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화 (7/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7화

딸과 달리 아들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그 아들이 설령 자신이 애증하는 여자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페르시스는 답할 가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이미 넌 아들이 아닌데 그걸 물어서 뭐에 쓸 거지?”

“그냥 궁금해서요. 알려 주세요.”

왜냐면 제 최후의 수단이 당신 아들로 살아가기거든요.

평생을 그의 아들로 살아가며 가문을 물려받고 대를 이어 갈 것처럼 굴다가 성인이 되자마자 이 집을 떠나는 것.

그게 내 최후의 수단이었다.

“답할 의향 없다.”

나는 그 말을 내 나름대로 해석했다.

아들이면 키울 의사가 있긴 한데 비체의 아이라서 거리낌은 있다, 이거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 방법이 잘 통할 수 있겠는데?

“알겠어요. 좀 이따 봬요.”

나는 그에게 허리 숙여 공손히 인사한 후 도서실 밖으로 나왔다.

***

페르시스는 메이가 나간 문을 잠시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좀 이따 보자고?’

누구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때에 보자, 말자 하는 거지? 그의 단정한 눈썹이 미간을 불만스럽게 좁혀졌다.

하나, 이상하게도 기분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얼마 후, 페르시스는 도서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요한에게 쏘아붙였다.

“왜 그 꼬맹이를 멋대로 들였지? 내 허락을 받는 게 기본이 아닌가?”

“죄송합니다. 아가씨가 너무 귀여우셔서…….”

죄송하다면서도 요한은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메이가 그토록 귀여울 수 없었다.

‘어쩜 그리 귀여우시지?’

페르시스는 요한을 못마땅하게 보며 쯧쯧 혀를 차다가 저 혼자 복도를 걸었다.

요한은 아까 본 메이를 떠올리다가 자신의 주인이 저 멀리 가 있는 걸 보고선 헐레벌떡 뒤따라갔다.

“주인님 눈엔 아가씨가 귀엽지 않으신가요?”

“안 귀여워.”

요한은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요정님이라 불러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사랑스럽고 깜찍한 우리 아가씨가 어찌 귀엽지 않단 말인가!

“전 아가씨보다 귀여우신 분을 본 적 없어요.”

“난 무언가를 귀엽다고 느껴 본 적 없다.”

“하하……. 그렇군요…….”

어련하시겠어요. 요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성격이 특이하더군.”

“아가씨 성격이요?”

“나를 무서워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사회적 위치와 그가 가진 가문의 힘 때문에 그를 어려워했으며 더 나아가 무서워하기까지 했었다. 그의 차가운 인상도 한몫해서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 꼬맹이에게선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운 사이가 되면 하인드처럼 자신을 편하게 대한다고 하더라도, 그 꼬맹이와는 오늘 처음 본 사이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당돌하게 군다.

“실은 무서워하는데 주인님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걸 수도 있어요.”

“노력?”

생각해 보면 화원에서 자신의 소매를 잡았을 때 그 꼬맹이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긴 했었다.

‘하긴, 내쫓겠다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 없지.’

“그동안 혼자서 외로우셨을 거예요. 처음 만난 가족이니 얼마나 친해지고 싶으셨겠어요.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제가 도서실에 들여보냈던 거예요.”

허락 먼저 받았다간 당연히 들이지 말라고 하실 테니까요.

요한은 메이를 고아원에 보내려는 걸 막기 위해 최대한 그녀의 장점을 어필했다.

“아가씨는 아직 열 살밖에 안 되셨지만 고아원에 가라는 말에 울지도 않으시고, 대답도 또박또박 잘하시죠. 또래들과 비교하면 매우 성숙하신 거예요.”

“…….”

“분명 커서 아주 멋진 분이 되실 거예요.”

“…….”

그럼에도 페르시스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묵묵히 복도를 걸었다.

‘조금 마음이 변하셨으려나?’

그가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 요한은 알 수 없었다.

요한은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발 우리 아가씨가 이 집에 남아 있게 해 주세요.’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엘렌과 조안을 불렀다. 그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또 울먹거렸으나 곧 일단락됐다.

“엘렌! 나, 머리 자를래. 아주 짧게 잘라 줘.”

전혀 예상치 못한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네……? 아주 짧게요?”

“응. 남자애처럼 보일 수 있도록!”

엘렌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왜요? 아가씨는 긴 머리 좋아하시잖아요. 특히 웨이브 머리 좋아하셔 매일 머리를 땋고 주무시고요.”

옆에 있던 조안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전에는 머리끝을 다듬는 것도 질색하셨죠.”

“그랬는데, 이젠 잘라야 해. 나, 앞으로 아들 행세를 해야 하거든.”

엘렌과 조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들…… 행세요?”

나는 그들에게 내 계획을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딸로선 절대로 그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없을 것 같으니 아들로 살아가는 것.

물론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만이지, 성인이 되면 아들 행세를 그만두고 이 집에서 나올 거란 것도 알려 주었다.

