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5화
고아원이라는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다.
“마차를 준비해 놓을 테니 오늘 중으로 저 꼬맹이 내보내.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왔을 때 이 집에 아직도 저 꼬맹이가 있다면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의 지시에 나도 엘렌도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이라니. 그렇게나 빨리 보내겠다니…….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다 안 됐다고……!
페르시스에게 무언가 간청하려는 듯 눈빛을 보내던 엘렌은 차갑다 못해 냉혹한 페르시스의 표정에 입술을 차마 떼지 못했다.
마침내 엘렌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페르시스가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였다.
그가 내게 등을 보이는 순간, 나는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런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말은 더듬거리며 나갔다.
“내, 내일까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낯도 아니었지만 날 성가셔하는 기색이 눈에 보였다.
“증명해 보일게요. 제가 각하께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요.”
“…….”
그가 대답 없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자, 내가 말을 이었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순순히 이 집에서 나갈게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알겠다고 해 줘. 나한테 기회 한 번 정도는 있어도 되잖아……!
너무나도 간절한 나머지 소맷자락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이내 그의 대답이 나왔다.
“……그래, 해 보든가.”
승낙이었다.
나는 겨우 그 한마디에 몹시 감격스러워했다.
“감사합니다……!”
참 속도 없었다. 뭐가 감사하다고.
그러나 살기 위해선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내 손을 떼어 낸 후 화원 밖으로 나갔다.
***
메이와 대화를 나눈 이후 페르시스는 자신의 응접실에 당도했다.
응접실엔 어떤 사내가 먼저 와 있었다.
그 사내는 페르시스의 유일한 친우, 하인드 나제트였다. 페르시스와는 어릴 적부터 친했던.
“예고 없이 찾아오는 건 여전하군, 하인드.”
페르시스는 소파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큰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볕이 하인드의 은발과 체리색 눈동자를 비췄다.
“간만에 얼굴 좀 보려고 왔지. 한동안 바빠서 못 왔잖아.”
곧 하녀들이 커피와 디저트를 내어왔다. 하인드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고민거리가 있어서 털어놓고 싶기도 했고.”
“무슨 고민.”
“형의 딸 때문에.”
하인드는 나제트 후작가의 선대 가주였던 그의 친형, 안토니오가 죽어 최근 후작 자리에 올랐다.
안토니오에겐 호적에 넣지 않은 딸이 있었는데, 하인드는 그 여자애 얘기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
“전에 알려 줬던 것 같군. 이름이…….”
“스텔라.”
“맞아, 그런 이름이라고 했었지.”
하인드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는 “형도 참,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어.”로 운을 떼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안토니오는 죽기 전, 안 좋게 헤어진 전 부인에게서 자신의 딸을 데려왔었다.
딸을 사랑해서 데려온 것은 아니었고, 매달 꼬박꼬박 주는 양육비로 자신의 사치품을 사기 바빴던 전 부인이 아니꼬워서 양육비를 주지 않을 목적으로였다.
안토니오는 딸을 무척 예뻐하진 않았지만 나제트가에서 호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안토니오가 세상을 떠난 후, 하인드는 가주가 되면서 자연스레 나제트가 명부를 확인하게 되었다.
하인드는 명부를 보고 놀라고 마는데, 그 명부에는 안토니오가 데려온 딸, 스텔라의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형이 스텔라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더라고. 정말 무슨 생각인지…….”
심지어 그 아이는 전 부인 쪽 호적에도 올라가 있지 않았다.
무호적자 상태. 스텔라는 법적으로 고아나 다름없었다.
“형은 이미 세상에 없고, 애 엄마는 애를 키울 마음 없다고 찾아오지 말라고 그러고……. 누군가에게 입양되지 않는 이상 그 아인 쭉 무호적자 상태일 거야.”
페르시스는 그의 이야기가 어쩐지 자신의 상황과 비슷하게 들렸다.
“……나와 비슷한 상황이군.”
“비슷한 상황이라니?”
“지금 비체의 딸이 내 집에 있어.”
“뭐어?!”
페르시스는 덤덤하게 메이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하인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듣는 내내 입을 떡 벌린 채 있었다.
하인드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메이를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응.”
“진심이야? 정말 진심으로 애를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침착하려 했으나 하인드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샌가 흥분해 있었다. 그의 가치관으론 애를 고아원에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페르시스는 단정한 어조로 재차 대답했다.
“키울 마음 없어.”
그는 겁 없이 자신을 붙잡던 메이를 떠올렸다.
‘증명해 보일게요. 제가 각하께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요.’
바보같이 승낙해 버렸다. 그 꼬맹이가 자신에게 필요가 없다는 건 이미 판단을 내린 후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기회를 줘 버렸다. 언젠가 그 여자가 임신한 몸으로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저를 향하는 꼬맹이의 무구한 눈동자를 보았을 때, 문득 자신은 꼬맹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직감했던 것도 같다.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거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하인드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가 메이를 왜 싫어하는지는 잘 알겠어. 너에게 있어서 비체가 어떤 존재인지 아니까.”
