였다.

“여러분, 이제 메이 아가씨를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돼요. 앞으로 주인님의 아들로 살아가실 거거든요. 그래서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해요.”

시종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머리를 짧게 자르곤 남성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메이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는 믿게 되었다.

의도하던 건 아니었으나, 메이가 페르시스의 친딸이 아닐지도 몰라 그녀를 좋지 않게 보던 시종들도 안타까워했다.

요한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가씨가 이 집에 남아 있길 바랐지만, 아들 행세까지 하며 이 집에 남아 있길 바라던 건 아니었으니까.

페르시스가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는 길에, 요한은 겁도 없이 자신의 주인에게 투덜거렸다.

“정말로 아가씨를 아들로 키우실 건가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남자로 살게 된다니…….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제가 다 속상해요.”

“시끄러워.”

제 주인이 시끄럽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론 그를 원망했다.

‘주인님은 너무하셔. 어떻게 작고 여린 아가씨를 남자애로 키우겠다고 할 수 있지. 아가씨가 불쌍해…….’

요한은 안타까워 한숨만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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