“……내가 고아원에 가지 않으려면 이 방법뿐이야.”

여성인 몸으로 아들 행세를 하겠다니. 누가 들어도 고생길이 훤했다.

엘렌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들 행세를 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성인이 되어 집을 나가면 후에 어떤 큰일이 벌어질지 모르고요. 그냥 지금이라도 주인님께 가서 내쫓지 말라고 비는 게 어떨까요? 아가씨는 비체 님의 외모를 빼닮으셨으니 마음이 약해져서 내쫓는 걸 물리실지도 몰라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엘렌, 그거 아니야. 원작 메이가 그렇게 했다가 쫓겨난 거거든.

애초에 내가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마음이 약해질 거였으면 나가라는 소리도 안 했을 것이다.

“아빠는 그렇게 해서 마음이 바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미 내가 필요한 사람임을 증명해 보겠다고 한 마당에 내쫓지 말라고 빌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어 버리고.”

이번엔 조안이 의견을 냈다.

“주인님을 딸바보로 만드는 건 어때요? 아가씨는 엄청 귀엽고 사랑스러우시니까 조금만 애교를 해도 부성애를 자극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다시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헛수고야. 아빠 성격에 부성애가 있을 리 없어.”

물론, 나중에 입양될 스텔라한테는 생기겠지만.

“그럼, 이건 어때요? 아가씨께선 아직 열 살밖에 안 되셨는데도 제국어에 능통하시잖아요. 똑똑해서 장래가 밝은지라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하는 건요?”

“과연 아빠가 딸의 투자 가치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냥 지금으로선 아빠에겐 딸이 필요하지 않은 거야. 그래서 내가 아들 행세를 하겠다는 거고.”

“…….”

내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아원에 가지 않으려면 아들로 살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을 것 같았다.

엘렌은 내가 남자로 살게 될 걸 생각하니 속상한지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아가씨 어쩌면 좋아…….”

조안은 내가 방심한 틈에 나를 꽉 껴안았다. 안기는 사람이 숨 막혀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윽!”

“흐엉- 아가씨가 너무 불쌍해요, 흑흑. 우리 아가씨 이렇게나 여리신데 아들 행세라니, 흐어엉!”

“아, 알겠으니까, 제발 좀 날 세게 껴안지 좀…….”

“흐어엉-”

조안의 울음소리에 내 목소리는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나는 조안의 품에서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다짐했다.

‘다시는 엘렌과 조안이 슬퍼할 일 만들지 말아야지.’

***

그날 저녁이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온 페르시스의 시야에 스테이크가 놓인 접시 2개가 들어왔다.

하나는 그가 늘 앉는 상석에, 하나는 마주 보고 앉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페르시스가 상석으로 가며 하녀에게 물었다.

“저건 누구 거지? 하인드 나제트는 돌아갔을 텐데.”

“메이 아가씨 겁니다. 아가씨께서 주인님과 같이 식사하겠다고 하셔서요.”

페르시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썹을 삐딱하게 세웠다.

“내가 그 꼬맹이랑? 누구 마음대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자리에 앉은 페르시스가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주 잠깐.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멈칫했다.

시선 끝에 닿은 메이는 허전하리만큼 머리카락이 짧아져 있었다.

페르시스는 한동안 메이의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만 아니면 예쁘장한 남자아이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짧게 잘랐으니 말이다.

“너, 머리가…….”

“잘랐어요.”

비참하게 죽는 결말만 막을 수 있다면 이깟 머리카락, 몇 번이고 자를 수 있지.

메이가 자리에 앉으니 그가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하려는 말이 뭐길래 내 식사까지 방해하지?”

메이는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준비해 온 대사를 읊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는데, 각하껜 열 살 소녀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페르시스는 예상했던 결과라는 듯한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러 왔군.”

“아니요. 그래서 각하께 어떤 사람이 필요할지 생각해 봤습니다.”

“열 살 소녀는 필요치 않다고 방금 네 입으로 인정하지 않았나?”

열 살 소녀면 그렇고, 열 살 소년이면 말이 달라지지.

메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들, 필요하시죠?”

그러자 페르시스가 나이프질을 멈췄다.

“대를 잇기 위해선 아들이 필요하죠. 현행법으론 딸에겐 작위를 물려줄 수 없으니까요.”

그는 메이를 쳐다보며 재밌다는 듯이 옅게 조소했다.

“재밌군. 그래서 머리를 잘랐나? 네가 내 아들이라도 되려고? 안타깝지만 아들은 나중에 결혼해서도 낳을 수 있어.”

“결혼하실 생각 없잖아요.”

그를 향한 메이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원작에서 페르시스는 비체가 아닌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었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하지?”

“혼기가 차도 아내를 두지 않으셨죠. 누가 구애하든 받아 주지 않으셨고요.”

사실이었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페르시스는 달리 아내를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제가 각하의 아들이 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