하인드는 페르시스와 어릴 적부터 줄곧 친구였기에 그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근데 메이 입장도 생각해 줘라. 네가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일단 그 애는 네 딸이잖아.”
페르시스는 무덤덤하게 커피를 들었다.
“그 꼬맹이 입장을 생각해 봐도, 자길 싫어하는 부모보단 새 부모 밑에서 사랑받으며 크는 게 나아.”
“사랑받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보장 못 해.”
“내 집에 있으면 사랑받는 건 꿈도 꿀 수 없을 거다.”
“…….”
하인드는 반박하고 싶었으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그는 메이에게 눈곱만큼도 사랑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바뀔지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선.
“……네 말대로 메이가 새 가족과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쳐. 그럼 넌?”
넌 후회하지 않겠어?
“네 딸을 고아원에 보낸 후에 후회하지 않겠냐고.”
후회라.
페르시스는 입안에 머금은 커피에서 쓴맛을 강하게 느꼈다.
자신이 살면서 후회할 일은 딱 한 번뿐이다. 비체에게 마음을 주었던 것.
딱 그거 하나. 더는 후회할 일 없다.
“하인드, 난 아직도 그 여자의 악몽을 꿔.”
“뭐? 아직도?”
하인드는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비체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그녀의 악몽을 꾼단 말인가.
“내 전부나 다름없던 그 여자가 날 버리고 간 꿈.”
홀로 남겨진 자신이 괴로워할 걸 알면서 기어코 자신의 곁을 떠난 꿈.
“그런 내게 후회라니.”
후회는 미련을 가진 자가 하는 것.
“얼토당토않지.”
그에겐 그 어떠한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나는 홀로 생각할 시간 좀 갖겠다며 엘렌을 들여보내고 화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이제 이 방법뿐인 걸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 했던 내 최후의 수단.
문제는 내게는 최후의 수단인데도 페르시스에게는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기분과 달리 무심하리만큼 화창했다.
왜 하필 메이였을까. 왜 하필 이 몸에 빙의해서 예견된 미래를 두려워해야 하는 걸까.
메이의 잘못이 조금도 없다는 거 안다. 아주아주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면 페르시스의 잘못도 아니란 거 안다.
엄연히 따지면 메이를 입양해서 노예로 팔 생각을 한 사기꾼의 잘못이고, 어린 메이를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학대하다 죽인 백작가 영애의 잘못이다.
그 쓰레기들만 아니었으면 메이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새 부모를 만나 행복하게 컸을지 누가 아는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다시 페르시스를 떠올리니 분이 차올랐다.
아니, 애초에 페르시스가 메이를 책임졌으면 이런 고민할 일도 없잖아?
나는 혼자서 씩씩거리며 생각했다.
방금 전에 페르시스의 잘못 아니란 거 취소다! 백번 천번 잘못했지, 흥!
내가 팔짱을 끼고서 새침하게 고개를 휙 돌릴 때였다. 저택에서 나온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를 발견했는지 멈칫하더니 내 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저 곱슬거리는 은발…….
하인드 나제트다!
하인드는 원작에서 가끔 등장했던 페르시스의 오랜 친우다. 페르시스 성격에 친구가 있어서 놀랐었지.
나는 하인드에게 쪼르르 걸어가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메이라고 해요.”
굳이 인사를 건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인드 성격상 페르시스가 제 딸을 고아원에 보내려는 걸 알게 되면 기겁하며 말릴 터.
그가 페르시스를 말려 주길 바라며 내 존재를 알리는 거였다.
하인드는 내게 상냥한 눈웃음을 보였다.
“네가 메이구나? 얘기는 들었단다. 페르시스의 딸이라지? 나는 너희 아빠 친구, 하인드 나제트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하인드가 악수를 청하자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하인드는 이미 내가 메이임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내 인사에도 놀라지 않았다.
눈부신 백금발하며, 바다처럼 푸른 벽안하며. 비체를 빼닮았으니까.
하지만 이내 우리는 서로를 보며 알게 모르게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하인드가 서글퍼진 이유는 제 앞의 소녀가 고아원에 갈 위기에 처했다는 것 때문에 안쓰러워서였다.
그럼 난 왜 하인드를 보며 서글퍼졌는가.
그에게는 잃어버린 아들이 있다.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충격에 아내는 자살했고, 하인드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왔다.
원래 잘 웃는 사람이 상처가 많다고들 하지.
지금 나한테 웃어 주는 것도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게다가 원작에서 하인드는 아들을 찾지 못했으니까.
물론 결말 이후에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앞으로 근 몇 년간은 못 찾는다는 거였다.
‘안쓰러워서 어째.’
‘안쓰러워서 어째.’
나와 하인드는 서로가 안쓰러워 더욱 밝게 웃어 주려 애썼다.